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탑서 맞이하는 노동절.. 출구 못 찾는 노·사·정 대화도 끊겨

이영경 기자 2013. 4. 30.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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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불법파견, 올 들어 노사교섭 한 번도 못 열어기아차 비정규직·쌍용차 복직도 사측 거부로 '감감'재능교육 1958일째 농성..정부 "자율 해결" 뒷짐만

한파는 혹독했다. 철탑 위에서 겨울을 꼬박 난 현대차, 쌍용차, 재능교육 노동자들은 얇은 비닐막을 둘러 추위와 싸우고 동상 증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새 정부가 출범하고 봄이 왔지만 철탑 위·아래의 현실은 변한 것이 없다.

대법원에서 현대차 정규직이라고 판결받은 최병승씨와 천의봉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사무장의 철탑 고공농성이 1일로 197일을 맞는다. 4일에는 200일을 맞는다. 지난해 2월 대법원에서 재차 현대차가 불법파견을 받았다고 판결한 뒤 지난 3월 중앙노동위원회도 현대차의 32개 업체 279명의 사내하청 노동자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을 내렸지만 현장의 '불법'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5월1일 전국에서 모인 노동자들이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노동절 기념집회를 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현대차 불법파견 철탑 대치 197일째… 정규직 노조와 정부는 뒷짐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논의는 5개월째 멈춰 서 있다. 현대차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지회의 의견 차이로 지난해 말 불법파견 특별교섭이 중단된 후 현재까지 재개되지 않고 있다.

당초 금속노조와 현대차지부, 현대차 비정규직지회는 30일 오전 10시 간담회를 갖고 향후 특별교섭 재개 일정을 잡기로 했다. 그러나 주간연속 2교대제 시행 후 특근 협의를 둘러싼 정규직 내부의 갈등이 이어져 이날 간담회는 취소됐다. 금속노조 관계자는 "26일 현대차 노사가 합의한 특근 합의에 일부 조합원들이 반대하면서 불법파견 특별교섭 간담회 일정은 미뤄졌다"며 "다시 일정을 잡고 특별교섭을 통해 불법파견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현대차지부가 5월부터 임금단체협상을 할 예정이어서 사내하청 정규직화를 위한 특별교섭은 또다시 우선순위에서 밀릴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지부는 다음주 대의원대회와 수련회를 갖고 임단협 요구안을 논의한다. 특별교섭 재개를 위한 비정규직지회와의 간담회는 5월 중순 이후에야 열릴 것으로 보인다.

현대·기아차 사내하청 문제는 고립된 비정규직 투쟁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현대차, 현대차지부, 정부까지 누구 하나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지 않으면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싸움이 장기화되고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현대차 비정규직지회는 현대차에 사측과의 직접대화를 요구했지만 현대차는 "대화 대상이 아니다"라며 거부했고, 고용노동부도 중재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 다시 특별교섭 재개 논의가 이뤄졌지만 현대차지부의 주간연속 2교대제와 특근 등 현안 때문에 뒷전으로 밀리는 양상이다.

