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공부는 가슴에서 발까지 가는 여행"

오미환 입력 2015. 4. 30. 21:05 수정 2015. 4. 3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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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나온 신영복 교수의 마지막 강의

'강의'이후 10년만에 신간 '담론'

논어·맹자 등 동양고전 통해

지금의 세계 올바르게 인식하는 법

인간·자아에 대한 성찰 담아

마지막 강의 내용을 엮어 '담론'을 펴낸 신영복 교수는 동양고전을 통해 오늘을, 갇혀 있었던 20년 삶에서의 성찰을 이야기한다. 돌베개출판사 제공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된 명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잘 알려진 신영복(74)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마지막 강의가 책으로 나왔다. 돌베개출판사가 펴낸 '담론'이다. 그는 2006년 정년 퇴임 후에도 하던 강의를 지난해 2학기를 끝으로 그만뒀다. 매주 목요일 저녁 부천의 강의실에서 교사 회사원 등 다양한 이들이 모여서 위로와 격려, 공감과 감동으로 소통했던 명강의 강의노트와 녹취록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동양고전을 지금 여기의 과제와 연결해 새롭게 읽어낸 책 '강의' 이후 10년 만의 신작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 20일을 복역했다. 40대 중반에야 광복절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이듬해부터 성공회대 강단에 섰다.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써보낸 편지를 묶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출소 직전 1988년에 나와 뜨겁고 묵직한 감동을 던졌다.

이번 신간은 동양고전에 대한 더욱 깊고 풍부해진 독법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검열필 편지에 미처 쓰지 못했던 말들을 담았다. 논어ㆍ맹자ㆍ시경ㆍ주역 등 동양고전에서 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길을 찾아내는 1부와, 스스로 '20년 20일간의 대학 시절'이라 부르는 수감 생활에서 길어올린 인간과 자아에 대한 성찰을 담은 2부로 돼 있다.

첫 강의에서 그는 공부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공부란 "세계 인식과 인간에 대한 성찰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창조"이며, 따라서 "고전 공부는 텍스트를 뛰어넘고 자신을 뛰어넘는 '탈문맥'의 창조적 실천"이라고 강조한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 공부의 시작이지만, 진정한 공부는 가슴에서 끝나지 않고 발까지 가는 여행, 다시 말해 변화와 창조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가슴의 공존과 관용을 넘어 변화와 탈주로, 존재로부터 관계로, 현시대의 문맥을 뛰어넘어 탈근대의 담론으로, 한 지점에 갇힌 사유에서 벗어나 노마디즘으로, 걸림 없이 물 흐르듯 강의를 했다.

'시경'에서 문사철의 추상적 논리를 뛰어넘어 세계의 진실을 담아내는 시인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말하고, '주역'에서 인간을 온전하게 인식할 수 있는 틀로 관계론을 읽어낸다. 논어의 '화이부동(和而不同)' 담론을 다시 읽으면서는 현 정부의 '통일대박론'을 비판한다. 화(和)는 관용과 공존의 논리인 데 비해 동(同)은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이니, 강대국의 패권적 질서나 통일대박론이 곧 동(同)의 논리라는 것이다. 민족의 비원이자 눈물겨운 화해를 '대박'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경제주의적 발상의 천박함을, 온화하면서도 웅숭 깊은 사유로 꾸짖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무관심과 냉담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맹자의 '곡속장'에서 이끌어내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요약되는 이 땅의 사법 현실을 '한비자'와 법가의 사상에 비춰 성찰한다.

저자는 남한산성에서 사형수로 1년을 보낸 뒤 무기로 감형돼 민간교도소로 이송됐다. 사형수로서 혹독한 임사(臨死)체험을 한 데 이어 기약 없는 무기징역을 산다는 게 어떤 경험인지 보통 사람들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그 세월이 무려 20년 20일, 그런데도 자살하지 않은 이유를 그는 햇볕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길어야 두 시간밖에 못 쬐는, 겨울 독방에 스며들던 신문지 크기 만한 햇볕을 무릎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이야말로 살아있음의 절정이자 살아가는 이유였다고 한다.

이 책에는 수감 생활 중 만난 재소자들 이야기가 많다. 동양고전 강의에도 곳곳에 등장해 체온으로 감동을 더하고 있지만, 2부 자전적 이야기에서 만나는 예화는 더욱 절실하다. 푸른 보리밭이 보고 싶어 울음을 터뜨린 사형수,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그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비극의 주인공' 나팔수, 물 섞인 피를 헌혈했다고 내내 양심에 가책을 받던 재소자 등 한 명 한 명의 사연이 이보다 더 곡진할 수 없다.

이 책에 대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한 시대 한 지성의 삶과 철학이 이렇게 정리되는구나!"라고 말했다. 온축된 삶과 지성을, 한 구절 한 구절 아껴 읽으며 다가가는 기쁨은 독자의 몫이자 숙제다. 대학 강의는 더 이상 하지 않지만, 저자는 기회 닿는 대로 대중을 만날 예정이다. 5월에만도 두 차례 강연이 예정돼 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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