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직장인 첫 7대륙 최고봉 완등' 손영조 "직장 다니며 시간·비용 빠듯했지만 성취감 더 컸죠"

최성국 입력 2015. 2. 14. 03:31 수정 2015. 2. 14. 03:3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덕유산 국립공원공단 손영조 과장

[ 최성국 기자 ]

산이 좋아 국립공원 입사

초등생 때 고상돈 씨 등정에 매료

지리산 첫 발령 받아 본격 산행

"한 주라도 산행 거르면 무기력"

'헝그리 등반'…그래도 행복

가족 반대·직장내 질시 견뎌내

지금껏 아파트 두 채 값 들어가

가족·동료에 진 빚 갚아야죠

등정은 계속된다

생사에 마음졸인 가족에 미안

"이제 그만 갈거지" 아내의 말에

"아직까지 대답하지 못했어요"

삶의 대부분을 산에서 보내는 전북 덕유산 국립공원관리사무소 손영조 자원보전과장(49).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보다는 산악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해까지 14년간 세계 7대륙 최고봉을 차례로 정복했다. 자신의 명함 뒤편에는 이들 '세븐 서밋'을 포함한 주요 등정기록이 빼곡히 적혀 있다. 산에서만 살다 보면 들이나 강, 그리고 떨어져 사는 가족에 대한 생각이 간절할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1주일에 한 번 있는 휴일에도 대부분 다른 산을 찾는다. 이만하면 "산에 미쳤다"는 얘기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스스로도 자신의 산사랑을 무당의 신내림에 비유하기도 한다. 도대체 그에게 산은 무엇일까. 산의 무엇이 그를 몰입하게 만들었을까.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지난 6일 그를 만났다. 눈 내린 지리산 바래봉을 함께 오르며 그의 산이야기를 들어봤다.

"원정등반은 준비 과정부터 험로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힘든 만큼 성취감은 더욱 컸죠. 그것이 원정을 이어가는 힘이 됐습니다." 직장인으로 7대륙 최고봉을 오른 것은 국내에서 그가 처음이다. 그전까지 이 기록은 등반으로 먹고사는 전문 산악인의 영역이었다. 그중에서도 등정기록은 세계 최초 기록을 세운 고 박영석 씨와 엄홍길, 오은선, 김영미, 허영호 씨 등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그는 2001년 유럽의 엘부르즈(5642m)를 시작으로 2003년 남미 아콩카과(6959m), 2004년 북미 매킨리(6194m), 2006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895m), 2008년 아시아 에베레스트(8848m), 2011년 남극 빈슨매시프(4895m), 2014년 오세아니아 칼스텐츠(4884m) 등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완등했다.

그의 등정기록이 의미를 더하는 것은 남들보다 훨씬 불리한 여건을 극복해냈다는 데 있다. 직장인의 한계 때문이다. 원정에 나설 때마다 비용을 마련하고 시간을 내는 데부터 그는 언제나 벽에 부딪혀야 했다. 기업 등의 후원으로 원정을 떠나는 직업 산악인과는 출발점부터 달랐다. 한번 원정에 나설 때마다 필요한 경비는 1인당 3000만~5000만원 정도. 빠듯한 재정형편에 적지 않은 부담으로 그는 늘 빚을 짊어지고 산다. 그가 아직 자신의 원정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 빚이 아직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60여일간의 원정시간을 내는 데에도 가족의 반대와 직장 내 질시의 눈초리를 견뎌내야 했다. 어렵사리 원정에 나서는 만큼 등정 일정도 빠듯해질 수밖에 없다. 최소 인원으로 원정대를 꾸리고 비용은 최대한 절약해야 했다. 시행착오는 처음부터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등반 일정에 한 치의 여유도 없다 보니 계획을 밀어붙이는 경우도 허다했다"며 "하지만 언제나 치밀하게 등반계획을 짠 덕분에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등정 실패나 원정대에 단 한 건의 안전사고도 없었다"고 소개했다.

산악인은 흔히 험준하기로 이름난 세계 최고봉들을 오르려면 "산이 허락해야 한다"고 말한다. 뛰어난 산악인이라 할지라도 변화무쌍한 악천후 등으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마는 현실을 빗댄 말이다. 손씨도 과거 등정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겨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2004년 매킨리 등반과정이었다고 했다. "직장인이란 한계로 계획대로 등반하고 돌아와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굉장히 안 좋았어요. 지금 오르지 않으면 직장에 복귀할 수 없다는 조바심 때문에 결국 등정을 결행하고 말았습니다." 무리한 산행엔 시련이 잇따랐다. 얼마 못 가 눈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를 만났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천길 낭떠러지나 크레바스(빙하의 갈라진 틈)로 추락하게 된다. 오도가도 못하고 주저앉은 그는 한 시간 반 동안 추위와 공포에 떨며 생을 마치기 전 마음의 정리를 하고 있었다. "죽음을 앞에 두면 신을 찾게 되나 봅니다. 무신론자인 저도 기도를 했습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길이 열리더군요."

시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길은 깎아지른 듯 가팔랐고 날씨는 더욱 심술을 부렸다. 정상 근처에서 이번엔 칼날능선을 만났다. 극도로 위험한 지역으로, 보통은 2인1조로 서로를 로프로 묶어 지나는 곳이다. 포기와 도전을 놓고 30여분간 갈등했다. "온갖 고생을 하면서 준비해 온 과정이 머릿속을 스쳐지나더군요. 그래서 넘어갔는데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아찔합니다. 하늘이 도왔죠." 하산길에도 위험은 도사렸다. 눈이 허리까지 쌓인 산을 내려오다 그만 크레바스에 빠지고 말았다. 재빨리 양팔로 몸을 지탱하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가까스로 기어올라왔다.

