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상급 주니어들 키워낸 스노보드狂 스님

손장훈 기자 2015. 3. 2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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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던 사찰이 떠들썩했다.

황금빛 사찰 앞마당에선 노란색 점퍼를 입은 꺽다리, 머리끝을 주황색으로 물들인 여고생, 단발머리 소년이 따뜻한 봄볕을 맞으면서 깔깔댔다. 셋은 한국 스노보드 하프파이프의 샛별인 권이준(18·판곡고), 정유림(17·수리고), 이민식(15·단월중). 이들이 19일 북한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수국사에 모인 건 스노보드 애호가로 유명한 호산(50) 주지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묵언(默言)'을 수칙으로 수도 정진하는 게 업인 호산 스님이 스노보드 취미를 갖게 된 건 1997년. 그는 '인명 사고가 잦으니 고사(告祀)를 지내달라'는 요청에 인근 스키장을 찾았다. 그곳에서 답례로 시즌권을 받고 눈 위에 서보았다. 소년 시절 출가해 인생 대부분을 절에서 지낸 터라 속세의 스포츠를 접한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몸을 써본 건 태극권을 배웠을 때가 유일했다. 그런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움직임이 자유로운 스노보드. 호산 스님은 "특히 하프파이프 같은 프리스타일은 구속을 벗어나 창조적인 동작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불교 교리와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스노보드의 매력에 빠진 스님은 열 살 이상 어린 동호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배웠다. 승복 입고 보드를 타는 그에게 경계의 눈빛을 풀지 않던 젊은 친구들에게 자장면을 사줘 가면서 마음을 얻었다. 시간이 허락할 땐 캐나다로 전지훈련도 다녀왔다. 그렇게 기량을 쌓아 국내 대회에서 수차례 입상하면서 아마추어 선수들 사이에선 실력자로 꼽혔다.

2002년엔 국내 스노보더들을 위한 대회도 열었다. 상금으로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 1000만원을 내놨고, 대회명은 '달마배'로 정했다. 달마배는 올해로 13회를 맞았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후엔 미래에 관심을 가졌다. 2010년부터 평창 대회에서 전성기를 맞이할 나이의 선수 중 재능이 남다른 유망주를 뽑아 후원하는 '달마팀' 프로젝트에 나섰다. 1호 선수는 권이준. 초등학교 3학년 때 하프파이프를 배운 그는 신동으로 불렸다. 스님은 해외 훈련 코치비와 항공비를 지원하면서 기량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줬다.

세 번째 달마팀 멤버인 정유림은 아예 식구로 맞았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갈 곳 없던 정유림의 가족을 절에서 지내게 해준 것. 정유림은 2011년부터 어머니, 그리고 알파인 스노보드 선수인 언니 정해림과 스님의 절에서 살고 있다. 현재 달마팀 선수는 막내 이민식을 포함해 5명이다. 호산 스님은 "비인기 종목 선수들을 돕는 분들의 성금을 포함해 한 해 총 3000만~4000만원 지원한다"고 말했다.

호산 스님의 돌봄 아래 꿈을 키운 선수들은 올해 눈부신 성과를 냈다. 권이준과 정유림은 지난 15일 중국 야불리에서 막을 내린 FIS(국제스키연맹)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나란히 금·은메달을 땄다. 한국 선수가 주니어 세계선수권 하프파이프에서 메달을 딴 건 둘이 처음이다.

권이준과 정유림은 올해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 자신만의 기술을 개발해 성인 무대에서도 정상급 선수로 활약하는 것이 목표다. 권이준은 다음 달 대표팀과 함께 미국 오리건주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최근 무릎을 다친 정유림은 재활 훈련부터 할 계획이다. 한 시간 가까이 이들과 보드 이야기를 나누던 호산 스님은 헤어질 때쯤 조언을 보탰다. "얘들아, 경기가 안 풀리고 컨디션이 나쁠 때는 명상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집중해보렴.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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