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9명 파도에 실려 돌아올까.. 오늘도 섬을 돕니다"

입력 2015. 4. 16. 03:07 수정 2015. 4. 1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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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세월호 1주년/그때 그사람들]
"살려달라는 절규 잊을 수 없어.. 실종자 수색 끝낼 수가 없네요"
'어선 몰고 구조' 진도 대마도 주민 김대열씨

[동아일보]

그는 오늘도 백사장 위를 걸었다. 밀물에 떠밀려 와 해변 곳곳에 쌓인 쓰레기를 발끝으로 들췄다. 바위틈과 절벽 밑도 꼼꼼히 살폈다. 그날 이후 하루에 한 번씩 섬 주위를 거닌 지 벌써 1년째다.

지난해 11월 11일 정부는 세월호 실종자 수색 작업 종료를 선언했다. 하지만 전남 진도군 대마도 주민 김대열 씨(46·사진)는 수색을 끝내지 않았다. 끝낼 수 없었다. 미안함 때문이다. 김 씨는 사고 당일 대마도 주민과 함께 1t 어선을 몰고 바다로 나가 학생 20여 명을 구했다. 처절했던 구조 활동이 끝나고 남은 것은 죄책감뿐이었다. "여학생 하나가 엉엉 울면서 '삼촌. 친구들이 객실 안에 있어요. 저 유리창 좀 깨 주세요'라고 하는데 급하게 나오느라 배에 두꺼운 유리를 깰 만한 도구가 없었거든…"

유리창 너머로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학생들을 꺼내 주지 못한 것이 마음속 짐이 됐다. 사고 발생 보름쯤 지나 해경이 사고 해역에서 흘려보낸 부표가 대마도 해변으로 들어왔다. 파도에 실종자가 밀려온다면 대마도로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 씨는 부표를 발견한 날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섬 주위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구조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건네는 간절한 사죄였다.

실종자는 찾지 못했다. 유류품만 건졌다. 수학여행 가는 딸에게 부모가 선물했을 흰색 운동화 한 켤레, 아이들이 애타게 찾았을 '세월호' 세 글자가 선명한 구명조끼 4벌을 찾았다. 김 씨는 '할머니 할아버지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적힌 생존 학생의 편지를 1년이 지나도록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있다. 편지를 보며 "애들 신발이라도 하나 더 건지면 죄스러운 마음이 좀 풀리려나…"라고 중얼거렸다.

이웃들에게도 그날의 기억은 선명하다. 마을 청년회장 김문욱 씨(49)는 "아직도 배 안에 갇혀 있던 얼굴이 선명한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나"라고 말했다. 정면용 씨(49·여)도 "4월 16일이라는 날짜와 그날 아침 미역을 말리던 평상만 보면 불쌍한 학생들 생각이 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사고해역에서 돌아온 구조선… 세번째 배가 마지막일 줄이야" ▼'응급진료 파견' 김재혁 목포한국병원 과장

앳된 소녀가 임시 진료소 안으로 들어왔다. "밖이 너무 추워서 그러는데 잠시 여기 앉아 있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환자를 위해 마련해 둔 매트리스를 내줬다. 소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냈다. 소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어느 공원에서 활짝 웃고 있는 자매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동생을 찾지 못한 언니의 슬픔은 아무 말이 없어도 금세 그리고 분명하게 전해졌다. 정신없이 환자를 돌보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던 감정이 순간 심장을 찔렀다.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김재혁 목포한국병원 응급의학과 과장(40·사진)은 세월호 참사 당일 오전 9시경 응급실 당직을 서고 퇴근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동료 의사가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TV를 켰다. 커다란 배 한 척이 기울어진 채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재난에 대비하라는 보건복지부의 전화도 왔다. 현실이 아니길 바랐지만 그는 동료 의사 4명, 간호사 4명과 함께 팽목항으로 떠났다.

다행히 구조선이 들어오기 전 현장에 도착했다.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팽목항 대합실에 임시 진료소를 차렸다. 오전 11시 5분경 첫 번째 구조선이 도착했다. 중증 환자 10여 명과 경증 환자 37명이 있었다. 중증 환자는 대부분 심한 화상을 입었다. 오전 11시 25분경 2차 구조선이, 오후 1시 50분경 3차 구조선이 도착했다. 부상 정도가 심하지 않아 동거차도에 모여 있던 경증 환자 100여 명을 태운 배들이었다. 이 배가 마지막이었다. 부상을 입었을지언정 살아서 구조선을 타고 아이들이 돌아오면 빨리 치료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김 과장은 정부가 세월호 수색 종료를 선언한 지난해 11월까지 매주 하루씩 팽목항 의료지원시설에 파견돼 울다 지쳐 쓰러진 유족과 부상한 수색대원, 잠도 못 잔 봉사자를 돌봤다.

"세월호는 그 시간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에게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이죠. 다만 이 악몽이 우리 사회를 좀 더 안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큰 교훈이 됐으면 해요."  