그가 해외의 최고봉으로 눈을 돌린 때는 2000년부터다. 1999년엔 말레이시아의 키나발루(4101m)를 혼자 배낭을 메고 힘들이지 않고 등정하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그리고 2000년 히말라야 초오유(8201m)를 등정하고 돌아오면서 원정팀을 직접 꾸려 7대륙 최고봉 등정에 나서겠다는 꿈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는 7대륙 최고봉처럼 5000m가 넘는 산들을 오르는 느낌은 여느 산과 크게 다르다고 했다. 공기와 온도 등 자연환경이 모두 생소하고 생명체도 없는 그곳을 그는 '신의 영역'이라 불렀다. 사투를 벌여 등정하고 내려올 때 느끼는 희열도 크다고 했다. 그는 "산소가 부족한 데를 갔다 내려오면 굉장한 행복감이 밀려온다"며 "아울러 자연의 경외감도 깨우치고 성취감도 느낄 수 있다"고 예찬론을 폈다.

"행복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행복하다고 하잖아요? 제게 산은 그렇습니다." 첫 인사를 나눈 뒤 그에게 산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즉답이었다.

그가 처음 산에 관심을 보인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1977년 고향인 남원에서 우연히 TV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상돈 씨의 카퍼레이드를 보면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병석의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행상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리던 시절이었다. 고씨에 대한 동경은 이내 생활고에 묻혀졌다.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해 다른 일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꿈은 남원에서 대학을 나와 서울의 대기업에 근무하던 시절 다시 살아났다. 1990년 북한산에서 본 암벽등반 모습을 통해 색 바랜 기억을 다시 끄집어냈다. "산을 타기로 마음먹고 회사 산악회 활동을 하면서 산에 매료됐습니다. 매주 산을 찾아다니면서 산이 나와 궁합이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산에만 갔다 오면 힘이 솟는데 한 주라도 산행을 거르면 이상하게 무기력해지거든요."

그에겐 7대륙 최고봉을 등정한 뒤 해결하지 못한 빚이 남아 있다. 아파트 한 채 정도를 털어넣고도 딱 그 정도만큼 남은 실제 빚, 그리고 가족과 직장동료 등 주변 사람들에 대한 마음의 빚이다. 아내와 큰아들(19), 딸(17) 가운데 아내와 큰아들은 아직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원정 때마다 그의 생사를 걱정하며 늘 가슴 졸였던 가족들과 이제는 제주도 여행을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제주도 여행은 몇 차례 계획만 세웠다가 돈 때문에 번번이 포기했다. 직장생활도 얼마 전 딴 산림기사 자격증 등을 활용해 최선을 다해 일한다는 각오다. 청소년이나 사회 진출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그의 등정 경험을 들려주는 기회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의 등정기는 계속될 전망이다. 지난해 12월 오세아니아 칼스텐츠 등정을 마치고 귀국 후 아내의 첫마디가 "이제 그만 갈 거지?"였다. 그는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주변 도움 없었으면 등정 불가능"

등정때 후원자 깃발 30개 챙겨…정상에 오르면 일일이 '인증샷'

새만금 홍보 수천만원 지원 받아

산에 빠진 손영조 씨는 1995년 아예 산에서 살기로 작정하고 국립공원관리공단 입사를 감행했다. 반토막 이상이 난 월급도 산에 대한 그의 열정을 막지 못했다. 결혼 3개월째 아내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첫 발령을 지리산으로 받으면서 그의 산생활은 더욱 본격화됐다. 그는 "산을 통해 불굴의 도전정신과 무엇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며 "이렇게 얻은 무형의 자산은 돈과 같은 유형자산과 달리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 늘 풍요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넉넉지 않은 경제사정으로 그는 늘 헝그리등반을 해야 했다. 실제 등반과정보다 준비과정이 더 힘겨웠다. 그래서 그는 "주변의 도움이 없었으면 나의 등정기록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등정 때마다 배낭에 깃발을 30개 정도 담아간다. 단돈 10만원이라도 그의 등정경비를 보탠 동네 슈퍼에서부터 지인 등 후원자들의 상호나 이름이 적힌 깃발들이다. 깃발 무게만 1㎏가량으로 배낭 무게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원칙에 위배된다. 그는 정상에 올라 일일이 깃발을 들고 사진을 촬영한다. "외국 등반대원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비효율적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얀 보드 한 장으로 사진을 촬영한 뒤 포토샵 작업으로 후원자들의 이름을 써넣더군요. 후원자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염태영 수원시장도 도움을 준 사람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상임감사 시절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많은 직원이 그의 원정을 달갑지 않게 여길 때 "국립공원관리공단을 홍보하는 일"이라며 적극 밀어줬다. 등정 때마다 성금도 건넸다. 1억원이 넘는 에베레스트 등정비를 마련할 때는 김완주 전 전북지사를 찾아 "새만금을 홍보해주겠다"며 수천만원을 지원받기도 했다.

덕유산(무주)=최성국 기자 skchoi@hankyung.com

[ 한경+ 구독신청] [ 기사구매] [ 모바일앱]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국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