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나를 보고 감동 말라" 장애 편견에 저항한 작은 거인

최윤필 입력 2015. 1. 3. 04:43 수정 2015. 1. 3.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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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성 희귀병 앓아

1m도 안채 안되는 키에

뼈가 약해 잦은 골절상

세 살 때부터 휠체어 의지

교사의 꿈 좌절, 인권운동가로

유창한 말솜씨ㆍ위트로

사회의 편견 촌철살인 비판

장애인 인권 위해 평생 노력

32세 요절... 파티가 된 추도식

"잘 살려고 이 세상에 왔다"

금요일 밤이면 클럽서 댄스 즐겨

추도식 드레스코드도 '멋진'

스텔라 영(1982.2.24~2014.12.6)은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인식 장애'를 교정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지난해 4월 TED 시드니강연에서도 그는 장애인에 대한 직접적인 차별과 혐오나 공포 등 악의뿐 아니라 선의의 배려나 특별한 대접들이 얼마나 심각한 편견이고 차별인지 이야기했다. 그는 오른팔에 "You get proud by practicing"이란 글을 문신했다.

스텔라 영(Stella Young)은 호주의 코미디언 겸 방송인이었고, 칼럼니스트였다. 그는 불완전 골형성증(osteogenesis imperfect)이란 희귀 유전병을 갖고 태어난 장애인이었다. 뼈가 약하고 변형되는 저 증상 때문에 1m가 안 되는 키에 골절상을 달고 살았는데, 7살 무렵 친구 생일잔치에 가서 과자를 먹다가 사래가 들려 쇄골이 부러진 적이 있을 정도였다.

또 그는 맹렬한 장애인 인권운동가였다. 2013년 11월, 31세의 영은 시드니모닝포스트에 '여든 살의 나에게'란 제목의 칼럼을 썼다. 편지 형식의 그 글에서 영은 "와인이라도 몇 잔 마신 날이면 시건방 떨며 하던 말이지만, '나는 이 세상에 잘 살려고 왔지 오래 살려고 온 게 아니야(I'm here for a good time not a long time)'란 말은 진심"이라고, "하지만 당신을 만나러 가는 동안 모든 가능성을 움켜쥐면서 늘 긍정적이고 진취적으로, 지혜롭고 즐겁게 살겠다고 약속하겠다"고 썼다.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다만 여든 살의 자신을 만나지는 못했다. 2014년 12월 6일 그가 숨졌다. 향년 32세.

영은 트위터 계정에 자신을 "Writer, Comedian, Knitter, Crip"라 소개했다.

그는 'Crip'이란 말을 의도적으로 쓰곤 했다. 영어권 시민들은 장애를 지칭할 때 'disability'란 말을 주로 쓴다. 'Crip'은 Cripple(불구자)란 단어에서 나온 속어로, '절름발이'와 같은 모멸적 뉘앙스 때문에 금기시되는 단어다. 영은 동성애자들이 'Queer'란 단어를 적극적으로 씀으로써 성 소수자 공동체의 결속과 자긍심을 고양한 것처럼 'Crip'을 끌어안았다. "내가 경험한 장애는 육체적 장애인 동시에 사회적ㆍ문화적 장애였다. Crip은 그 모든 장애의 경험들이 함축적으로 담긴 단어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 안에서 '장애'를 직업과 취미 다음에 놓았다. 영은 장애인이면서 글 쓰고 방송 하고 뜨개질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글 쓰고 방송 하고 뜨개질을 좋아하고 장애도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도 그를, 그리고 모든 장애인을 그렇게 대하기를 바랐고, 그게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상을 염원했다. 그는 장애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장애인을 특별히 대하는 모든 호의가, 악의 못지않게 해롭다고 말하곤 했다.

지난해 4월 TED 시드니강연에서 한 말의 요지도 그거였다. "장애는 나쁜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비장애인에게 감동을 주고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흔히 소개되는, 장애인 운동 선수들의 슬라이드 사진 몇 장을 보여준 뒤 그는 그것들을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대상화하는 '감동 포르노(inspiration porno)'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나는 당신들에게 영감이나 감동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I'm not your inspiration)"라고 말했다.

