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 70년] "아픔의 역사 알아야 나라 지켜"

김선영 입력 2015. 5. 26. 19:23 수정 2015. 5. 26.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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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분단 70년, 대한민국 다시 하나로] 김두만 前 공군참모총장 "日 차별 딛고 조종사 꿈 이뤄.."
지난 12일 충북 청주 공군 항공우주의료원에서 비행환경 적응훈련을 받고 있는 김 전 총장.

'한국 공군 최초 100회 출격.'

김두만(88) 전 공군참모총장(11대)에게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다. 그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2일 F-51 무스탕 전투기를 타고 첫 출격한 이래 1952년 1월11일 우리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 기록을 세웠다. 이후에도 '하늘의 영웅'으로 불리며 반평생을 하늘에 몸담았다.

김 전 총장이 다음달 다시 전투기에 오른다.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국내 기술로 제작한 최초의 경공격기인 FA-50을 타고 우리 영공을 돌아볼 예정이다. 그는 지난 12일 공군의 협조를 받아 충북 청주시에 위치한 항공우주의료원에서 비행환경 적응훈련을 무사히 마쳤다. 이 훈련은 전투기에 탑승하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젊은이들도 힘들어한다. 공군 관계자에 따르면 김 전 총장은 중력가속도 테스트(일명 G-테스트)를 비롯한 각종 훈련을 모두 이수했다고 한다.

지난 25일 김 전 총장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유년 시절 일본에서 비행기 조종사의 꿈을 키웠던 사연부터 광복 이후 한국 공군 창설의 초석을 닦으며 6·25전쟁에서 생사를 수없이 넘나든 이야기 등을 2시간여 동안 열정적으로 쏟아냈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의 부침을 몸소 겪은 그의 삶에서 광복은 가장 큰 전환점 중 하나였다.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이 지난 25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광복 70주년을 맞는 소회를 밝히고 6·25 당시 전투경험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용인=이제원 기자

―어려서부터 비행기 조종사를 꿈꿨나.

"1927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는데,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작은아버지 손에 이끌려 일본 도쿄에 가서 살았다. 일본에서 소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경비행기를 처음 봤다. 10살쯤 됐나. 경비행기가 학교 상공을 선회비행하는데 정말 신기했다. 당시 경비행기는 캐노피(조정석 덮개)가 없어 조종사의 상체가 그대로 기체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때 조종사가 목에 맨 마후라(머플러)가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을 보며 '사람인가 도깨비인가' 싶었다. 그때부터 '나도 비행기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며 조종사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일본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을 텐데, 조종사가 되는 길은 순탄했나.

"학교를 졸업하고 밥벌이를 하기 위해 기술자가 되려고 했다. 당시 도쿄에서 제일 큰 공장에 지원을 하니까 '반도인'(조선인)은 안 된다고 했다. 기분이 나쁘더라. 그래서 할 수 없이 오사카로 혼자 건너가서 공장에 취직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3D 업체였다. 1년 정도 다니다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근데 마침 일본 육군항공대의 소년비행학교 모집공고가 났다. 당시 전투기 조종사가 필요했던 일본은 한국인 학생도 뽑았다. 1943년 9월에 입교했다. 6개월 동안 비행기 타는 데 필요한 지상교육을 받고 다음해 3월부터 비행기를 타기 시작했다."

1952년 1월11일 대한민국 공군으로는 처음으로 100회 출격을 달성하고 귀환한 김두만(가운데 위) 당시 소령을 동료들이 축하해주고 있다.

―광복을 전후해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

"1945년 7월 중순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비행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때 일본군 최고 지휘부에서 동남아 여러 곳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조종 학생들을 싱가포르로 모이게 했다. '특공대' 임무 명령이 내려졌다. 다시 쿠알라룸푸르로 돌아가서 급강하, 초저공 침투비행을 하면서 폭격훈련을 받았다. 8월 초 일본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수송기를 타고 중간 기착지인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일본에서 온 수송기를 갈아 타야 하는데 며칠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프놈펜에서 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당시 일본군 소속이었기 때문에 종전 이후 베트남으로 옮겨가 포로생활을 해야 했다."

김 전 총장은 1946년 4월이 돼서야 포로생활을 마치고 1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부산항으로 함께 귀국한 40∼50명의 일본군 출신 한국인들 가운데는 김정렬 제1대 공군참모총장도 있었다. 김 전 총장은 "김정렬 장군이 부산항으로 오는 배 안에서 '대한민국이 독립됐으니 곧 정부가 설 것이다. 군에 비행부대도 생길 거다. 그때 같이 모이자'라고 하시더라"라고 말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 초대 총장은 광복 후 한국군 조직에 참여해 1949년 10월 한국 공군 창설에 기여했고 1987년에는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다.

―귀국 이후 생활은 어땠나.

