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나요? 이제야 1만원 이야기꽃이 피는데

입력 2015. 4. 1. 11:20 수정 2015. 4. 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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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최저임금 현실화 외치다 2년 전 갑작스레 숨을 거둔 고 권문석 알바연대 대변인의 삶

맥도날드 빅맥세트(6100원)는 먹을 수 없다. 스타벅스 아메리카노(4100원) 한 잔은 마실 수 있어도, 아이스캐러멜마키아토(5600원)는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한다. 분식점에서 찌개 한 그릇 먹기에도 빠듯하다. 극장에서 영화 조조 관람(6천원) 표 한 장 살 수가 없다.

1시간 일해서 번 돈, 최저시급 5580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런데 이런 최저임금마저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227만 명(2014년 통계청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에 이른다. 전체 노동자의 12.1%다. 임금은 노동자에겐 생명줄이다. 겨우 최저임금만 받는 노동자에겐 더더욱 그러하다.

올해 민주노총은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인상하라고 요구한다. 곧 내년도 최저임금을 심의·의결하는 최저임금위원회가 열린다. '최저임금 1만원'. 민주노총보다 앞서 그 깃발을 든 이들이 있었다. 2013년 '최저임금 1만원' 인상 운동에 열정을 쏟다가 세상을 떠난 권문석 알바연대 대변인. 그의 이름으로 최저임금 1만원을 다시 더듬어봤다.

임금은 결국 정치다. 버터처럼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 결정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3월2일 폴 크루그먼 <뉴욕타임스> 기고문). 낮은 임금은 정치적 선택이다. 그렇기에 그걸 바꿀 수 있고, 바꿔야만 하는 것도 결국 우리다. 그 우리들의 이야기도 들어봤다.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진짜 영세자영업자나 중소기업이 망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현장에서 찾아보았다.

한국 정부가 노동시장 개혁의 모범답안으로 꼽는 독일에서는 올해 처음 최저임금제도가 시행됐다. 독일 현지의 목소리를 강수돌 고려대 교수가 보내왔다. 국회에서 논의 중인 최저임금법 개정 움직임도 함께 전한다.

취재 황예랑·전진식·이완·송채경화 기자, 편집 이정연 기자, 디자인 장광석

그날, 아이가 울었다.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새벽 텔레비전 소리. 아이가 칭얼댔다. 거실의 남편이 모로 누워 있었다. 웃통을 벗은 채. 식은 몸. 다리도 푸르스름했다. 119. 다리가 떨렸다. "심폐소생술 할 줄 아세요?" 수화기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아득했다. 소방대원이 똑바로 눕히라고 말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했다. 소파에서 바닥으로 남편을 뉘었다. 몸이 천근만근 돌덩이였다. 첫돌을 두 달 앞둔 딸아이가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아빠"라고 불렀다. 숨졌구나, 생각이 들었다. 2013년 6월2일 일요일 새벽 3시, 병원에 실려온 남편은 소생이 어려웠다. 권문석(당시 35살)의 심장은 다시 뜨거워지지 못했다.

그가 그렇게 떠나버렸다

전날, 권문석은 서둘렀다. 집을 나서는 그에게 부인 강서희씨가 물었다. "토요일인데도 일하러 가?" "강의가 있어서 일찍 나가봐야 돼." 그의 가방에는 한가득 자료가 담겨 있었다. '최저임금 1만원 종일 아카데미'. 가톨릭청년회관(서울 마포구)에서 권문석은 젊은 활동가들을 모아놓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교육을 했다. '이건 좋다, 이건 나는 싫다'며 개인적인 말이 많았다. 평소와 달랐다. "그는 150장에 달하는 자료를 가져왔고, 자료가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의 자료들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생애 마지막 행사는 확실하게 망했다."(구교현 알바노조 위원장)

강의 뒤 그는 뒤풀이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평소와 달리 서둘렀다. 부인에게 목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딸아이 목욕을 시키고 나서는 땀을 많이 흘렸다. 6월 초하루, 아직 여름은 아니었다. 냉장고에서 꺼내 먹은 토마토가 유난히 시원해서 맛있다고 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그의 심장은 서서히 식었다.

