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장일현 기자의 인&아웃] 퇴출 은행원, 서민들의 커피王 되다

장일현 기자 2015. 3. 30.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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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집에 만원밖에 없어."

아내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10년째 잘 다니던 동화은행이 망하고 난 후 그는 실업자가 됐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래도 내 한 몸, 내 가족 먹여 살리는 건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수가 된 지 6개월 만에 아내 입에서 나온 말은 그를 정신 차리게 했다. 당장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로부터 약 20년, 퇴출 은행 출신 실업자는 '커피왕'으로 변신했다. 커피 전문점 프랜차이즈 업체 이디야의 문창기(53) 대표 이야기다. 문 대표는 지난 2004년 이디야를 인수해 매장을 16배로 늘렸다. 인수 당시 매장이 80개였던 이디야는 10여년 만에 국내 최다(最多) 가맹점을 보유한 커피전문점으로 성장했다. 오는 30일 문을 여는 서울 봉천동 서울대중앙점은 이디야의 1500번째 매장이다. 1000호점을 오픈한 지 1년 5개월 만이다. 2위권은 1000호점 언저리에 있다. 업계에서는 전국의 커피전문점이 2만3000개 안팎인 것으로 보고 있다.

소비자들의 평가도 좋았다. 지난달 한국소비자원이 연매출 상위 7개 커피전문점에 대해 소비자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중저가'를 표방하는 이디야커피는 종합 1위를 차지했다. 스타벅스와 커피빈 등 세계적인 브랜드도 이디야 뒤에 줄을 서야 했다.

그는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커피 사업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IMF 외환위기로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됐고, 증권사를 거쳐 작은 투자자문사를 운영하다 우연히 이디야를 만났다.

그해 봄 사무실에 평소 알고 지내던 사업가가 찾아왔다. 3년간 커피전문점 사업을 했는데 이제 한계가 온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인생의 새로운 승부가 막 시작되려 한다는 예감 같은 게 들었다. 그의 눈에 커피는 한참 더 성장할 수 있는 시장이었다. 그는 운명의 주사위를 던지기로 했다. "내가 직접 해보자." 매장에 직접 가보니 커피 맛도 괜찮았고 점주들의 표정도 밝았다. 그는 희망을 봤다.

지난 20일 서울 역삼동 이디야커피 본사에서 문 대표를 만났다. 그는 이 인터뷰를 해야 할지 오랫동안 망설였다고 했다.

커피를 대신할 음료는 지구상에 없다

―소비자 만족도 조사에서 1위를 한 건 큰 성과다. 1500호점 개점도 눈앞에 있다. 인터뷰에 응하는 걸 망설인 이유가 있나.

"요즘 경기가 안 좋다고 난리다. 특히 1~2월은 커피전문점 매상이 안 좋을 때다. 점주들은 힘들어 죽겠다는데 본사 회장이란 사람이 한가하게 언론 인터뷰나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까 걱정이 됐다. 점주들 사이에서 '정신 차려야지, 왜 저래' '매장이나 한 번 더 와보지'라는 얘기가 나올까봐 부담스러웠다. 내겐 점주들이 제일 중요하다."

―소비자 만족도 조사에서 이디야가 종합 1위를 차지한 것은 여러 항목 중 '가격'에서 압도적인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디야의 아메리카노 한 잔 가격은 2800원으로 다른 업체(3800~4500원)에 비해 싸다. 밥값보다 비싼 커피 마시며 불편했던 소비자들의 마음을 읽은 것인가.

"분위기 좋은 데서 친구와 얘기하고 느긋하게 책도 읽으면서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값이 좀 비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말하라면 거품을 뺐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임차료와 인테리어 비용 등을 최소한으로 줄여 커피값을 낮췄다. 커피 시장이 팽창하면서 동시에 '값싸고 맛 좋은' 커피를 원하는 실속형 수요가 더 빠르게 커진 것과 맞아떨어졌다."

그는 요즘 하루에 커피 6잔을 마신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음악을 틀고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빈속에 들어오는 커피의 온기가 온몸에 퍼지면 내가 살아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며 "그래서 더욱 맛있는 커피를 만들어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걸 느낀다"고 말했다.