"고향인 의령에 갔지만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매부가 서울 안암동에서 병원을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갔다. 다행히 일자리를 얻어 병원에서 1년쯤 업무를 도왔다. 당시 월남하는 이북 사람들이 치료를 받으러 많이 왔는데, 그들을 통해서 북한 실태를 전해듣기도 했다. 같이 귀국한 김 장군이 돈암동에 살았다. 병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는데 자주 찾아갔다. 김 장군의 집이 꽤 컸는데 당시 많은 항공인들이 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했다. 정부 수립 전인 1948년 4월, 김 장군의 권유로 당시 하사관학교에 입교했다.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4월에는 소위로 임관해서 L-4, L-5 연락기를 타고 정찰임무를 수행했다."

―6·25 발발 당시 상황은.

"그때 계급은 중위였다. 휴일을 맞아 동료와 함께 서울 시내로 외출을 나왔는데 전차(電車)를 타고 한강대교 북단을 지나고 있었다. 귀에 익지 않은 항공기 소음과 함께 김포 방면으로 날아가는 전투기 2대가 보였다. 곧이어 전쟁이 발발했음을 알리는 사이렌이 시내를 뒤덮었다. 황급히 여의도 공군기지로 귀대했는데 적기의 공습으로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개전 첫날이 지나갔다. 개전 당시 우리가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는 20대에 못 미치는 L-4, L-5 연락기와 1950년 3월쯤 국민성금 36만달러를 통해 구매한 T-6 훈련기 10대가 전부였다."

청주 공군 항공우주의료원에서 비행환경 적응훈련을 마치고 수료증을 받고 있는 김 전 총장.공군 제공

―전쟁기간 생과 사를 넘나드는 위험한 순간이 많았을 텐데.

"T-6 훈련기를 몰고 나간 첫 출격에서 적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문산의 철교를 폭파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영등포의 육군 조병창에서 만든 15㎏짜리 폭탄 10개를 투하 장치에 매달고 실전 출격을 했다. 그러나 날씨가 좋지 않았다. 주의해서 비행했지만 구름 안에서 항공기가 균형을 잃었는지 회전을 하며 곤두박질쳤다. 언제 폭탄 투하 버튼을 눌렀는지 모르겠지만 폭탄이 분리돼 떨어졌고 어렵사리 기체를 안정시키자 고도계가 200피트(약 60m)를 가리키고 있었다. 후방 좌석에 탔던 정비사는 교회를 다니는 독실한 신자였는데 '신의 도움으로 살게 된 것'이라며 부대교회에서 간증을 했다고 들었다. 이후에도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F-51 무스탕 전투기를 타고 우리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을 기록했다.

"1950년 10월2일 처음으로 무스탕 전투기를 몰고 첫 출격을 했는데, 이전 T-6 훈련기와는 확연히 성능 차이가 나더라. 전투기가 다르긴 달랐다. 이후 1952년 1월11일 금강산 일대의 북한군 보급로를 공습하는 임무를 수행한 후 기지로 돌아오니 동료가 모여 축하를 해줬다. 100회 출격인지도 몰랐다. 나중에는 100회 출격한 조종사들에게 지역 여고생이 와서 꽃다발도 안겨 주고 했는데, 그때는 처음이라 그랬는지 악수와 정비사들의 헹가래가 전부였다. 이후 한 차례 더 출격한 이후 경남의 사천비행장으로 옮겨 후배 조종사 양성을 맡게 됐다."

이후 김 전 총장은 공군의 요직을 두루 거쳐 1970년 제11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내고 이듬해 전역했다. 그는 "제가 원해서 조종사가 된 것이니 제 본분을 100%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전투기 조종사일 때나 비행단장일 때나 참모총장일 때나 최고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했다. 김 전 총장은 "광복 이후와 지금 우리 군을 비교하면 무기체계 변화가 천지개벽 수준"이라며 "최고의 장비에 맞는 소프트웨어, 즉 훌륭한 인재 양성을 통해 우리 군은 미국, 이스라엘을 능가하는 최고의 군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방산비리와 각종 군내 사건·사고로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떨어졌는데 신뢰 회복을 위해 군은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고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김 전 총장은 우리 사회의 원로로서, 젊은 세대에게도 한마디를 남겼다. "저는 일제 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청년 때는 6·25전쟁을 겪으며 민족상잔의 아픔을 몸소 느꼈다.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젊은 세대가 우리 역사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또 미래 한국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능동적인 젊은이들이 되어 달라."

▲1927년 2월16일 경남 의령 출생 ▲1949년 육군항공사관학교 졸업 ▲1958년 제10전투비행단장 ▲1963년 공군작전사령관 ▲1967년 공군사관학교 교장 ▲1970년 제11대 공군참모총장(공군대장)

김선영 기자 007@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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