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대卒 90%가 논다는 '인·구·론' 시대.. 6㎡ 토스트집 차린 인문대 首席졸업생

성유진 기자 2015. 3. 2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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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A대학교 후문 앞 거리에는 6㎡(약 2평) 넓이의 조그만 토스트 가게가 있다.

23일 오후 이 가게를 찾은 손님들은 토스트를 주문하면서 가게 주인에게 "진짜 인문대 수석(首席) 졸업자가 맞아요?" 하고 한마디씩 덧붙였다. 그러자 주인은 "그럼요, 이것 보세요" 하며 '학업 성적이 월등하여 인문대학 수석을 하였으므로 이 상패를 수여함'이란 글씨가 적힌 상패를 보여줬다. 이 가게 주인은 A대 인문대를 수석 졸업한 27세의 이준형씨. 그의 가게 이름도 'A대 인문대 수석 졸업자의 집'이다.

이씨는 A대 국어국문학과에 2007년 입학해 작년 2월 인문대 수석으로 졸업했다. 모교 근처에 토스트 집을 낸 건 지난 2월 중순. 가게를 내기 전까진 한 청소년 진로 컨설팅 회사에 1년 반 정도 다니며 많게는 500여명 앞에서 강의하는 진로상담 컨설턴트로 일했다. 승진을 거듭해 팀장 직함도 달았고 월급도 300만원 정도로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이씨는 작년 말 회사를 관뒀다. 회사에 충성해야만 인정받는 현실이 싫어 사표를 냈다는 그는 '이왕 장사할 거 모교 앞에서 떳떳하게 해보자'는 생각에 이곳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씨는 장사를 결심한 이유에 대해 "인문학이란 게 원래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연구하는 학문 아니냐. 사람을 만나 이해하는 데 장사만 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전 컨설팅 회사에서는 대규모 인원을 대상으로 강의나 상담을 진행하다 보니 진짜 한사람 한사람의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또 인문학을 전공하면 '백수'가 된다거나, 기껏 토스트 장사나 한다는 사회적 편견을 깨고 싶어 상호도 대놓고 '인문대 수석 졸업생의 집'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씨 의도처럼 최근 몇몇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이씨 가게 사진과 함께 '인문대 수석 졸업생의 최후'란 제목의 글이 올라와 논쟁이 벌어졌다. '토스트 가게든 뭐든 자립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반응도 일부 있었지만 "'인구론(인문대 졸업자 90%가 논다)'의 대표적인 예"라는 식의 반응도 적지 않았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서양사학을 전공하는 박모(20)씨는 "인문대생들끼리 '우린 어차피 (취직 못해) 다 치킨집 사장이 될 거니까'라는 농담을 하곤 한다"며 "이씨 가게 간판을 보니 외면하고 싶던 진실을 마주한 거 같아 기분이 나빴다"고 말했다. 한 A대 재학생은 "명색이 수석 졸업자가 자기 전공도 못 살리고 학교 망신만 시키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이씨도 "이런 반응을 이해한다"면서 "가게 이름을 이렇게 지은 건 사람들이 생각해보길 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 좋은 회사에 들어가면 '성공한' 취업자가 되고 이런 가게를 하면 '실패한' 인문대생이 되는거냐"고 반문한 그는 "인문대 수석 졸업자도 이런 가게를 할 수 있고, 이런 삶도 그 나름대로 좋은 삶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씨의 가게를 찾는 손님들은 토스트만 먹고 떠나지 않는다. "공부 잘하는 애들과 경쟁하는게 힘들고 출신학교나 지역이 다른 친구들이 많아 적응하기 어려워요." 한 외국어 고등학교 신입생의 고민상담에 이씨는 "외고 입시라는 꿈을 이뤄본 경험은 앞으로 무엇을 하든 힘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여행가이드가 꿈이라는 대학 후배에겐 수학여행 사업 컨텐츠 개발을 한 경험을 나누기도 했다. 가게 안에 좋아하는 책 10여권을 놔두고 상담 대신 책을 건네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애인과 헤어지고 힘들어하던 후배에게 알랭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란 책을 빌려줬다. 이씨는 "가게를 찾아와 조언을 요청하는 후배들에게 언제든지 말동무가 돼준다"며 "이렇게 사는 것도 충분히 인문학적인 삶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문대 졸업생은 취업할 수 없다거나, 반대로 고상하게 책만 붙잡고 있는 교수가 되거나 대기업에 취직해야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라며 "개업한 지 한 달 됐지만 직장 다닐 때보다 보람도 있고 수입도 더 괜찮은 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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