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자 다 나오고 250명 생일 끝까지 챙길겁니다"

입력 2015. 4. 12. 09:22 수정 2015. 4. 12.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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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16명째 단원고 희생자 생일 챙겨 오는 택시운전사 임영호씨

[미디어오늘 이하늬 기자]

10일 오전 9시 반, 안산시 단원구 단원고등학교 앞에 주황색 택시가 한 대 섰다. 택시운전사 임영호(47)씨가 택시에서 내렸다. 임씨는 익숙한 듯 단원고 경비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오늘은 누구 생일이야?" "오늘은 2학년 1반 주아 생일이에요. 김주아." 양손에 케이크와 꽃다발을 든 임씨가 단원고 정문을 지나 2학년 교실로 향했다.

임씨는 지난 해 11월부터 세월호 희생자들의 생일을 챙기고 있다. 이날로 116명 째다. 어디 소속된 것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다. 참사 직후에는 택시로 추모객들을 분향소로 안내하는 봉사활동을 했다. 이제는 찾는 추모객이 많이 없어 요청이 올 때만 한다.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다 생일이 떠올랐다고 했다.

2학년 1반 교실에 도착하자 임씨가 부지런히 설명을 한다. 그는 생일을 맞은 아이들에 대해 사전 조사를 한다. "주아가 어떤 애인지 알아요? 주아는 갑판까지 나왔다가 캐비닛에 깔린 친구가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다시 배 안으로 돌아간 애에요. 다른 친구들이 가지 말라고 말렸다는데." 실제 2학년 1반 학생들은 갑판과 가까운 객실이어서 다른 반에 비해 생존자가 많다. 37명 중 19명이 생존했다.

10시가 되자 쉬는 시간 벨이 울렸다. 교복을 입은 긴 머리의 여학생이 2학년 1반 교실을 찾았다. "안녕? 주아한테 편지쓰러 왔어?" 임씨가 묻자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삼촌 자리 비켜줄게. 편지 써." 친구가 다녀간 주아 책상에는 편지와 포스트잇과 볼펜이 더해져 있었다. "이걸로 주아 생일 쪽지 써주세요~♡." 주아와 가장 친한 친구라고 했다. 임씨도 책상에 케이크를 올리고 편지를 남겼다.

▲ 지난 10일, 고 김주아 학생의 친구가 텅빈 교실에서 생일을 맞은 주아 학생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사진=이하늬 기자
▲ 임영호씨가 10일 오전 안산시 단원고에서 2학년 1반 고 김주아 학생의 책상에 케이크를 놓고 있다. 사진=이하늬 기자

이어 그는 주아에 대한 것들을 세심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사물함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고 친구들이 주아에게 쓴 편지도 하나하나 읽었다. "사람들이 이름 있는 애들이나 기억하지. 그렇지 않은 애들은 쉽게 잊거든요. 그래서 소개 해주는 거에요. 잊히지 말라고." 임씨는 이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소개한다. 이후 임씨는 케이크와 꽃을 가지고 안산합동분향소로 향했다.

어느새 2시간이 훌쩍 넘었다. 생일을 챙기는 날에는 오전 운전은 거의 못하고 오후부터 새벽까지 일한다. 잠은 하루에 3시간 정도 자는 게 전부다. 그가 운전하는 택시는 개인택시가 아닌 회사택시다. "회사에서도 알고 있어요. 사납금만 채우면 별 말 안 하니까 그냥 하죠. 잠을 못 자는 건 문제가 아닌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니까…" 임씨가 말끝을 흐렸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택시에 탄 손님이 다짜고짜 욕을 퍼부었다. "야이 개XX야 아직도 세월호야?" 택시 곳곳에 붙여진 세월호 스티커와 노란 추모 리본 때문이다. 임씨는 "네 어르신, 저 개새끼 맞습니다. 그래서 개처럼 끝까지 물고 늘어지려고요"라고 답했다고 했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벌써 1년이 됐다. 임씨는 이제 손님들에게 욕먹는 일이 익숙하다.

그러면서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임씨 가족이 사는 곳은 안산시 상록구 끝머리로 길만 건너면 단원구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과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올해 고3인 아들은 단원고 희생 학생들과 같은 중학교에 다녔다. 중학교 동창들은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자주 어울렸다. 그런데 그 친구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 임영호씨가 케이크와 꽃다발을 들고 안산합동분향소를 찾았다. 사진=이하늬 기자
▲ 세월호 추모 스티커가 붙여진 임영호씨의 택시. 사진=이하늬 기자

"주말이면 다 같이 공차고 우리집에서 밥도 먹고 사고도 치고 하던 녀석들이 다 없어진거죠. 그때 충격으로 우리 아들이 말문을 닫았어요." 임씨가 말했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임씨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니 친구들 다 나올 때까지 아빠가 생일도 챙기고 그렇게 할게." 다만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곧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직도 네 녀석(실종자 중 단원고 학생은 네 명이다)이 못 나왔잖아요. 다 꺼내준다던 정부는 정치적으로 가르려고 하고 돈만 이야기 하고 있죠. 그러니까 이제는 사람들이 봉사활동까지 이상하게 봐요. 정부가 그렇게 만든거죠. 이거는 사람의 정부가 아니에요." 담담하게 말하던 그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에게 밟히는 건 학부모 보다 남은 아이들이다. 그는 "생존자들에 대한 지원이 지난해로 끊겼는데 생존학생들이 아직까지 많이 아프거든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애들이 자다가도 벌떡 벌떡 깬대요. 친구 곁으로 가고 싶다는 애들도 있고. 걱정이 돼요"라고 말했다. 그는 생존학생들 사이에서 '울보 삼촌'으로 통할만큼 아이들과도 친하다.

"남들은 미쳤다고 해요. 내 자식도 아니고 얼굴도 못 본 남의 자식들한테 왜 그러냐고. 그런데 저는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절대로 남은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 그만두면 애들 생일은 누가 챙겨주나요? 실종자들 다 나오고 250명 생일 끝까지 챙겨줄겁니다." 임씨가 아이들의 생일이 적힌 수첩을 매만지며 말했다. 세월호 1년, 그에게 아직 세월호는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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