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치료가 꼭 필요한 곳에 간 거죠

부산/권경훈 기자 입력 2015. 1. 14. 03:03 수정 2015. 1. 1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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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슈바이처' 고(故) 이태석 신부를 기리는 이태석봉사상의 올해(제4회) 수상자인 베트남 롱안 세계로병원의 양승봉(59) 외과 과장. 시상식 하루 전인 12일 부산 광안리 해변에서 만난 그는 부드러운 웃음으로 가득했지만 인터뷰 내내 베트남에 두고 온 환자들을 걱정했다.

부산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대전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1988년, 의료 선교에 나선 미국인 의사의 강연을 듣고 결심했다. '한국에는 나 말고도 의사가 많다. 하지만 형편이 어려운 나라에는 없을 수도 있다. 정말로 내가 필요한 곳으로 가자'고. 1995년 그는 부산의 유명 종합병원을 마다하고 네팔로 갔다. 네팔 말도 배웠다. 촛불에 의지해 밤을 보내고, 빗물을 모아 마셨다. 수도 카트만두에서 250㎞ 떨어진 오지 탄센의 병원에서 5년, 이후 카트만두 파탄병원에서 10년간 환자를 돌봤다.

당직이면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진료했고, 하루에 수술만 20건이나 한 적도 있다. 힌두교 의식을 위해 켜놓은 촛불에 심한 화상을 입은 여섯 살 여아는 다섯 번 수술해 주었다. 스무 시간 넘게 산길을 걸어온 환자, 장기가 터진 채 달려온 남자, 에이즈 환자…. 그는 "돌봐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가난한 사람이 줄을 이었다"고 했다. 한밤 폭우를 뚫고 수술하러 '스쿠터'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외과 전문이지만 일손이 부족해 산부인과·안과·비뇨기과 환자도 돌봐야 했다. 네팔에서만 줄잡아 2만5000명은 다녀갔다고 한다. 휴가 때도 쉬지 않고, 농촌으로 이동 진료를 갔다. 그는 "사흘 진료하는 데 매일 1000명 넘게 몰려왔다"면서 "가난하고 의사도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그들 때문에 늘 마음이 많이 아팠고, 그만큼 보람이 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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