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세운 산울림 극장, 힘들어도 밀고 나가야죠"

조민서 입력 2015. 3. 13. 11:01 수정 2015. 3. 1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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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30주년 맞은 산울림 소극장의 임수진 극장장 "'고도'는 볼 때마다 새로운 놀라운 작품"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임수진 산울림 극장장(52)을 지난 9일 서울시 신촌의 산울림 소극장 지하 분장실에서 인터뷰했다. 임 극장장은 '나와 산울림'을 주제로 연극과 극장, 그리고 무대에 대해 말했다.(편집자주)

"1969년 '고도를 기다리며'를 초연할 때 저는 여섯 살이었어요. 그 날도 어김없이 한국일보 소극장 공연을 보러 갔죠. 어떤 장면이 재밌어서 막 웃었더니, 옆에 어른들이 '네가 뭘 안다고 웃냐'고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네요. 그 뒤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고, 대학생 때 다시 '고도를 기다리며'를 만났죠. 매번 볼 때마다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놀라운 작품이에요.

1985년 산울림 소극장이 개관했을 때 저는 대학생이었습니다. 아버지(임영웅)와 어머니(오증자ㆍ77)가 극장을 짓는데 어려움이 많으셨는데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응원도 많이 받았고요. 개인이 소극장을 꾸려나간다는 게 비용부터가 만만치 않잖아요. 극장을 가지고 있으면 우선 대관료나 스케줄 걱정이 없으니까 아버지께서 큰 결단을 내리신 거죠. 그렇게 해서 30년을 꽉꽉 채웠습니다. 두 분이 경제적으로 성공을 원하신 것도 아니고, 계속 공연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유지만 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하셨죠.

저는 사실 중간에 자리를 오랫동안 비웠거든요. (임 극장장은 1991년부터 2011년까지 미국에 거주했다. 동생인 임수현(50) 씨는 극장에서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원래 연극을 했던 것도 아니고 미술을 전공했어요. 그런데 2011년에 한국에 돌아와보니까 부모님은 건강이 예전만 못하셨고, 누군가 발로 뛰며 극장을 운영할 사람이 필요했죠. 하지만 외부인을 고용하면 인건비가 나가잖아요. 그래서 가족 내에서 모두 해결한 거죠.(웃음) 하지만 저 역시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서 '산울림이 없어지면 안된다'라는 책임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산울림 극장을 제가 운영하기 시작한 지는 이제 3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연습실 벽을 가리키며) 저기 저 개관 포스터를 보면, 당시에 연극뿐만 아니라 판소리, 현대 무용, 클래식 음악, 사물놀이 등 다양한 공연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죠. 요즘 말로 '복합문화공간'인 셈이죠. 그동안은 산울림에서 정통 고전주의 연극을 주로 했어요. 1980년대에는 '위기의 여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 등 여성주의 연극을 많이 해서 중장년층 주부 관객들의 호응을 받기도 했고요. 앞으로는 다양한 공연을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2년 전 시작한 '산울림 고전극장'과 '편지콘서트'가 대표적인 기획 공연이죠.

산울림 30년을 지켜온 데 대한 부담감도 당연히 있습니다. 함부로 아무 공연을 올릴 수도 없고, 아무 공연에나 대관할 수도 없어요. 부모님께서 극장을 쉬는 한이 있더라도 좋은 무대를 고집하며 지켜오신 원칙입니다. 앞으로도 그래야 할텐데 말이에요. 연극계는 이전에도 힘들었고, 지금도 힘든 상황이지만, 열심히 최선을 다해 무대를 만들고 있으니까 관객들께서 많이 오셔서 힘이 되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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