―싼값만이 경쟁력이라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냥 싸구려라고만 본다면 왜 안 그렇겠나. 하지만 맛에 대해서도 자신있다. 언제든 블라인드 테스트(눈 가리고 맛을 평가하는 것) 할 용의가 있다. 우린 매장도 작고 실내 장식도 화려하지 않다. 그럴수록 원두로 승부를 걸어야 했다. 맛이 없다면 이 세계를 떠나야지. 원두에 대한 투자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 국내 1위 커피 회사 동서식품이 원두를 볶아 우리한테 제공한다. 5년 전 국내 유일 커피연구소도 차렸다. 9개월에 한 번씩 새로운 맛을 내놓고 있다. 새 커피가 나올 때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업계에서 잘나가는데 가격을 경쟁 업체에 맞춰 높일 생각은 없나.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은 우리의 철칙이다. 이건 꼭 지킬 거다.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게 우리의 존재 이유다."

―커피 시장이 포화됐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지난 10여년 동안 가장 많이 들은 얘기다. 1인당 국민소득 세계 1위 룩셈부르크에선 한 사람이 1년에 28.4㎏ 정도 커피를 소비한다고 한다. 하루 아메리카노 10잔이다. 우린 1.8잔이다. 아직 성장 가능성이 크단 뜻이다. 요즘엔 40~50대 남성도 걸으며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학생들은 우리 세대가 빵집 갔듯이 커피전문점을 찾는다. 커피 마시는 사람도 늘고 한 사람이 마시는 양도 늘어난다. 더군다나 전 세계적으로 커피를 대신할 음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새 매장 여는 속도가 대단하다. 도대체 몇 개까지 갈 수 있다고 보나.

"파리바게뜨가 1500개가 됐을 때 '큰일났다, 더 이상 매장 낼 곳이 없다'고 했단다. 그런데 지금 3000개가 넘었다고 한다. 우린 확실한 장점이 있기 때문에 더 잘할 수 있다. 중소도시, 읍·면·동에 갈 곳이 많다. 우린 작고 돈이 많이 들지 않으니까."

그는 대학입시에 떨어지고 재수할 때 대학 친구들과 어울리며 운동권 이념을 접했다. 사회는 모순이 가득해 보였고 '그걸 치료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사회학과에 갔다. 졸업 후엔 잠시 정치권에도 가봤다. 하지만 곧 방향을 바꿔 동화은행에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일 잘한다고 칭찬도 받았다. 그는 신이 났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은행에 갔으면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니다. 죽기 살기로 일했다(그는 이 '죽기 살기'란 말을 20번은 넘게 했다). 은행에 들어갔으면 행장 한번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 맡은 업무에선 최고라는 말을 들으려 했다. 서소문 지점에서 외환 업무를 맡았을 때 이전 직원이 50억원 이익 내던 걸 100억원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월급 받으면 그 돈으로 사람 만나고 밥 먹고 술 마셨다."

―사람 사귀는 일에 정성을 많이 쏟았나보다.

"거래처 직원 상가(喪家)에 가면 꼬박 밤을 새웠다. 여직원 결혼식은 아무리 먼 지방이어도 빠진 적이 없다. 누가 싸우다 경찰서 잡혀갔다는 말 들으면 아는 사람 총동원해 일이 잘 해결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곤 경찰서에 달려가 같이 밤새우고 새벽에 국밥 먹고 헤어졌다. 그렇게 살았더니 동화은행 문모라는 자가 꽤 의리 있는 놈이라는 소문이 나더라. 그런 방식으로 인간적으로 만난 사람들이 나중에 어려울 때 도움을 줬다. 그 사람들에 대한 내용은 잊어버리지 않게 항상 메모를 했다."

―어떤 메모였나.

"술 약속 있는데 한 사람이 아내 생일 때문에 못 왔다고 하면 그 사람 칸에 '부인 생일'이라고 적는 식이다. 빨간 펜으로 표시해서. 다음 해에 부인 생일 축하한다며 카드 한 장 보내주면 깜짝 놀란다. 누군가와 얘기하다 '내 아들 영식이가 말이야'라는 말이 나오면 '아들 이름 영식'이라고 기억했다 노트에 기록해뒀다. 노트 한 권에는 100명 정도가 들어가는데, 그런 노트가 6권 있었다."

―동화은행에서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인수 은행이 왜 안 데려갔나.