그해, 권문석의 직함은 알바연대 대변인. 그에게 대변인은 이상한 자리였다. 주목받는 걸 싫어했고 나서는 걸 꺼리는 성격이었다. 누나 둘에 막내아들인 그는 말수 적고 말썽 적은 착한 동생이었다. 그리고 혀가 짧았다. "구조적으로 혀가 짧았어요. 어려서 혀를 늘리는 수술도 받았는데 나아지지 않더라고요. 발음을 교정하려고 웅변학원도 다녔는데 중간에 포기하기도 했어요."(큰누나 권은혜)

본인이 '문석'으로 소개해도 상대한테는 '문덕'으로 들렸다. 눌변인데 대변인을 맡았다. '투명인간'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참 많은 일을 벌이고 챙기고 알리면서도 그는 늘 보이지 않는 자리에 있었다. 중키에 퉁퉁한 몸집, 사람 좋아 보이는 목소리의 그는 언제나 사진 속 구석 자리에 머물렀다. 영결식 때 가족과 지인들은 혼쭐이 났다. 그가 주인공인 사진은 참 드물었다.

"최저임금은 생활임금이어야 한다"던 권문석에게 최저임금 1만원은 지폐가 아니었다. 저임금 불안정 비정규 슬픈 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 그들의 고통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격문의 깃발. 손수건 흔들고 깃발을 펄럭인 권문석에게 고통은 생래적으로 민감한 문제였다.

그는 꼬마 때부터 내내 아토피 질환을 앓았다. 고등학생 때 누나를 따라 처음 간 눈썰매장에서 한쪽 얼굴 광대뼈가 으스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런데 놀라는 기색이 없어 더 놀라웠다.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스스로 둔해지려는 것 같았어요. 의도적으로 몸에 대해 잊어버리려고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큰누나 권은혜) "그렇게 성실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성실했다. 지나치게 잠을 적게 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항상 사무실에서 밤늦게까지 있었는데, 잠을 충분히 잔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양의 일을 했다."(금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

신문사에서 기사 원고대로 활자를 뽑는 문선공이었던 아버지는 그가 하는 일을 짐작했다. 생활비를 보태려고 맛난 음식 솜씨를 살려 하숙을 쳤던 어머니는 짐작하기 어려워서 울었다.

최저임금 현실화에 꽂히다

병영에서 총을 들지 않겠다는 신념을 지키고자 그는 1년간 울산에서 용접일을 배워 자격증을 땄다. 그 자격증이 양심적 병역거부의 대가인 교도소 수감을 피하고 병역특례 업체로 우회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2007년 권문석은 군 복무를 마친 뒤 금민씨의 선거사무실을 찾았다. 당시 한국사회당 대표로 대통령 선거에 나선 금민씨의 제1공약이 기본소득제 도입이었다.

소득이 있든 없든, 재산이 많든 적든, 노동을 하든 안 하든 모든 이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자는 게 기본소득제의 뼈대다. "그전에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죠. 선거를 돕겠다고 찾아왔어요. 이후에 같이 기본소득 운동을 했어요."(금민) 선거 뒤 권문석은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간사를 맡아 각종 행사·캠페인, 책자 발간 등 실무를 모조리 챙겼다. 대학 시절 학생회 일을 보면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름도 없이 묵묵히 맡겨진 실무를 했던 형이었습니다. 일상에서 형은 언제나 묵묵히 대자보를 쓰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조직화하는 전형적인 학생운동가였습니다."(대학 후배)

2010년 무렵부터 그는 비현실적인 최저임금의 현실을 깨뜨리고 싶었다. 노동소득분배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치보다 10%가량 떨어지는데도 해마다 최저임금은 한 자릿수 인상에 그치고 있었다. 노동소득분배율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자본의 몫이 크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최저임금을 크게 올려야 노동소득분배율이 상승하고, 그래야만 '둥둥 떠다니는 섬' 같은 저임금 노동자들이 땅에 뿌리박을 수 있다는 논리가 익어갔다.

