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신진여성문화인상 수상한.. '최연소 제주도 해녀' 김재연씨

최보식 선임기자 2012. 12. 3.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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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납덩이를 차고 바닷속 들어가..남편은 내가 따온 전복 못 먹겠다고"

비 내리는 날, 신문사를 찾아온 김재연(35)씨는 혼자가 아니었다. 가족이 동행했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편은 큰 가방을 두 개 들었고, 두 어린 자녀는 지난밤 동대문시장에서 산 '브라우니' 인형을 각각 안고 있었다.

'최연소 제주도 해녀'인 그녀는 여성문화네트워크가 주는 '신진여성문화인상'을 받았다. 이 수상식을 겸해 일가족이 1박2일 서울 나들이를 한 것이다.

"젊은 해녀가 없다 보니 제가 상을 받게 된 거죠. 해녀들 사이에는 60대가 젊은 층에 속하니까요. 돈벌이로만 따지면 '물질(잠수)'을 할 수가 없어요. 생계가 안 되니까요. 이번 달에 50만원을 벌었어요. '물때'를 골라 한 달에 열흘쯤 들어가는데, 어떤 날에는 겨우 소라 3kg을 따요. 어판장에선 1만8000원이죠. 제가 짜장면집도 하고, 신랑이 직장을 다니니까 하는 거죠."

해녀 입문 5년째인 그녀는 여전히 '최연소' 타이틀을 갖고 있다. 2010년 미국 의 LA타임스는 6대(代)를 이어가고 있는 해녀로 그녀를 소개하기도 했다.

"제가 방송과 신문에 나오니 주위에서는 '좋겠다'고 합니다. 제가 연예인도 아니고, 매스컴에 나오는 게 직업도 아닌데. 어떨 때는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도 들어요."

―힘들고 수입이 낮다고 하면서 해녀 일을 왜 하고 있지요?

"다른 해녀 분들은 '배운 게 이 일이라 어쩔 수 없다'며 한숨 쉬면서 바다에 가요. 솔직히 저는 밤에 누우면 '언제 날이 밝아 바다에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나요. 아침에 다른 해녀 분들이 날씨가 좀 안 좋아 망설이면 '그래도 가보자'고 제가 바람 잡아요. 해녀 분들은 '이제 한참 재미가 붙었구나. 나도 처음 물질할 때는 그랬지'라고 해요."

―힘들어도 중독성이 있는 모양이지요?

"바닷속에 들어가면 잡념이 없어져요. 달랑 몸만 들어가서 해산물을 따는 것에 집중해요. 노력한 만큼 눈앞에 결과물도 있고요. 한번 맛 들이면 아무리 힘들어도 떠나기 어려워요. 쉽게 돈벌이가 되는 다른 일로 옮긴 해녀 분들이 '노는데 몸이 왜 이리 아픈가'라고 해요."

최남단의 섬 마라도에서 출생한 그녀는 초등학교를 마친 뒤 제주도로 나갔다. 전문대를 나와 제주 수협(水協)에서 3년간 근무했다. 그런 그녀가 결혼 후 두 아이를 낳고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해녀가 된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서귀포시에서 옷가게를 하다가 접자, 친정아버지가 '큰 욕심부리지 말고 마라도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휴게소나 해보라'고 했어요. 아침 첫 배로 마라도에 들어가 장사하고 마지막 배로 나왔어요. 제가 커피를 파는 옆에서, 우리 할머니는 해산물을 팔았어요. 평생 '물질'을 했는데 잠수병에 걸려 심장이 안 좋았어요. 다른 해녀에게 해산물을 사 와서 팔았어요. 그걸 보면서 '내가 직접 바닷속에서 따와서 팔면 되지 않겠나'고 생각했죠."

3녀 1남의 맏딸인 그녀는 친정 살림을 책임지고 있었다. 부친은 간암과 뇌출혈로 쓰러졌고, 모친은 병 수발에 매여있다. 남동생은 군 제대 후 교통사고를 입어 간신히 걸음을 뗄 정도다. 그녀의 짜장면집에 의탁하고 있다.

― 제주도 에서 해녀 일은 어머니가 딸에게 전수하는 걸로 아는데, 어려서 배운 적이 있었나요?