▼ "분노 털고 끌어안아준 그분들… 마음은 지금도 팽목항 그곳에" ▼'217일간 가족지원 활동' 주영로 경위

※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는 주 경위는 얼굴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날 이후 죄인이 된 듯했다. 감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못했다. 쏟아지는 질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세월호 참사 당일 전남 진도체육관에서 그는 갈 곳 잃은 가족들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 냈다.

팽목항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뚫고 조명탄은 쉴 새 없이 터졌다. 조명탄이 밝힌 어둠의 민낯은 공포 그 자체였다. 울부짖는 가족들의 얼굴이 사진처럼 뇌리에 박혔다. 처음으로 사람이 두려웠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군산해양경비안전서 변산해양경비안전센터 주영로 경위(45·사진)는 지난해 4월 16일 팽목항에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일은 가족들의 불편을 해결하는 것. 전국 각지에서 진도로 파견된 해경 11명으로 이뤄진 '가족지원반'이 구성됐다. 그러나 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가족들은 곁을 내주지 않았다. 그저 닿을 수 없는 그림자처럼 가족들 곁을 지켰다. 쉴 수 있는 공간도 없었다. 가족지원반을 위한 이동식 가옥이 세워지기 전까지 93일 동안 차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도 단원고 학생들 또래의 아들과 딸을 둔 아버지였지만 가족들의 분노와 아픔 모두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두려웠지만 먼저 가족들에게 다가갔다. 가만히 넋두리를 들어 주고 사고 해역을 향해 108배 하는 가족들 옆에서 조용히 절했다.

사고 발생 100일이 지날 무렵 가족들은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지친 가족들은 그를 "형님" 또는 "동생"이라고 불렀다. 까맣게 타 쩍쩍 갈라진 얼굴로 세월호 수습을 담당해왔던 범정부사고대책본부가 해체한 지난해 11월 18일까지 217일 동안 가족들의 곁을 지켰다. 그가 떠나던 날 가족들은 "그동안 너무 고생했고 감사하다"며 그를 꼭 끌어안아 줬다.

일상으로 돌아왔다지만 마음속 그의 시계는 여전히 1년 전에 머물러 있다.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한 가족들이 있다는 현실에 마음이 무겁기만 해요. 몸은 이곳 격포 바다 앞에 있지만 마음은 아직도 팽목항에 있습니다."  

▼ "숨어 울던 아버지-빈소의 교복… 너무나 생생해 가슴 아려와" ▼'50명 장례' 안산제일장례식장 박일도 대표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수습된 단원고 희생자 시신이 목포로 옮겨져 신원 확인을 마치면 경기 안산의 장례식장에 안치됐다. 인근 시흥, 수원까지 희생자가 옮겨졌던 그때 안산제일장례식장 박일도 대표(60·사진)는 단원고 교사와 학생 50명의 장례를 치렀다. 참사 1주년을 이틀 앞둔 14일 그는 "배가 기울어진 TV 화면을 볼 때만 해도 당연히 모두 구조했을 거라고 생각했다"며 "최혜정 선생님을 시작으로 장례식장에 밀려드는 시신에 참담했다"고 회상했다.

박 대표는 가족을 달래느라 빈소에서는 울지 못하고 건물 밖 어두운 곳에 숨어 몰래 흐느끼던 여러 아버지의 뒷모습이나 형제자매를 찾던 어린아이를 봤을 때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그는 "영정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하루 종일 오빠를 부르며 울던 초등학생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참사 후 1년이 지났지만 안전 의식이 아직도 제자리라고 지적했다. 그는 "변한 것은 거리를 가득 메웠던 노란 현수막이 줄어들었다는 점뿐이다"라며 "사고 직후에는 어른들이 '미안하다,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달라진 게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세월호 참사는 그의 인생관을 바꿔 놓았다. 지난해 5월에는 학생들의 장례 수익금 중 5000만 원을 단원고에 기부했다. 빈소에 놓였던 단원고 교복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그는 지난해 12월에는 중학교에 진학하는 초등학생 50명을 위해 교복 값으로 1000만 원을 기부했다. 올해는 수혜자를 늘려 100명에게 기부할 예정이다. 장례 절차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 대표는 불면증에 시달리다 얼마 전부터 약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가족들 얼굴이 떠올라 견디기 힘들었다"는 박 대표는 "참사로 떠난 학생들을 안타까워하다 아예 일을 그만 둔 직원도 많다"고 전했다. 그는 "옆에서 지켜보기만 한 우리도 힘들 정도인데,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세월호 참사를 겪은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추모 가사를 썼다. '오! 필승 코리아', '서시', '말리꽃' 등의 노래를 만든 작곡가 이근상 씨가 곡을 붙인 이 추모곡은 음원으로 발매될 예정이다.

천호성 thousand@donga.com·박성진·최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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