"2012년 초부터 기본소득 도입, 최저임금 1만원, 노동시간 단축, 이렇게 셋이 연동된 프로젝트를 권문석과 함께 추진했어요."(금민) 뒤이어 그해 대선에 출마한 청소노동자 김순자 후보가 최저임금 1만원을 선거공약으로 채택했지만, 메아리는 울리지 않았다.

어… 어… 있잖아… 뭐냐면…, 더듬는 그의 말투처럼 그의 정책 캠페인은 좀처럼 되울림을 만나지 못했다. 최저임금 1만원 인상론은 이상론으로 외면받았고, 기본소득 도입도 마찬가지였다. '헛발질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담배 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났다. 한 손으로 손뼉을 치려는 사람처럼 지쳐갔다.

그런 그에게 2013년은 생애 마지막 해이면서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다. 그해 1월2일 알바연대 창립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는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알바연대의 운동 방식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최저임금으로 의제를 단일화했고 운동 방식도 유쾌하고 발랄하게 꾸몄다. '시일야방성대곡'(장지연, 1905)을 비튼 '시일야알바대곡'에는 권문석과 그의 알바연대 동료들이 풍자로 콕 짚은 한국 사회의 현실이 담겼다.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00만 알바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쉬지 않고 참고 또 참았는데 최저임금이 쥐꼬리만큼 오르는 걸 보고 있을 텐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알바여! 알바여! 동포여! 동포여!"

알바생 아니라 '알바노동자'입니다

알바생이 아닌 알바노동자라는 개념도 강조했다. 보도자료에 알바노동자라고 적어도 기자들은 알바생이라고 바꿔 썼다. 그때마다 기자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내 알바노동자 개념을 설득시켰다. 알바생은 알바하는 대학생을 연상시켜 노동자가 아니라 부차적이고 임시적이라는 편견을 주기 때문이다. 알바연대의 정식 이름인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와 함께하는 알바연대' 또한 알바노동자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정규직 자체가 차라리 예외적인 고용 형태이고, 다수가 불안을 품은 채 노동하는 시대 아닌가.

"이제는 단지 학생들만이 알바 노동을 하지 않습니다. 알바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설사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 해도, 임금노동자인 한 여지없이 최저임금법의 적용을 받습니다. 그런 점에서 최저임금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주목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인터넷 언론 <고함20> 인터뷰) 그 자신이 알바를 거의 해본 적 없었지만, '알바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의 기괴한 현실을 날카롭게 상징하는 표지가 됐다.

이 시절 권문석의 문방사우. 경제학 책, 정책 자료, 담배, 그리고 도끼빗. 그는 청소년용으로 쓰인 얇은 경제학 책을 늘 가방에 넣고 다녔다. "우연히 내가 선물받은 건데 1시간이면 다 볼 수 있는 책이었어요. 이 책처럼 기본소득이나 최저임금을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해야 되지 않겠느냐며 내가 추천했어요."(부인 강서희) '진보정당의 정책 1인자'를 희망한 그에게 정책 자료는 빼놓을 수 없는 생활필수품. 술은 그다지 즐기지 않았지만 담배는 자주 태웠다. 도끼빗으로 머리를 단정히 빗고 그는 기자회견장, 토론회, 거리에 나섰다.

숨지기 한 달 전인 2013년 5월1일 노동절에 맞춰 그는 '알바데이' 행사를 열었다. 집으로 돌아와 부인 앞에 선 그는 막 제대한 군인처럼 기뻐했다. 사회당이나 진보신당 활동가 시절에 받지 못했던 관심에 흥분했다. 홍역으로 붉은 열꽃이 핀 어린아이처럼 상기됐다. 될 것 같았다. 이번에는 무언가 잘될 것 같았다. 알바노동자들의 파티 때는 호탕하게 술값 20만원을 냈다.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기자들의 전화도 쏟아졌다.