"엄마도 해녀였지만 당초 딸들에게 시킬 생각이 없었어요(그녀의 여동생 둘은 결혼해서 제주 시내에 산다). 서른이 넘어 제가 해보겠다고 하니, 엄마는 '물질이 장난인 줄 아느냐'고 했어요. 그때는 '할머니도 하는데 젊은 내가 왜 못 하느냐'고 큰소리쳤죠. 어릴 적 자맥질하면서 소라를 따면서 놀았거든요. 하지만 무거운 납덩이를 차고 처음 바닷속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 거의 죽을 것 같았어요. 멀미와 구역질을 했어요. 상상할 수 없는 노동이었어요."

―혼자서 바닷속으로 들어간 겁니까?

"57세인 고모가 데려갔어요. 그때까지 마라도에서 가장 젊은 해녀였죠. 장비 없이 깊은 수심에 들어가려면 수압을 이겨내야 해요. 체질이 안 맞으면 물질을 할 수가 없어요. 고모 딸도 처음 바다에 들어가서 멀미를 하고는 그만뒀어요."

―남편은 반대를 안 했습니까?

"아내를 물질시키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느냐며 반대했죠. 물질하고 난 뒤 제가 힘들어하면 '왜 미련하게 무리를 하느냐'고 안타까워했어요. 남편은 제가 따온 해산물은 아예 먹지 않아요. 저는 싱싱한 것을 주고 싶은데, 자기는 못 먹겠대요."

남편은 부산 출신으로 해양환경관리공단 서귀포사업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제주도 발령을 받지 않았다면 서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결혼한 뒤 육지 근무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그녀를 위해 포기했다고 한다.

"결혼 이듬해 명절날 부산 시부모댁에 갔어요. 잠깐 수퍼마켓에 물건을 사러 나왔다가 아파트를 찾지 못했어요. 한 시간을 헤맸어요. 이슬비에 흠뻑 젖을 만큼, 그때 눈물이 났어요. 이런 데서 어떻게 사나. 제가 제주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어촌계 구역이 정해져 있어 그녀의 가족이 있는 서귀포에서는 해녀 일을 할 수가 없다. 주말이면 남편이 아이들과 함께 그녀를 보러 마라도로 온다.

"가정적인 신랑이에요. 물질한 지 1년 만에 제가 큰 전복을 땄어요. 그때부터 신랑이 해녀 일을 받아들였어요. 제가 정말로 물질을 좋아한다는 걸 자기도 느낀 거죠."

―전복을 딴 뒤로 남편이 인정했다고요?

"뭍으로 치면 산삼을 캔 것과 같아요. 물질을 배우면서 전복을 한 번 보기나 했으면 좋겠다고 했을 정도예요. 바윗돌과 구분이 안 돼 봐도 그냥 지나치거든요. 저는 지금껏 세 번 전복을 땄어요. 그 기분은 경험을 안 해보면 진짜 몰라요. 전복은 보통 '상군 해녀'라야 따거든요."

―'상군 해녀'는 누가 임명합니까?

"수심 깊이 내려가고 큰 전복을 잘 따면, 동네에서 인정해주는 거죠. '상군' 밑에는 등급이 없고 그냥 '좀녀(해녀)'라 불려요. 저는 '애기 좀녀'죠. 내년쯤이면 '애기' 딱지가 떨어지지 않을까(웃음)."

―대체 처음 딴 그 전복이 어떠했길래?

"800g짜리였어요. 어판장에서 전복 1kg은 16만원이에요. 그날 이런 걸 두 개나 땄으니까요. 사흘 동안 늘 웃고 다녔어요.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고(웃음)."

―바닷속에서 통상 따는 것은 뭐죠?

"일반 해녀들은 소라를 따죠. 소라는 1kg당 6000원밖에 안 돼요. 좀 추워지면 해삼을 따요. 해삼은 두세 달만 나와요. 여름철에는 소라 산란기여서 좀 쉬죠. 그때는 성게를 땁니다. 성게는 1kg당 10만원이라 돈은 돼요. 하지만 바다에서 따온 성게를 일일이 티스푼으로 다 까야 해요. 허리가 너무 아파요. 성게 일이 가장 고돼요."

