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서 부활한 뻐꾸기시계

입력 2015. 2. 18. 04:03 수정 2015. 2. 18. 04: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신익, 부도 딛고 러에 수출 재기 발판..최근 일본서도 인기몰이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여유가 있는 가정이라면 집 안에 뻐꾸기 소리가 울렸다. 신도시가 세워지고 주택 공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내 집 마련에 성공한 사람들이 당시 가격이 10만원대가 훌쩍 넘어 비싼 편이었음에도 뻐꾸기 시계를 위해 지갑을 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뻐꾸기는 갑작스럽게 자취를 감췄다. 다음달 5일이면 뻐꾸기 시계를 만든 지 정확히 40년이 되는 오영길 신익 대표(65)는 톱밥 묻은 작업복을 털며 옛일을 안타까워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사업이 좀 잘된다고 하면 다들 덤벼들어. 그리고 1980년대 말, 90년도 초에는 보험사 아주머니들이 보험을 팔기 위해 뻐꾸기 시계를 공짜로 뿌렸지. 이게 될 일이냐고." 스위스와 일본에서 처음 유입된 뻐꾸기 시계가 국내에 본격 보급된 것은 1987년 국내 업체인 카이저산업이 전자회로를 이용한 뻐꾸기 시계 특허를 획득하고 판매하면서부터다. 당시 스위스는 태엽을 감는 수동식, 일본은 반전자식이었던 반면 국내 업체들은 전자식으로 앞서갔다.

오 대표는 25세이던 1975년, 지인으로부터 시계 부품을 생산하는 조그마한 업체를 넘겨받고 가내수공업 형태로 사업을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뻐꾸기 시계의 인기를 등에 업고 '시닉스'라는 브랜드로 뻐꾸기 시계, 괘종시계를 생산했다. 1992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 일본으로 뻐꾸기 시계, 벽시계 등 30만달러어치를 수출했다. 경기도 광주와 충남 태안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공장을 운영하며 한 해에만 100억원대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부터 시계 수입이 개방되고 내수경기가 부진하면서 신익과 같은 시계 케이스 제작업체들이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카이저산업 등 40여 개에 달하던 시계 케이스 제조업체들의 출혈경쟁은 극에 달했다.

"시계 부품은 일본에서, 목재 케이스는 중국에서 사다가 조립만 하는 업체들이 난립하면서 제 살 깎기식 경쟁이 심해졌어. 게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인건비와 목재 등 원자재값이 치솟으면서 공장 운영도 쉽지 않았지." 결정적으로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시계 케이스 업체들은 모두 문을 닫고 말았다.

"대리점 30여 곳이 동시에 부도가 나면서 나도 손을 들 수밖에 없더라고. 경기도 광주 공장과 중국 공장을 잃었을 땐 암담했지." 한동안은 시계가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러나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시계로 돌아왔다. 다행히 2공장인 충남 태안 공장을 되찾았다. 그리고 국내 시장보다는 뻐꾸기와 대형 괘종시계에 대한 수요가 남아 있는 외국에 집중했다. 영업을 직접 하진 않았지만 수십 년간 거래해온 오퍼상을 통해 주문생산을 이어갔고 주로 러시아와 중동에 수출했다. 2005년 무역의 날에는 100만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목재를 이용해 뻐꾸기 시계와 괘종시계를 생산하는 곳은 국내에서 우리가 유일해. 지금은 1년에 30억원 정도 판매하지만 먹고살 만하니 다행이지." 최근엔 그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아이들의 대통령, 뽀로로를 이용한 벽시계를 내놓을 예정이기 때문. 일본에서 주문받은 곰돌이 푸를 이용한 뻐꾸기 시계도 반응이 좋아 생산을 늘려갈 예정이다.

"시간마다 뽀로로와 그 친구들의 목소리가 나오게 하고 시계 안의 뽀로로 도안을 개발하느라 1년 정도가 걸렸어. 벽시계라고 간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부품 하나만 어긋나도 생산이 안 된다고." 한국서부발전과 태안군이 공동으로 추진 중인 '산업혁신 3.0 사업'을 통해 1500만원 상당의 목재자동절단기기를 구축하면서 생산성도 높아졌다.

"원래 운영하던 기계는 정밀도가 떨어지고 작업자 안전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는데 서부발전 덕분에 일이 쉬워졌어. 앞으로 일거리가 많아져 이 기계로 많이 생산했으면 좋겠어." [태안 = 안병준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