腦癌(뇌암) 이겨낸 가족, 또 다른 기적 만들다

유소연 기자 2015. 3. 2.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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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대 캠퍼스에서 열린 사이버한국외대 졸업식. 졸업생들이 한명 한명 호명됐다. 전체 수석과 학부별 성적 우수자들을 끝으로 649명 가운데 648명이 단상에 올랐다.

맨 마지막으로 이름이 불린 사람은 영어학부 박기원(31)씨였다. 입학 5년 만에 졸업하는 기원씨는 뇌암 후유증으로 생긴 시각장애를 딛고 한국어학부까지 복수전공했다. 그는 최후로 단상에 올라 개교 이래 첫 '특별상'을 받았다. "박씨는 이날 졸업식의 MVP"라고 학교 측은 말했다.

기원씨의 어머니 권영희(55)씨도 단상에 함께 올랐다. 상을 받은 아들에게 그는 차마 "축하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저 불쌍하고 안쓰럽다"며 울먹였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었다. 뇌암은 완치됐지만 아들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원씨는 "바늘로 눈알을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이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눈물샘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 30분 이상 모니터를 보면 눈알이 찢어지는 듯하다. 글자는 조금만 떨어져도 읽을 수 없다. 강의용 모니터에 코를 들이대도 글자를 손바닥만 하게 키워야만 겨우 한 자씩 읽을 수 있다. 하루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두 시간을 넘지 못한다.

7년 전까지만 해도 기원씨는 군 복무까지 마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의 한 대학에서 CEO의 꿈을 키우던 경영학도였다. 방학을 맞아 귀국한 2009년 겨울, 안경을 다시 맞추러 병원에 갔다가 "뇌 속에 주먹만 한 종양이 생겨 시신경(視神經)을 누르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미국의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두개골 30㎝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았지만, 왼쪽 눈을 실명했다. 오른쪽 눈도 1m 이상 떨어진 물체는 알아보지 못하게 됐다. 근육 신경이 망가져 오른쪽 얼굴은 내려앉았다. 아버지 박승관(58)씨는 그때의 심정을 "내 가슴을 망치로 내려치는 듯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매일 아들 곁을 지키며 머리를 빗겨줬다. 이듬해 기원씨는 "암세포가 없어졌다"는 기적 같은 진단을 받았다. 기원씨의 사연은 당시 본지 보도〈2010년 5월 19일 ☞ 해당기사 보기〉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아버지는 아들이 완치 판정을 받자 캄보디아로 떠났다. 목회자로서 오랫동안 꿈꿔왔던 선교 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통원 치료를 하는 기원씨 때문에 가족이 함께 갈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내 아들이 기적처럼 살아났으니 이제 다른 이들을 위한 삶을 살아도 되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완치 판정을 받은 뒤 기원씨가 처음 한 일은 학업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이버대학에 입학한 그는 오지 봉사를 떠난 아버지를 돕고 싶어, 영어와 한국어 교육을 전공했다.

병원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어머니는 오후 6시에 퇴근하면 아들을 위해 인터넷에 뜬 사이버대학 강의 내용을 읽어줬다. 어머니 권씨는 "내가 영어가 짧아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철자를 그대로 읽어줄 수밖에 없었다"며 "아들이 고통에 몸부림칠 때마다 '이제 공부는 그만하고 행복하게 살면 안 되겠느냐'고 만류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어머니와 경북 포항에 사는 기원씨는 1~2년에 한 번씩 어머니와 함께 캄보디아로 가 아버지를 만나고, 그곳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희망과 절망을 넘나들길 5년, 하루에 진통제 세 알씩 먹어가며 버티던 기원씨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웬만한 불행에는 무덤덤해졌다"고 했다. 투병 당시보다 체중도 8㎏ 정도 불었다. 기원씨의 오른쪽 얼굴은 여전히 일그러져 있지만 표정은 밝아졌다. 그는 "죽음을 딛고 살아난 게 첫 번째 기적이라면, 대학을 졸업하는 건 두 번째 기적"이라고 했다.

그는 '세 번째 기적'을 준비하고 있다. 오는 5월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열기 위해 경북 영천에 열 평 남짓한 사무실을 짓고 있다. 부모님이 노후를 위해 마련해 둔 터에 대출로 마련한 자금을 들여 공사를 시작했다. 지난해엔 8개월 동안 매주 금요일 1박 2일씩 부산의 한 재활센터에서 상담 과정도 공부했다. 그는 2일 서울사이버대 대학원에 진학한다. 전공은 사회복지학.

"그렇게 고된 공부를 왜 더 하고 싶으냐"고 묻자 기원씨가 답했다. "경영학을 배울 땐 CEO가 되고 싶었고, 영어학과 한국어학을 배우면서는 제3세계에서 교육봉사를 하고 싶어졌어요. 배울 때마다 꿈이 생기잖아요.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평생 장애인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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