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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인터뷰] 간송 수장고 속 대장경, 딱 10년만 읽으려고 했는데…

동아일보

[동아일보]

《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고 고개를 드니 굉장히 잘생긴 남성이 보이는 것이었다.

자신이 보기에 용모가 추한 사람에게는 부모님이 시켜도 인사를 않던 열 살 최완수(70·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였다. 마음에 쏙 드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머리가 이상했다. 갓을 쓴 것도 아니요, 관을 쓴 것도 아니었다. 한가운데를 묶었는데 사발을 엎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거기에 소라껍데기 같은 게 더덕더덕 붙어 있는 것도 같았다. '저게 무얼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옆에 계신 할머니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할머니, 저게 왜 저렇게 생겼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어 38선 근처에서만 뺏고 빼앗기는 고지전이 한창일 즈음 4월 초파일, 충남 예산군 보덕사(報德寺) 극락전에서였다. 》





최완수는 '경경위사(經經緯史)'를 좌우명 삼아 살아왔다. 살아가는 기준이 되는 경전을 날줄로, 살아온 경험담인 역사를 씨줄로 해서 학문의 베를 짜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우리 학문 풍토가 이 경위(經緯)를 무시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건방진 생각

어려서부터 예쁘고 아름다운 걸 좋아했다. 꽃이 그냥 좋았고 그림을 보면 마음이 설다. 누군가가 좋은 그림책을 가져오면 어린 최완수는 꼭 자기 걸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처음 본 부처님 머리는 도통 모를 것이었다. 한 스님에게 용기를 내어 물었다. 당황해하던 스님이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부처님이 예전에 보리수 밑에서 6년 고행을 했는데 그때 보리수 열매가 떨어져 쌓였다고 하더라."

아닌 것 같았다. 따져봐야 소득도 없을 것 같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저걸 내가 밝혀내야지.' "건방진 생각을 했지요. 허허, 열 살 때. 그 생각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밝히는 학문으로 가기로 마음먹게 된 거지요."

그런 결심을 굳히게 되는 결절(結節)마다 그를 이끌어가듯 소중한 만남이 찾아왔다.

예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다닌 경복고 1학년 첫 한문(고문·古文)시간.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30대 중반의 선생님과 제자 사이에 눈빛이 오갔다. '너는 내 수제자.' '내 평생 스승.' 선생은 조선 23대 임금 순조의 부마(駙馬)였던 창녕위(昌寧尉) 김병주의 5대손 백아 김창현(白牙 金彰顯·1922∼1991)이었다. 가문이 왕가와 교유가 잦은 만큼 백아 선생은 조선 문화사와 궁정문화에 정통했고 한학과 보학(譜學)의 대가였다. 스승은 똘똘한 제자를 아꼈다. 제자가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할 때는 "사학과에 요번에 1등할 놈 들어가니까 그런 줄 알아"라고 경복고 동문들에게 말할 정도였다.

"백아 선생께 조선문화의 진수를 배우면서 우리 역사를 긍정적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차츰 확고해졌어요." 우리 역사를 비참한 것으로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을 탈피해야겠다는 목표가 가슴 한쪽에 채워졌다. 다른 한쪽에는 불교미술사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어렸을 적 낯을 가리던 그도 집에서 대대로 시주해온 절의 승려들이 내려오면 시키지 않아도 절을 꾸벅 했다. 주위에서는 전생의 연(緣)이라고 했다. 고2 겨울방학 때 집에 내려온 그는 문득 절에 가고 싶어졌다. 점심을 먹고 출발해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충남 서산 개심사에 가니 해가 뉘엿뉘엿했다.

"와보니 특별히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거기서 자기도 싫어. 에이, 보덕사로 넘어가야겠다고 생각을 했지요. 한번도 가본 적은 없었지만."

개심사에서 보덕사로 가려면 큰 봉우리를 두 개 넘어야 했다. 방향만 좇아 첫 봉우리를 오르니 어두컴컴해졌다. 운동화에 교복, '반야심경'만 품고 올라온 길이었다. 다시 내려가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어두운 길을 죽어라 달려 두 번째 봉우리를 오르니 더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다. 작은 샘 옆에 엉뚱하게 놓인 맷돌 아래짝에 앉아 숨을 헐떡거릴 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육척 장신의 승려가 장삼자락을 휘날리며 그의 정수리를 낚아챘다. 승려를 흠모하던 그조차도 소름이 끼쳐 걸음아 날 살려라 내리뛰었다. 겨우 멈추고 보니 보덕사 앞이었다.