"수많은 이들이 저를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용감하다거나 감동적이라고 말하고 싶어 했습니다. 공적인 활동을 하기 훨씬 전부터 그랬어요.(…) 그건 장애인을 대상화(objectify)하는 겁니다. 이런저런 이미지들은 비장애인의 이익을 위해 장애인을 이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저는 15살짜리 소녀가 침대에 기대 '버피 더 뱀파이어(드라마)'를 봤다고 칭찬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단지 앉아 있었던 것뿐이니까요. 저는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침대에서 일어나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칭찬 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저는 장애인이 지닌 참된 성취로 평가 받는 세상, 휠체어를 탄 선생님이 새로 부임해왔다고 해서 멜버른의 고등학생들이 조금도 놀라지 않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스텔라 영은 1982년 2월 24일 호주 빅토리아주 스타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정육점을 운영했고, 어머니는 미용사였다. 병원에서는 장애 때문에 영이 1년도 버티기 힘들 거라고 했지만, 그는 살아 남았다. 3살 무렵 그는 보행기 대신 휠체어를 탔다.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마치 내가 다른 아이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것처럼 대했다. 그게 내겐 더없이 좋은 양육법이었다." 하지만 사회가 그를 배척한다는 인상을 받은 건 꽤 어려서부터였던 듯하다. 영은 14살 때 스타웰의 번화가를 돌며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곳과 없는 곳을 일일이 조사, 그 결과를 지역 신문에 기고했다. 17살에는 집을 떠나 디킨대학에 진학, 언론학과 교육학을 전공했다. 그의 꿈은 교사였다.

하지만 교사가 되지는 못했다. "학교장들은 내게 어떻게 칠판에 글을 쓸 거냐고 물었고, 나는 '지금은 21세기다. 칠판 없이도 교육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들이 많다'고 대답하곤 했다." 대신 멜버른 박물관의 공공프로그램에 자원해 아이들에게 곤충이나 공룡 등 기괴하고 환상적인 동물들에 대해 가르치는 일을 했다. 당시 그는 어떤 아이에게서 "선생님은 요정이냐?(Are you imaginary?)"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아이가 내 육체에서 어떤 엄청난 마법을 본 건가'하는 생각을 했다며 한 칼럼에 이렇게 썼다. "나는 아이들과 아름다운 소통을 경험하곤 했고, 그 때 나의 장애는 어마어마한 특권이었다. (…) 아이들이 (장애에 대해)경계심 없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내가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장애는 내가 지금의 내가 될 수 있도록 많은 사랑스러운 것들을 주었고, 그것들 없는 나를 나는 원치 않는다."

그는 유창한 말솜씨와 위트로 좌중을 사로잡곤 했다. 호주 국제 스탠드업 코미디 경연인 멜버른 국제 코미디페스티벌의 'Raw Comedy'에 출전해 2차례나 최종라운드에 진출했고, 채널 31의 호주 첫 장애인문화프로그램인 'No Limits'을 맡아 여덟 시즌을 진행했다. 2011년부터는 호주국영방송인 ABC의 블로그 'Ramp Up'고정 필진으로 참여해 다양한 장애인 현안들을 기고했고, 2012 런던 패럴림픽 방송 해설을 맡기도 했다. 빅토리아주 장애인 권익위원회 등 여러 단체에서도 장애인, 여성, 청소년 인권을 위해 일했다.

ABC 블로그의 한 칼럼에서 그는 "장애인을 가장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냐"고 물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단순한 인물 배경이 아니라 전면적 캐릭터로서의 장애인을 본 적 있느냐고, 몇 번이나 봤냐고 물었다. 거리에서, 사무실에서, 시청이나 도서관 혹은 극장에서 장애인을 얼마나 자주 보느냐고도 물었다. 그는 장애인을 배제하고 차단하는 이 사회의 차가운 야만을 고발하고 장애인들의 위축된 마음을 자극하고자 했다. "내 장애인 친구는 자기가 성인이 되면 죽거나 장애가 사라지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애를 지닌 성인을 단 한 번도 못 봤기 때문이었다. 장애인은 늘 그가 정기적으로 다니던 병원과 특수학교 교실에만 있는 줄 알았다는 거다."('The Policics of Exclusion')

그가 말한 '사회적 야만'에는 구조적인 문제도 포함된다. 장애인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학교를 못 다니거나 특수학교로 진학한다. 그 결과 취업 차별이 없더라도 교육을 못 받아 일할 기회를 얻기 어렵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가난은 또 여러 활동을 제약한다. 장애인은 그렇게 점차 공동체에서 배제된다. 2011년 호주 통계청에 따르면 14~65세 인구 가운데 12년 교육(고졸)을 이수한 비율은 장애인이 25%, 비장애인은 55%였다. 호주의 장애인 고용률은 39.8%로 비장애인의 79.4%의 절반 수준이다.

