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꾸지람 십년에 아교 서른말 먹으니 비로소 자개쟁이"

입력 2015. 4. 8. 11:00 수정 2015. 4. 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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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장인을 찾아서]중요무형문화재 나전장 송방웅씨

순식간이었다. 그의 혀가 목재의 표면을 핥아 낸 것은. 마치 날아다니는 곤충을 잡아채는 동물의 그것처럼, 그의 혀는 날렵하고도 정확했다. 혀에 묻은 침은 목재의 표면에 바른 아교에 따뜻함을 준다. 인체의 온기를 품어 전달하는 침은 아교의 풀기를 살아나게 한다. 잠자고 있다가 침의 온기에 살아난 아교의 끈적함은 남해 깊은 바다의 영롱한 빛깔을 머금은 전복 껍데기의 화려함을 가구에 고정시킨다. 남들은 붓으로 따뜻한 물을 찍어 바르지만 그는 아직도 자신의 혀를 쓴다. 고집일까?

"붓을 쓰면 온기가 오래가지 못하고, 수분의 양도 일정하지 않아요. 전통의 방식대로 침을 사용하는 것이 제일 좋아요. 인체의 열이 아교가 잘 붙게 만들거든요."

통영고 졸업뒤 뒤늦게 대물림 입문나어린 기술 선배들 밑에서 묵묵히85년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인정'체온 담은 혀와 침으로 아교녹여전통방식 고집하는 끊음질 대가"보석보다 아름다운 빛 담아 세계로"

'아교를 서른 말은 먹어야 진정한 나전장이 된다'는 말처럼 송방웅(75) 나전장은 평생 아교를 혀에 묻히고 살았다. 그는 '끊음질'의 대가다. 끊음질은 가늘게 자른 자개(전복 껍데기)를 칼로 끊어 아교를 바른 목재 가구에 무늬를 내는 기술이다. 마치 정교한 컴퓨터가 설계한 것처럼, 그가 만들어내는 자개 문양은 한 치의 오차가 없다.

그의 스승은 아버지였다. 나전장 1대 중요무형문화재였던 송주안(1901~1981)으로부터 19살부터 끊음질 기법을 유일하게 전수받았다. 자개를 실처럼 길게 자른 '상사'를 붙이다가 선이 0.1㎜라도 비뚤어지면 아버지는 가차없이 뜯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하게 시켰다. "글과 기술은 원수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어찌나 꾸지람을 주시던지."

그의 아버지는 나이 마흔에 얻은 귀한 아들을 손자처럼 귀여워했다. 통영고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더 이상 공부를 시킬 수 없으니, 나의 기술을 전수받아 가업을 이어가라"고 부탁했다. 당시는 대부분의 나전 기술자들이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거나, 졸업하지 못한 이들이 공장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는 때였다. 19살의 비교적 늦은 나이로 기술을 배우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유독 가혹하게 대했다.

나이 어린 기술 선배들에게도 자존심을 짓밟혔지만 그는 참고 견뎠다. 아버지의 후광 덕을 본다는 소문을 실력으로 극복하고 싶었다. 입문한 지 10년이 되던 29살에 아버지는 "이제 나전 기술을 다 배운 것 같으니 스스로 창작활동을 해도 좋다"고 허락을 했다.

송방웅은 그 뒤 10년간 전국의 박물관과 미술관에 보관돼 있는 옛 나전 작품을 자세히 살피며 나름대로 연구를 했다. 1977년 제2회 인간문화재공예전에서 장려상을, 85년 제10회 전승공예대전에서 마침내 대통령상을 받았다.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난 셈이다. 공예가로는 드물게 그는 시의원으로 당선돼 잠깐 '정치 외도'를 하기도 했다. 90년 쉰살에 아버지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제54호 끊음장으로 인정받은 그는 95년 제10호 나전칠기장과 종목이 통합되면서 나전장으로 인정받았다.

"먼저 좋은 자개를 구해야 해요. 수컷보다는 암컷 전복이 색이 고와요. 특히 통영의 푸른 바다에서 나는 전복은 최고급 자개를 공급합니다."

그는 "나전칠기는 소목, 옻칠, 나전, 장석 4가지 종목으로 이루어진 종합예술품이며 45가지의 기술 공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민족공예"라며 "한때는 통영에 나전칠기 기능공만 1500명까지 있었지만, 이제는 몇 명 남지 않았어요" 하며 안타까워했다.

생활가구인 나전칠기에 그려지는 것은 대부분 자연이다. 삶 가까이 자연을 두고자 했던 조상들은 가구에도 영원히 빛이 변하지 않는 자개로 계곡과 폭포, 정자와 연못을 만들어 넣었다. 장수를 바라는 마음에서 십장생을, 선비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서 사군자의 모습을 그렸다.

송 장인은 "일본은 옻칠 공예를 최고의 공예로 귀하게 여겨요. 일본의 영문인 'japan'은 '옻칠을 하다'라는 뜻이죠. 그만큼 가구에 옻칠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자신들에겐 없는 나전칠기를 보고 반해서 일제 강점 시기에 마구 수탈해 갔어요."

그가 만드는 나전칠기 가구는 보통 6개월이 걸리고, 장롱 같은 큰 가구는 3년 이상 걸린다. "나전칠기는 보면 볼수록 은은함을 느낄 수 있어요. 선조의 혼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죠."

스스로를 '자개쟁이'로 부르는 그는 "그 어느 보석보다 아름다운 빛을 내뿜는 자개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다"며 돋보기안경을 낀다.

통영/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나전장이란

당나라 기술 들여와 고려때 '개화'이젠 전복 대신 수입 조개껍데기로

'나전'은 조개껍질을 가공하여 자개를 만들고, 자개로 문양을 만들어 생활가구를 장식하는 것이다. 나(螺)는 나선형의 껍데기를 지닌 조개를 뜻하며, 전(鈿)은 조개껍질을 박아 장식한다는 뜻이다.

한민족은 예로부터 나전을 '자개'라는 고유어로 불러왔다. 옻칠을 한 가구의 표면에 자개를 붙이고, 다시 칠을 한 뒤 표면을 갈아 자개가 드러나게 한다. 중국의 당나라에서 성행했던 나전칠기 제작 기술이 통일신라에 전해졌고, 고려에 와서 꽃을 피운 것이다.

나전장(螺鈿匠)은 나무로 짠 가구나 기물 위에 아름다운 전복이나 조개껍질을 갈아 문양을 오려 붙이고 옻칠해서 완성하는 장인이다. 그 제작 과정을 보면, 나무로 기본 틀인 백골을 짜고, 그 표면을 사포로 문지르거나 틈새를 메워 고른 뒤 자개를 올린다. 자개 작업에는 자개를 실처럼 잘게 자른 '상사'를 백골에 붙여 직선 또는 대각선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만들어내는 '끊음질'과, 자개를 실톱이나 줄로 문질러서 국화·대나무·거북이 등의 각종 도안 문양을 만들어 백골에 붙이는 '줄음질'이 있다.

본래 자개를 박는 나전장과 옻칠을 맡은 칠장은 나뉘어 있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칠장은 많았으나 나전장은 드물었다. 옻칠이 목제품의 도장용으로 널리 사용된 데 비해, 자개는 특별한 계층의 사치품을 만드는 데만 소용되었기 때문이다. 재래 나전은 빛깔이 영롱한 전복의 내피를 얇게 갈아서 쓰다가 최근엔 각종 조개껍데기를 수입해 쓰고 있다.

이길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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