―왜 다른 해녀들은 전복을 못 따죠? 상군 해녀가 작업하는 영역에는 다른 해녀들이 접근하지 않는다고 듣기는 했지만.

"바다 구역은 정해지지 않았어요. 다만 일반 해녀들이 그 수심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죠. 전복은 깊은 바다에 있거든요."

해녀 김재연씨는"밤에 누우면'언제 날이 밝아 바다에 들어갈까'하는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김재연씨는 얼마나 깊이 들어가나요?

"얼마 전 외국 잡지에서 우리를 찍기 위해 프리다이빙을 하는 사진기자가 왔어요. 그때 측정해 보니 15m 정도가 됐어요."

―해녀들이 수면에 나오면서 '호이' '호이' 하는 숨비소리가 독특하더군요. 똑같이 그렇게 내기로 한 것인가요?

"처음 바다에 들어갔을 때 헥헥 거렸지요. 다른 분들이 웃고, 고모가 '길게 숨을 내쉬어라. 숨비소리가 나와야 오래 할 수 있다'고 했어요. 몸속의 이산화탄소를 내뱉는 거죠. 그 뒤로 물 밑에서 숨을 오래 참고 올라오면 절로 숨비소리가 나왔어요."

―실력 있는 해녀가 되려면 잠수 시간도 길어야 하지요?

"호흡량이 1분 이상 되죠. 저는 숨이 길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해녀와 프리다이빙 선수 간에 누가 오래 잠수하느냐 대결도 있었지요?

"그건 잘 몰라요. 그때 사진기자가 수심 깊이 들어왔지만, 우리 작업 시간을 못 채우고 수면으로 나갔어요. 우리는 잠수한 뒤 1분 만에 작업을 마쳐야 해요. 수심 깊이 빨리 들어가 바닥에 닿는 순간 바쁘게 움직여야 해요. 한 번 잠수해서 주먹만 한 소라 다섯 개를 따본 적이 있어요. 배에 차고 있는 그물주머니는 세 개면 꽉 차고, 양손에 두 개를 들고 수면으로 나오죠. 턱까지 숨은 차지만 뿌듯하죠."

―해녀끼리 서로 좋은 포인트를 차지하려고 경쟁하나요?

"다른 해녀가 있으면 바로 옆에서 작업하지 않아요. 서로 거리를 두는 게 예의지요.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지진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줘야 하니까요. 바닷속 깊은 곳에 들어가면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두려움이 있거든요."

―사고를 겪은 적은 없었나요?

"우리가 물속에 들어가면 '태왁(가슴에 안고 헤엄치는 도구)'을 보고 배가 어느 선까지 가까이 오면 안 되는데. 간혹 물속에 있다가 나오면 배가 지나가요. 고모가 두 번이나 다쳤어요. 워낙 능숙한 해녀라서 피했지, 저였다면 죽었을 겁니다. 배 스크루에 감기면 끝이죠. 고모는 부딪히면서 바깥으로 헤엄쳐 겨우 살아났어요."

―동네 해녀들은 늘 함께 바다로 나갑니까?

"마라도에 해녀가 대여섯 명밖에 안 돼요. 제 바로 위가 고모예요. 아침에 일어나 바다 날씨를 확인하고, '오늘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해요. 결정되면 준비 시간이 필요 없어요. 금세 되니까. 카트 한 대에 함께 잠수 도구를 싣고 바다로 가요."

―혼자서는 바다에 들어갈 수 없군요.

"적어도 세 명은 함께 들어가야 마음이 놓이죠. 나중에 누가 나와 함께 할까가 걱정이에요. 젊은 사람들은 너무 힘들어서 안 하려고 하고, 사회에서는 얼마나 할 게 없으면 해녀 일을 하는가 하는 편견도 있어요."

현재 해녀 수는 4995명,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해녀는 제주 여성 인구의 21%를 차지했지만, 이제는 2.1%에 불과하다. 해녀들은 모두 늙어가고 있고, 이 세계로 풋풋한 신참은 들어오지 않는다.

"사실은…, 제게는 물질이 '천직'이었는데, 그동안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 같았어요. 왜 일찍 시작하지 못했을까. 그때는 남의 눈도 의식이 되고, 해녀를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보지 않을까, 그런 시선 때문에 일찍 결정을 못 내렸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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