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 장애인 돕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문현웅 기자 입력 2015. 3. 6. 03:05 수정 2015. 3. 6.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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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오후 4시. 왕태윤(48)씨가 서울 종로구의 한 복지시설을 찾았다. 200만원어치 응급약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기침약·소화제·파스·설사약 등 8가지로, 크지 않은 종이상자 하나와 구급상자 하나에 담았다. 사람이 들기에 부담스러운 크기가 아닌데도, 왕씨는 상자를 손으로 건네지 못했다. 대신 전동휠체어에 달린 선반에 얹어 전달했다. 왕씨 역시 목 아래는 거의 움직일 수 없는, 1급 척수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왕씨는 장애인·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자원봉사단체 '스파인(SPINE)2000' 대표다. '스파인'은 척추라는 뜻이고, 창설자는 왕씨 본인이다. 그는 2001년 단체를 만든 이래, 한 해 빠짐없이 중증장애아가 머무르는 복지시설인 '서울라파엘의 집'을 찾아가 의약품을 전달하고 있다. 올해로 15년째다.

왕씨는 16개 장애인 단체를 지원하고, 탈북 청소년·외국인 이주 노동자·고려인 동포·성폭력 피해 여성 등 사회적 약자도 돕고 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그럼에도 왕씨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서울라파엘의 집에 간다. "제겐 특별한 곳입니다. 저를 사회봉사자로 다시 태어나게 해 준 곳이거든요."

군대까지 다녀온 건강한 청년이던 그는 1992년 교통사고로 척추를 다쳤다. "충격에 빠져 9년이나 집 침대에만 누워 있었어요. 매 순간 죽고 싶었죠."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컴퓨터였다. "웹에서의 제겐 장애가 없어요. 인터넷을 배울수록, 세상과 거침없이 소통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커져갔죠." 그는 그렇게 다시 세상에 나올 용기를 얻었다.

왕씨는 사회활동의 첫걸음으로, 과거의 자신처럼 절망하는 이들을 돕기로 했다. "우선 사지 마비 장애인에게 관심이 가더군요.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할까요." 첫 방문지가 서울라파엘의 집이었다. 사전 연락도 없이 무작정 찾아갔다.

박광원(54)씨는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도울 일 없느냐"고 묻는 왕씨를 보며 솔직히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입소하고 싶다고 오는 장애인은 많아도, 봉사하겠다며 찾아온 장애인은 처음 봤으니까요." 직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박씨는 왕씨에게 기회를 주자고 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돕는 건 당연하게 여기면서, 장애인이 장애인 돕는 것을 이상해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서울라파엘의 집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예방접종이었다. "사지 마비 아이들은 운동이 부족하고, 그래서 면역력이 약해요. 쉽게 병에 걸리고 크게 앓죠." 왕씨에게 부탁하고서도 반신반의했다. "본인 몸도 가누기 힘든 분이 어떻게 해낼까 싶었죠." 왕씨는 인터넷으로 봉사자를 모집했고, 순식간에 의사·간호사를 비롯해 300명을 모아 왔다. 15년 인연의 첫걸음이자, '스파인2000'이 탄생한 순간이다.

왕씨는 서울라파엘의 집을 '또하나의 고향집'이라고 했다. "여기서 봉사를 거절당했다면 아마 '역시 장애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모든 걸 포기했을 거예요. 여기서의 도전이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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