"그는 문득 '이거 될 거 같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당 운동에 10년을 얽매여 있던 그에게 알바연대는 일종의 탈출구였다."(김성일 청년좌파 대표) 아침저녁으로 인터넷에서 알바연대, 기본소득, 아르바이트를 검색하는 게 일상이 됐다. 우둘투둘 돌길을 비틀대며 걷던 그가 잘 닦인 신작로를 달리게 된 시절이었다. 귀갓길에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가는 일이 잦아졌다.

알바데이, "이거 될 거 같아"

분량이 짧아 책으로 펴내지는 못했지만 당시 그가 쓴 24쪽짜리 소책자(<최저임금은 1만원으로>)에는 최저임금에 대한 그의 생각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마지막 원고.

"경총(한국경영자총협회),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의 사용자 단체들은 데모를 하지 않는다. 노동자는 사용자보다 힘이 약해 데모를 한다."

"알바노동자, 최저임금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최저임금을 실제로 받는 당사자들은 최저임금위원회에 참여하지 못한다. 공익위원들은 대체로 대학교수들이어서 최저임금법에 별 이해관계가 없다."

"노동자가 노동력 상품이 되려면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옷을 입어야 하며, 잠자야 하며, 밥 먹어야 한다. 일정한 교육을 받아 의사소통이 가능해야 하며, 쉽게 다치거나 병들어서는 안 된다."

"임금 결정은 많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논증과 실사를 거쳐 이뤄지지 않는다. 임금의 통제가격이며, 가장 낮은 임금의 사회적 기준인 최저임금제는 독특한 지위와 역할을 수행한다. 최저임금제는 특수한 법이지만 보편적 기능을 수행한다."

"최저임금 1만원은 최저임금 노동자와 전체 노동자의 상향 평준화를 위한 기획이다. 생활 수준을 올린다는 말은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최소한의 경제적 조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 시작은 적절한 소득이며, 임금노동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 이 시대에, 최저임금은 그 자체로 생활이 가능한 소득이어야 한다. 최저임금은 생활임금이 되어야 한다."

숨지기 사흘 전 권문석은 방송사 인터뷰를 했다. 부인이 새로 사준 체크무늬 셔츠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었다. 공들여 준비한 '최저임금 1만원 위원회' 발족을 불과 일주일 남겨두고 그는 쓰러졌다. 그가 살았던 마지막 하루 6월1일, 활동가들에게 한 종일 강연에서 낸 숙제가 있다.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경총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리를 만들라.'

지난해 3월 박정훈 알바연대 활동가는 그 숙제를 완성한 책 <알바들의 유쾌한 반란>(박종철출판사)을 펴냈다. 책의 첫머리에 권문석과 박정훈, 알바연대 활동가들, 최저임금 1만원을 외친 이들의 육성이 담겼다. "아르바이트 노동자, 비정규직, 최저임금 노동자, 청년 실업자, 백수라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차별받거나 스스로를 경멸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러분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멸해야 하고 바꿔야 할 상대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부조리한 세상입니다."

"경멸할 것은 부조리한 세상입니다"

그날, 청포를 갓 베어낸 낫처럼 시퍼런 나이 서른다섯에 돌아간 그가 2015년 3월 돌아왔다. 민주노총은 오는 6월 고용노동부 최저임금위원회의 2016년 적용 최저임금 결정을 앞두고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올리자! 최저임금, 시급 1만원 월급 200만원.' "최저임금이 노동자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임금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게 민주노총의 주장이다.

올해 최저임금은 5580원. 박근혜 정부 들어 최저임금은 7% 정도씩 올랐다. 이대로라면 언제 1만원이 되나. 2024년. 더는 안아주지 못할 아빠를 보고 "아빠!" 하고 불렀던 딸 도연이가 12살이 되는 해. 12살,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간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나이, 한국 사회에서 '최저임금 1만원'의 꿈을 외친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나이. 기다림이 너무 길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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