위안부 피해 김군자 할머니, 九旬 맞아 전재산 장학금 기부

오명근기자 입력 2015. 6. 8. 14:51 수정 2015. 6. 8.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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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주고 나니 후련… 日 사죄 받는 게 마지막 소원"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으로부터 사과와 배상을 받기도 전에 저세상으로 떠나는데 살아생전에 일본이 사과하는 장면을 꼭 봤으면 좋겠습니다. 평생 모은 돈이 가난하고 어려운 청소년들이 공부하는 데 쓰이게 돼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생존해 있는 위안부 할머니 52명 가운데 사회에 기부를 가장 많이 한 김군자(90·사진) 할머니가 아름다운 재단에 5000만 원씩 2차례에 걸쳐 1억 원을 기부한 데 이어 최근 자신이 다니는 성당에 남은 전 재산 1억 원을 기부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올해 구순을 맞은 김 할머니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써달라며 남아있는 전 재산 1억 원을 경기 광주시 나눔의집 인근에 있는 퇴촌 성당에 지난 6일 기부했다. 김 할머니는 수중에 단돈 40만 원만 남아 있었지만 "수십 명의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만은 편했다.

그는 기부한 후 "내가 돈을 쓰는 건 너무 아까운데 어려운 남에게 돈을 주는 건 하나도 아깝지 않다"며 "나 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 힘들어도 악착같이 살며 돈을 모았고 꾸준히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왔다"고 말했다. 그가 기부한 돈은 옷도 제대로 사 입지 않을 정도로 검소하게 생활하며 모은 것이다. 그는 "세 딸 중 맏이로 태어나 고아가 된 열세 살 때부터 77년 동안 혼자 힘들게 살면서 옷 장사와 밥장사, 식모살이, 노점상 등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억척같이 일하면서 살아왔다"며 지난 세월을 회상했다. 강원 평창이 고향으로 남달리 인정이 많은 그는 꽃다운 열일곱 살이었던 1942년 심부름인 줄 알고 집을 나섰다가 중국 훈춘(琿春)에 있는 위안소로 끌려가 광복이 될 때까지 고초를 겪었다.

김 할머니는 역사의 피해자였으면서도 언제나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는 삶을 살아왔다. 그는 비영리 공익재단인 '아름다운재단'이 출범한 지 수개월밖에 안 된 지난 2000년 궂은일을 하며 푼푼이 모은 5000만 원을 쾌척해 재단의 '1호 기금'을 만들기도 했다. 이어 그는 2006년에도 같은 재단에 5000만 원을 추가로 내놓는 등 어려운 사람들을 도운 공로로 지난해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특히 주변에서 자신을 위해 돈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검소했다. 몸이 아파 최근 동생 장례식장에도 가보지 못했다는 그는 "아무도 날 찾는 사람이 없지만 이제 재산도 다 정리했고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마음이 후련하고 정말 기쁘기만 하다"고 말했다.

지난 4일에는 15년째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아름다운재단 관계자 10여 명이 '나눔의 집'을 찾아와 조촐한 생일 파티를 열고 김 할머니의 생일을 축하했다.

광주=오명근 기자 om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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