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벽지 아이들 깨워주고 먹여주고 들어주는 '엄마 선생님'

정유진기자 2015. 5. 21.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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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영월 상동고등학교 김정화 교사

"저희 반 8명 학생 모두 빠듯한 가정환경 탓에 대학입시에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고생하는 학생들과 부둥켜안고 울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우리 반 학생에게는 재수도, 편입도 '사치'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절대 흐트러지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지난 14일 강원 영월군 상동읍 상동고등학교에서 만난 김정화(39) 교사는 2013년 전교생 11명의 농어촌 벽지학교에 발령받은 후 3년째 근무하고 있다. 김 교사는 2013년과 지난해 연달아 담임을 맡아 학생들을 모두 원하는 곳에 진학시킨 학교의 자랑이다.

상동고에 오기 전 원주시의 고등학교에서 고3 담임을 도맡았던 15년 차 중견 교사인 김 교사는 이곳에서 처음 학생들을 만난 날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학생 수 8명인 고2 담임을 맡은 첫날 가정환경조사서를 나눠 주자 한 여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저는 아버지가 있기는 한데 연락이 안 되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서 얼굴을 모른다"며 "같이 사는 부모는 없다고 표시해도 되느냐"고 질문했다. 질문하는 학생도 듣는 학생들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김 교사도 겉으로는 침착하게 "그래"라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적잖이 당황했다.

김 교사가 그동안 담임을 맡았던 시내의 학교에서는 학생의 불우한 가정사는 '비밀'이었다. 불우한 가정사가 학생들 사이에 알려지면 왕따를 당할 우려가 있어 교사들 사이에서도 쉬쉬했다. 하지만 한 마을에서 자라 초·중·고교를 같이 다닌 학생들에게 숨겨야 할 가정사는 없었다. 학생들이 하교한 후 모든 반 학생들의 가정환경조사서를 확인하고 나서야 김 교사는 손을 들어 질문한 여학생을 제외하고도 많은 학생이 어려운 환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학생들 대부분이 할머니 손에 자라고 있었다. 아픈 부모와 함께 살며 가장 노릇을 하거나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고통받으며 사는 학생도 있었다"고 말했다.

상황을 파악한 그는 학생들과 빨리 친해져 돕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녹록지 않았다. 김 교사는 "힘들게 성장해온 학생들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었다"며 "벽지학교의 특성상 발령 후 1∼2년 만에 교사들이 다른 학교로 가는 탓에 학생들은 교사에게 더욱 마음을 열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교사는 학생들의 얼음장 같은 마음을 녹이고 그곳에 꿈을 심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달력에다 학생들의 생일에 동그라미를 쳐 놓고 반 아이들의 생일이면 잊지 않고 읍내에서 케이크를 사서 생일파티를 했다. 여름에는 학교 앞에 흐르는 계곡에 돗자리를 펴고 삼겹살을 구웠다. 부모가 있는 학생들에게는 흔한 일이지만 상동고 아이들에게는 모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생일파티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에게는 사진을 찍는 것조차 생소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부모가 없는 집에서 늦잠을 자는 학생을 깨우는 일도 김 교사가 도맡았다. 김 교사는 학생들을 돌보는 할머니들도 알뜰살뜰 보살폈다. 김 교사는 "할머니들을 학교에 초대해 손자 손녀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저녁을 대접하면 아이들처럼 좋아하신다"고 말했다.

이런 김 교사에게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한 학생들은 깊이 간직해 두었던 사회학자, 인문학자 등의 장래희망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앞이 깜깜했다. 그는 "여유가 있으면 등록금이 비싼 대학에 갔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학교를 나와 시행착오를 겪어도 되지만 우리 학생들은 집이 어려워서 '좀 더 현실적인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조언할 수밖에 없었다"며 "학생들에게 미안했지만 학생들의 사정을 알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 교사의 조언으로 학생들은 교사, 간호사 등으로 장래희망을 변경했다.

고3이 된 학생들이 어렵게 정한 목표를 이룰 수 있게 독려하는 것도 온전히 김 교사의 몫이었다. 김 교사는 "부족한 교재로 학원 한 번 가지 못하면서도 졸린 눈을 비비며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예뻤지만 흐트러질까 봐 마음껏 칭찬할 수도 없었다"며 "수능을 앞두고는 오히려 더욱 무섭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2년간 가르친 제자들의 수학능력시험날이었던 2014년 11월 13일에도 제자들을 위해 오전 6시에 학교 관사를 나섰다. 부모가 없는 학생들을 집 앞까지 데리러 가서 자신의 차에 태우고 학교에서 20㎞ 떨어진 태백의 고사장까지 직접 운전을 했다. '여의치 않으면 모텔에서 자고 시험을 보겠다'는 학생들의 말이 마음에 걸려 김 교사는 직접 학생들을 챙겼다. 고사장까지 가는 길에 혹시나 사고가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시속 60㎞도 내지 못했다. 고사장에 도착해 학생들을 들여보내고 김 교사는 만감이 교차했다. 학생들의 손에는 김 교사가 꼼꼼히 일러준 대로 학생들이 직접 싼 도시락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김 교사는 "교문을 들어선 뒤에도 저를 몇 번이고 뒤돌아보던 아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날 김 교사는 이 학교에 더 오래 머물겠다고 다짐했다. 김 교사는 "벽지학교라면 기피하는 교사들이 대부분이지만 손길이 많이 필요한 학생들을 엄마처럼 챙겨줄 수 있는 이곳이 참 좋다. 내가 바보인지도 모르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영월=정유진 기자 yooji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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