"오라고 했지만 안 갔다. 명색이 동화은행 창립 멤버인데, 망한 은행 출신이라 어차피 승진 같은 비전을 바랄 수 없는 곳에 가서 비굴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그 은행으로 간 동료 중 임원 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실업자가 됐을 땐 기분이 어떻던가.

"이게 뭔 소리냐 할지 몰라도 먹고사는 건 자신 있었다. 사람 사귀는 걸 좋아했고,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내가 어렵다고 진심으로 얘기하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도와줄 거란 믿음과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 인맥이 많으면 사회생활도 걱정이 없겠다.

"증권사에 다닐 때 돈 끌어오는 일을 맡았다. 은행 다닐 때 친했던 사람들 찾아다녔다. 예치금 4000억원을 끌어모았더니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인센티브로 한 달에 4000만~5000만원씩 받았다. 하지만 증권사도 계속 있을 곳은 안 됐다. 거기도 공채 출신 아니면 안 되더라. 동화은행과 증권사 출신 몇 명 모아 투자자문 회사를 차렸다. 그 일을 하다 이디야를 만난 것이다."

"책 읽으라 잔소리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그는 특이한 경영자다. 직원들 책 읽히는 데 엄청 신경을 쓴다. 그래서 이디야 직원 230명은 매달 책 한 권을 읽고 쓴 독후감을 문 대표에게 이메일로 보낸다. 책값은 회사가 지원한다. 그는 "직원이 300명이 되든 500명이 되든 이 일만큼은 직접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직원들 책 읽히기에 왜 그렇게 공을 들이나.

"독서가 없었다면 이디야의 오늘은 없었다. 회사 인수하고 5~6년 정말 어려웠다. 신규 가맹점이 1년에 기껏해야 40여개 안팎이었다. 길이 안 보였다. 그때 서점에 가서 책 수십권을 샀다. 철학, 역사, 경영, 과학 등…. 두 달 동안 책만 읽었다. 그리고 어느 날 책을 덮었다."

―그래서 길을 찾았나.

"내부 고객 만족이었다. 우리 직원들을 만족시키지 않고는 사업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장 사무실 가구를 최고급으로 바꿨고, 급여도 업계 최고 수준으로 올렸다. 옷 사 입으라고 분기별로 30만원씩 지원하는 제도도 만들었다. 직원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빨리 회사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직장을 만드는 게 꿈이다."

―전 직원이 함께 해외여행을 간다고 들었다.

"그건 회사 처음 시작할 때 약속했던 거다. 창립 후 5년이 되면 모두 해외여행 가자고 했다. 그 이후 계속하고 있다. 올핸 홍콩에 간다. 내년엔 미국 시애틀에 가자고 했다. 여행 갈 땐 50% 보너스 준다. 부모님 선물 사라고."

―비용이 많이 들겠다.

"보너스 100% 주는 셈치면 된다. 하지만 그 효과란 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책 읽는 걸 젊은 직원들이 모두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다.

"야유회 때 경품이 있다. 독후감 1회 면제권이다. 받으면 되게 좋아하더라(하하하). 영 못 쓰겠으면 목차라도 적어 보내라고 한다. 재밌는 건 직원 부모님들이 더 좋아한다는 거다. 얼마 전 한 여직원이 집에서 물을 마시려는데 냉장고 문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더란다. 어머니가 '너 독후감 썼니'라고 적어놨다는 거다. 그 직원도 '네, 썼어요'라고 적었다더라."

―그런 얘기 들으면 뿌듯하겠다.

"사회를 먼저 산 선배로서 직원들이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회사 대표라고 일 시키고 월급만 주는 게 아니다. 이디야 회장으로 기억되기보다 책 읽으라고 잔소리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착한 기업이라는 건 결국 환상일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오너가 그런 마음 갖고 있다는 정도는 직원들이 알아주지 않을까."

"너라면 그 자리에 매장 하겠어?"

이디야 커피값이 싼 이유는 가게 내고 장사하는 데 돈이 상대적으로 덜 들기 때문이다. 문 대표는 "월세 높은 곳엔 매장을 잘 내주지 않는다. 매장도 작다. 초기엔 30~50㎡ 정도였다. 최근 많이 커졌지만 전국 평균이 72.6㎡(22평) 안팎"이라고 말했다.

―요즘 매장 하나 차리려면 얼마 정도 생각해야 하나.