"객사에서 자고 다음 날 일어나 보니 토방에 눈이 가득 쌓였어요. 맷돌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면 얼어 죽었겠지요. 그 뒤부터 '아, 나는 무슨 일을 하다 죽으란 사람인가 보다' 그러고는 하고 싶은 대로 살았지요." 그럼 그 비구는? 그는 종교적 체험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이후 그가 간송미술관에서 45년 넘게 조선미술의 고갱이를 보듬는 '일'을 하게 되기까지는 몇 번의 연이 더 기다리고 있었다.

만남의 전환점

1965년 5월 중순. 최완수는 경주 낭산 기슭 선덕사(현 중생사) 앞마당에서 목이 잘린 불상과 씨름하고 있었다. 땅 위로 드러난 부분은 사람 키만 하고 나머지는 묻혀 있었다. 실측을 하고 도면을 그리고 있으니 그곳 주민들이 '뭘 하나' 궁금해서 몰려들었다 이내 사라졌다. 그런데 유독 한 그림자가 작업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툭툭 털고 일어서는데 잘생긴 중년 남자가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경주 천지에 아는 사람이 없는데…' 의아해하며 쳐다보자 그 남성이 말했다. "내가 최순우야."

고미술에 대한 최고의 감식안을 자랑하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1916∼1984)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과장이었다. 그리고 최완수는 미술과 소속 직원이었다. 하지만 최완수는 그해 4월 중앙박물관에 입사하고 이틀 만에 관장에게만 인사를 하고 불상을 연구하겠다며 경주분관(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내려온 터라 직속상관의 얼굴도 알지 못했다.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혜곡이 덧붙였다. "나 미술과장이야." 인재를 아끼기로 소문난 혜곡이었다. 미술과의 한 괴짜가 매일같이 도시락을 싸들고 경주 일대 불상을 연구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변변한 차편도 없을 때여서 경주분관에서 선덕사를 오려면 택시를 타도 큰길에서 내려 논두렁길을 1km는 걸어야 했다.

이후 혜곡은 그를 데리고 공주 강진 부안 등 전국에 발굴하는 곳이 있으면 죄다 다녔다. 그렇게 1년여가 지난 뒤 혜곡이 물었다. "간송(澗松) 이름 들어봤어? 간송미술관에서 같이 일해 볼 생각 없어?" 한국 최고의 문화재 수장가인 간송 전형필(全鎣弼·1906∼1962)의 유지를 받들어 미술관에 만들 한국민족미술연구소에서 간송이 모은 문화재를 정리 및 연구해보자는 제의였다. "그때도 건방을 떨었지. 간송의 후손이 있을 텐데, 한 번 보고 일할 만한 사람인지 본 다음에 결정하겠다고 말이지. 그래서 간송의 자제를 만났는데 금세 의기투합했어."

하지만 최종 결정은 간송미술관의 수장고를 보고 내려야 할 일이었다. 10만 장서를 자랑하던 서적들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는 한쪽에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100책이 껍데기도 뜯지 않은 새 책으로 꽂혀 있었다. 그가 대학 때부터 읽었고 졸업하고서도 학교 도서관에서 교수님 서너 분의 도장을 찍어 어렵사리 빌려 읽던 대장경이었다. 대장경이 있는 곳에서라면 10년만 그 책을 읽고 지낼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늘 하던 차였다.

"그거 꽂혀 있는 걸 보고 내 처우며, 이런 소리 하나도 안 하고 말했어요. '여기 있을게.' 대장경이 발목을 잡아서 지금까지 있어요."

연기(緣起)

2009년 최완수는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1759) 연구의 총화인 '겸재 정선'(전 3권)을 펴냈다. 200자 원고지 3673장, 도판 206장과 삽화 147장이 들어간 역작이다. '조선이 당쟁만 일삼다가 나라가 망했다'는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그가 40년을 공들인 작품이다. 그는 당쟁만 일삼아 나라가 정체된 것이 아니라 바로 당쟁이 심하던 그 시대가 조선의 문화가 가장 왕성했으며 그것이 바로 '진경(眞景)시대'로 드러났다는 자신의 가설을 겸재를 통해 입증해냈다. "겸재로 식민사관을 훌륭하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조선이 이렇게 훌륭했다는 걸 증명해 보였으니까요."

그는 연기(緣起)를 믿는다. 그래서 난관이 닥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해야 할 인연을 타고나서 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다가 이제 할 일 다 했으면 가겠거니, 하고 사는 거지요." 그는 어쩌면 연기의 고리에서 이미 벗어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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