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만에 만난 어머니의 유산..'나눔'

2014. 12. 3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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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7년간 식사 봉사 아들 이상영씨

3살때 이별 어머니도 '쪽방촌 나눔'

3년전 쓰러진 어머니 '뇌사' 판정"장기기증 하셨을 분" 마지막 나눔

2014년의 마지막 날 오후. 이상영(43)씨는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자신의 가게를 나섰다. 어느 독지가가 어려운 이웃에게 전해달라며 맡긴 김치와 쌀을 지체장애인 노재옥(47)·구미선(41)씨 부부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이씨는 매달 한 차례 노씨 집을 찾아 쌀과 고기 등을 전한다. 김치를 받은 노씨는 이씨에게 "늘 고마운 분"이라고 했다. 이씨는 지난달 노씨의 아들 승완(11)군이 한 단체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이씨의 나눔은 다시 노씨의 나눔으로 이어졌다. 노씨는 아들이 받은 장학금의 절반을 뚝 떼어 독거노인을 위한 연탄으로 기부했다.

이씨의 '나눔 유전자'는 어머니가 물려준 것이다. 세살쯤일 때 아버지는 '돈 벌러 나간' 어머니와 연락이 끊겼다며 새 아내를 맞았다. 이씨가 어머니를 다시 만난 것은 7년 뒤인 1981년이다. 부모님이 정식 이혼 절차를 밟으려고 법원에서 만난 날 아버지를 따라나섰다가 어머니와 1박2일을 보냈다. 아들과 헤어질 때 어머니는 "더 이상 널 볼 수 없을 것 같다"며 자신의 사진이 담긴 목걸이와 500원짜리 지폐를 손에 쥐여줬다. 어머니 소식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성인이 된 이씨는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 인쇄소를 차렸다. 주문 물량이 많지 않아 결혼식마저 치르지 못할 만큼 형편이 어려웠지만, "굶는 이웃을 외면할 수 없어" 17년 전부터 이웃 어르신들에게 근처 식당을 빌려 식사 대접을 하는 등 봉사활동을 했다. 그는 "어릴 때 힘들게 자라서 어려운 분들의 아픔을 잘 안다"고 했다.

그러던 중 2003년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어머니와 재회했다. 22년 만이었다. 어머니는 그사이 사기까지 당해 신용불량자가 돼 있었지만, 식당 일을 하면서도 늦은 밤 남은 반찬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한테 연락이 와서 가보니 '영등포역 인근 노숙인과 쪽방촌 주민들에게 반찬을 나눠주려는데 너무 무거워서 불렀다'고 하셨어요. 어려운 처지에도 남을 돕는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어머니는 너무 일찍 자식 곁을 떠났다. 2011년 11월 지주막하출혈로 뇌사 상태에 빠진 것이다. 소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병원은 이씨에게 조심스레 장기기증 이야기를 꺼냈다. 이씨는 처음에 펄쩍 뛰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장기를 기증하는 것이 그간 어머니가 살아오신 모습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의 신장과 간, 피부조직은 한 아이를 포함한 세 사람의 삶을 되살렸다.

그렇게 어머니가 떠난 뒤 이씨는 이전보다 더 열심히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대한나눔복지회 영등포지회장인 그는 주말마다 어려운 이웃에게 반찬을 만들어 주고, 독거노인에게 쌀과 연탄을 전해준다. 장애인의 말동무가 돼주는 것도 그의 일이다. 가게에선 형편 어려운 어르신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대접하고 있다.

이씨는 5일에 아내와 함께 장기기증 서약을 하기로 했다. 같은 날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는 이씨가 하는 일식집 '스시마루'를 '생명나눔가게'로 지정할 예정이다. 앞으로 누구든지 이씨 가게에서 장기기증 서약을 할 수 있다.

"나눔은 거창한 게 아니에요. 부자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새해에는 좀더 따뜻한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씨의 새해 소망은 어려운 이웃들의 행복, 11년 전 결혼한 아내와 제대로 된 예식을 올리는 일이다.

이재욱 기자 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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