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없는' 생리대 지원 사업]그날, 민감한 소녀들을 두 번 울리는 '불편한 복지'

강현석·박태우·권기정·이종섭 기자 2016. 10. 11.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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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가난 인정서’ 쓰고 생리대 받아가라는 정부

“가뜩이나 움츠린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상처를 줄 것이 뻔하지만, 정부 지침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으니 난감합니다.”

보건복지부의 ‘저소득층 여성 청소년 생리대 지원 사업’을 접한 지방자치단체 담당 공무원들의 한결같은 고민이다. 전북 전주시에서 익명으로 생리대를 지원받아온 ㄱ양(14)은 11일 “생리대를 지원받고 있는 것은 친한 친구들도 모르는 비밀이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신청서를 제출하고 보건소에서 직접 받아가라고 하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지금으로선 나 자신을 노출시키면서까지 생리대를 얻어 쓸 마음이 없다”고 말했다.

■“가난인정서 써라”

정부는 생리대를 지자체가 입찰을 통해 일괄 구매한 뒤 보건소와 아동센터 등을 통해 지원하도록 했다. 정부가 추산한 생리대 지원 대상 청소년은 29만명에 이른다. 이 중 9만2000명은 아동센터 등 시설을 통해 지원하고 19만8000명은 보건소를 이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청소년이 보건소까지 찾아가 반드시 신청서를 작성하고 생리대를 받아가는 방식에 대해 지자체 대부분은 실효성에 회의적이다.

생리대 지원 신청서는 민감한 개인정보를 거의 모두 요구하고 있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e메일, 세대주의 인적사항 등을 적어야 하고 건강보험증과 주민등록증 등 신분증 사본도 제출해야 한다. 담당 공무원이 기초생활수급자 여부 등을 확인하는 데에도 동의해야 한다.

3개월치 생리대를 받기 위해 각 구에 대부분 1곳씩밖에 없는 보건소까지 찾아간 뒤 ‘가난한 집 아이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받아야 하는 셈이다. 아동센터 등의 경우 시설 대표가 일괄적으로 신청서를 작성한 뒤 행정기관이 구입한 생리대를 받아가 다시 아이들에게 확인서를 받은 뒤 나눠주도록 했다. 하지만 20만명 가까운 청소년들은 노인들이나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많이 찾는 보건소를 업무시간에 방문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주는 대로 받아라”

108개나 되는 생리대를 한꺼번에 집까지 가져가는 것도 문제지만 종류도 선택할 수 없다. 정부는 소형과 중형, 대형 각 36개를 한 세트로 묶어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광주 광산구 관계자는 “의자에 앉아 공부하는 시간이 많은 아이들은 대형을 선호한다. 하지만 정부 방침은 원하는 종류를 선택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면서 “청소년들 실태를 전혀 파악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ㄴ양(15·광산구)은 “부피가 큰 생리대 묶음을 들고 길거리를 다니라는 것이냐”며 “현재 구청이 하는 방법에 아무런 불편이 없는데 왜 정부가 나서 우리들에게 가난인정서를 쓰라 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원 나이를 제한하는 것도 문제다. 정부는 11세부터 18세까지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정했지만, 초경 연령이 빨라지면서 10세 이하 청소년도 생리대가 필요하다. 10세 이하에 초경을 시작하는 청소년은 2.9%다. 전주시가 생리대를 지원해온 10세 이하 청소년은 전체 600여명 가운데 22명이다.

전국 지자체 관계자들은 지난달 27일 열린 관계기관 회의에서 이런 우려를 전달했지만 정부는 아직까지도 지침을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내년은 아직 미정

대구시는 “수령 절차 개선 등을 복지부에 건의했지만 원칙적으로 변경은 곤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밝혔다. 임원정규 대전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은 “보건소에서 신청서를 쓰고 직접 받아가라는 발상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정책”이라며 “아직도 편의점에서 생리대를 살 때 검은 봉지에 넣어달라고 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는데 예민한 소녀들에게 두 번의 낙인을 찍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내년에 이 사업을 어떻게 시행할지도 정하지 못한 상태다. 복지부는 내년 예산에 이 사업비를 아직 반영하지 않고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모든 여성청소년에게 지급할 수가 없어서 소득을 확인하고 지급하도록 한 것이며 부모나 대리인이 대신 수령할 수 있도록 했다”면서 “가급적 여성공무원이 담당하고 표시 나지 않는 봉투로 가져가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강현석·박태우·권기정·이종섭 기자 k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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