모든 장애인 배제가 나쁜 의도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한 여성인권운동가 그룹이 영을 연사로 초청했는데 행사장이 엘리베이터가 없는 2층이어서 거절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행사 주최측은 영에게 사과하며 부랴부랴 장소를 옮겼는데, 거긴 장애인용 화장실이 없는 곳이었다. 영은 "악하지 않다고 해서 해롭지도 않은 것은 아니다"라고 썼다. 교육학 학위를 받기 전 3주간 교생 실습을 했던 20대 때의 경험도 소개했다. 그 학교에도 장애인 화장실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조치란 예방, 즉 아예 물을 마시지 않고 모닝커피를 포기하는 거였다. 오후가 되면 탈수증상으로 두통을 겪어야 했지만, 그렇게 애를 써도 마지막 수업을 할 때면 방광이 터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당시 나는 학교측에 내 불만을 말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대학이 내게 그 자리를 얻어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휠체어로 이동이 자유로운 학교도 많지 않았고, 휠체어 실습교사를 받아주는 학교도 드물었다. 내가 그 학교의 교단에 설 수 있었던 건 내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허락해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장애인인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끔 조건 지워져 있다." 그 사연과 함께 영은 페미니스트 행사에 대한 '감정'을 토로하며 "그래도 교생 실습 땐 와인의 유혹은 없었는데…"라는 구절로 웃음을 선사했다.

올 초 한 방송에서 영은 "내 삶의 문제는 키가 자라지 않고 내 뼈가 툭하면 부러지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데 갈 수 없게 만들어진 무수히 많은 공간들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며 가정하는 내 삶의 고통은 편견적인 고통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한 글에서는 "내 집에서 나는 그 어떤 장애도 겪지 않는다"고도 했다.

영이 태어나던 1982년 빅토리아주는 장애인 아동 교육에 대한 혁신안을 전면 재검토한다. 2년 뒤인 84년에는 모든 아동이 일반 학교에서 교육받을 권리가 있음을 천명한다. 하지만 이후로도 오랫동안 시설, 커리큘럼, 예산 등 여러 제약 때문에 일반 학교는 보행 보조 등 장애아동 지원을 충분히 해주지 못했고, 특수학교는 육체적 보조는 해주지만 상급학교 진학이나 노동시장에서 요구하는 지식을 주지 못했다. 영은 자신이 일반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을 행운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장애와 관련된 모든 '특수ㆍ특별(special)'의 씁쓰레한 의미들을 곱씹었다. 시드니모닝포스트 칼럼에서 그는 "17살 무렵에야 나는 내(장애)가 이 세상에 잘못한 게 아니라, 이 세상이 내게 온당하지 못한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썼다.

영은 춤을 즐겼다. 금요일 밤이면 클럽 댄스 플로어에 나가 춤을 추기도 했다. 그의 춤은 휠체어 안의 아주 절제된 동작이었을 것이다. 호르몬의 충동에 따라 여린 뼈와 근육이 허락하는 만큼. 리듬을 타던 그 순간은 영이 몸의 감각을 가장 예민하게,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롭게 의식하는 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거기서도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어쩔 수 없이 느꼈다고 한다. 그들에게 영의 춤은 춤이 아니었을지 모르고, 그 공간에서 영의 존재 자체가 이채로웠을지 모른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즐기기 위해 추는 자신의 춤이 비장애인에게는 '특별한 행위'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 시선들을 그는 '논평의 시선'이라고 했다. 놀랍다, 대단하다… 며 말을 건네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ramp up'의 한 칼럼에 이렇게 썼다. "음악에 영혼을 맡기고 춤으로 근심 따위를 털어내는 그 공간에서조차 그들 비장애인들은 나의 존재를 교훈적 타자로 대상화한다"고, "장애인의 몸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기 때문에, 나의 춤은 정치적 발언이 된다"고 썼다. 하지만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난 춤을 추고플 땐 출 것"이라고 썼다. "문제는 우리의 장애가 아니라 장애를 바라보는 당신들의 방식입니다."

18일 멜버른 타운홀에서 열린 영의 추도식 드레스코드는 'fabulous(재미있는, 멋진)'였다고 한다. 가족과 친구들은 검정색 상복 대신 큐빅 장식의 스팽글 드레스나 물방울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꽃 장식을 달았다. 진행을 맡은 방송인 월리드 앨리는 "오늘은 맘껏, 무제한 즐기는 자리"라며 "환호하고 박수치고 춤추자"고 말했다.(가디언, 2014.12.17) 온당치 못한 사회와 싸우면서 웃음을 잃지 않고 또 나눠준 고인의 삶처럼, 영을 잃은 슬픔도 행복한 웃음으로 기억하자는 취지였을 것이다. 행사가 끝난 뒤 참석자들은 타운홀 바깥 연방광장에 나가, 영이 그렇게 즐기던 춤으로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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