"보통 1억5000만~2억원 정도다. 가게 보증금, 인테리어 비용, 장비값 다 포함이다."

―그 정도면 자금이 많지 않아도 도전해볼 수 있는 창업 아이템이 될까.

"국내 유명 커피전문점 중엔 차릴 때 10억원 넘게 드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우리 점주들은 다르다. 재산 많은 분들이 아니다. 그리고 그걸 다 투자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가게 잘못되면 큰일 난다. 자녀들 학원에 못 보낸다. 인생이 망한다. 그런 걸 맘속에 담고 있다. 그분들과 함께 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도 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나.

"사업한다니까 어느 날 아버지가 찾아오셨다. 나보고 '사업할 놈이 아닌데, 회사나 다녀야 할 텐데…' 하시더라. 이해가 안 갔다. 한 달 후에 찾아뵙고 여쭤봤다. 무슨 뜻이냐고. 아버지는 '다른 사람 눈에 눈물 나게 하지 마라, 나중에 네 눈에 피눈물 난다는 뜻이다. 그것만 명심하면 사업을 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항상 바위처럼 내 마음을 누르고 있다."

문 대표는 폐점률을 볼 때 "잘못하고 있진 않구나"란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우리 폐점률이 2013년 1%, 작년 0.97%였다. 다른 업체의 절반 또는 3분의 1 이하다. 우리 매장 하시는 분들이 거의 떠나지 않는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매장을 낼 때 뭘 기준으로 하나.

"직원들에게 항상 말하는 게 있다. '너라면 그 자리에 매장 하겠어?'"

"품격을 말할 때가 됐다"

문 대표는 사업 시작 직후 중국 베이징에 진출했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손해만 보고 철수했다. 하지만 해외 진출은 그에겐 운명과 같다.

"국내 매장 3000개, 3500개 만들면 그 이후에는…. 언젠간 한계가 올 거다. 지금 들어온 젊은 직원들에게도 20~30년 후 미래가 있어야 한다. 그 미래는 광활한 세계로 나가는 거다."

―중국에선 왜 실패했나.

"그곳 시장도 문화도 모르면서 준비도 안 했다. 중국 진출한다고 나가는 업체들 중 엉터리 많다. 중국의 커피 시장은 아직 때가 안 됐다. 커피숍은 많아졌는데 커피 문화가 없다."

―해외에서 성공하려면 뭘 준비해야 하나.

"오너도 못 바꾸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고유한 레시피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현지에서 따라온다. 그쪽에서 '너희들이 우릴 알아?' 이런 식으로 나오면 망하는 거다. 전 세계 어딜 가도 성공할 나만의 '신의 한 수'가 있어야 한다."

이디야는 내년 초 2000호점 돌파가 목표다. 신규 매장 오픈은 151개(2011년)→213개(2012년)→251개(2013년)→389개(2014년)로 갈수록 속도를 내고 있다. 문 대표는 "이제 품격을 말할 때가 됐다"고 했다.

―2000호점과 품격은 무슨 관계가 있나.

"그때가 되면 국내 최고 자리에 가까워진다. 지금은 매장 수는 많아도 매출액은 외국계 대형 브랜드에 밀린다. 그걸 몇 년 내 따라잡으려 한다. 그러면 명실상부 대한민국 1위가 될 수 있다. 그때 세계 어디에 내놔도 자부심 느낄 존재가 돼 있고 싶다. 그걸 지금부터 준비하는 거다."

―사회에 대한 봉사나 기여도 필요할 것 같다.

"작년부터 상·하반기 한 차례씩 전국 매장의 아르바이트 직원 200명을 뽑아 50만원씩 장학금 주는 걸 시작했다. 해외여행 한 번도 못 가본 사람들을 유럽에 데려가는 프로젝트도 올해 준비하고 있다.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뮤직 페스티벌을 여는데 작년엔 이틀 동안 2만명이 다녀갔다. 그렇게 하나하나 품격을 만들어가려 한다. 이런 게 없이는 해외도 못 나간다."

―젊었을 땐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는데, 굳이 화제로 삼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모든 삶을 커피에 바치고 있다. 날 믿고 바라보는 직원들, 전국의 천 몇 백명 가맹점주들이 있다. 난 지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고 있고 사업하는 맛이 난다. 내 사업은 이제 시작이다. 이 사업 통해 나뿐만 아니라 직원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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