지난 17일 분신을 시도한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 문제도 마찬가지다. 기아차 정규직노조가 회사와 신규 채용 시 정규직 자녀 우선채용에 먼저 합의하면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좌절과 박탈감이 커졌고, 분신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졌다. 분신 후 기아차지부와 사내하청분회가 회사에 특별교섭을 요구해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을 촉구했지만 사측은 신규 채용 형식의 '특별채용'만 내놓은 채 정규직 전환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기아차 사내하청분회 관계자는 "분신한 김모 조직부장에 대한 치료비 등 보상 문제와 비정규직 특별교섭을 회사와 별도로 진행하고 있지만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며 "김 부장의 보상도 회사는 사내하청 직원이기 때문에 원청인 기아차와 직접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분신사태 후 사내하청분회가 독자적 부분파업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김 부장이 입원한 병원 앞에 금속노조나 기아차지부 차원에서 천막 하나 치지 않고 있다"며 정규직노조에 서운함을 표했다.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현대차의 경우 현재로서는 3500명 신규 채용 안에서 변함이 없다"며 "불법파견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협의를 통해 풀려 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아차에 대해서는 "기아차는 불법파견 판결이 난 사업장이 아니기 때문에 정규직 전환 대상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 쌍용차도 노사교섭 중단… 해고자 문제는 대화 끊겨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 문제는 더 요원해 보인다. 대선 전 새누리당까지 국정조사를 얘기했지만 대선 후 이한구 원내대표가 강하게 반대하면서 국정조사 대신 '여야협의체' 구성에 여야가 합의했다. 사실상 국정조사는 물 건너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쌍용차는 지난 3월 454명의 무급휴직자와 24명의 징계해고자들을 복직시켰지만 정리해고자와 희망퇴직자의 복직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회사는 해고자들이 중심이 된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의 어떤 대화와 교섭 요구에도 응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4일 대한문에 세워진 쌍용차 해고자들의 농성천막이 1년 만에 철거됐다.

쌍용차 관계자는 "회사가 여건이 돼서 무급휴직자 454명이 복직된 게 아니라 여건이 어렵지만 대승적 차원에서 복직시킨 것"이라며 "정리해고자와 희망퇴직자 복직을 논의할 여건은 안된다"고 말했다.

쌍용차지부는 고용노동부에 회사와의 교섭 중재 등 적극적 문제 해결을 요구하고 나섰지만 노동부도 적극적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무급휴직자들이 돌아간 현장에도 갈등의 불씨는 남아 있다. 29일 쌍용차는 복직 후 교육 중이던 복직자들에 대한 현장배치를 마쳤지만 2009년 '옥쇄파업'으로 구속돼 법원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17명은 발령을 내지 않았다. 교육 중에는 무급휴직자들에게 임금청구 소송 포기 확약서를 제출토록 요구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2009년 정리해고 후 24명이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은 쌍용차 해고자들은 최근 잇따른 현대·기아차 비정규직의 자살·분신을 안타까워했다. 쌍용차지부 관계자는 "노동자들이 산 목숨을 끊고 자기 몸에 불을 붙여야 할 상황에 놓인 현실이 안타깝다"며 "박근혜 정부의 노동정책, 노동부의 태도, 사측의 태도가 변함없는 가운데 현장의 절망과 답답함은 커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 재능교육 단협 원상복구와 전교조 법외노조 갈등은 장기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 해고자 오수영씨와 여민희씨가 서울 혜화동성당 종탑에서 하고 있는 고공농성도 84일째를 맞고 있다. 재능교육은 이날로 1958일째 분규 중인 최장기 투쟁사업장이기도 하다. 2007년 사측이 "학습지 교사는 특수고용 노동자라 노조를 결성할 수 없다"며 단체협약을 파기하고 노조 간부들을 해고하면서 시작된 농성이다. 지난해 11월 서울행정법원은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도 노동조합법상 근로자로서 성격이 인정된다"며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재능교육이 학습지 교사 위탁계약을 해지한 것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회사는 이들의 노조 인정과 복직을 수용하지 않았다. 노조가 2007년 파기된 단체협약 원상 복귀를 주장하고 있지만 회사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재능교육노조 관계자는 "회사가 당시 노동조합이 아니라며 단체협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노조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단체협약을 원상복구시키는 게 맞다"고 밝혔다.

해직교사 조합원 인정 여부를 둘러싼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정부의 갈등도 여전하다. 정부는 지난 2월 "해직교사를 조합원으로 둔 전교조의 규약이 현행법에 어긋난다"며 전교조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방하남 노동부 장관은 취임 후 사회적 대화를 통해 신중하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전교조가 규약을 고쳐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전교조는 교원노조법과 노동관계법의 개정을 요구하며 맞서 노·정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대선 직후 전문가들은 '사람들이 철탑 위로 올라간' 갈등이 어떻게 풀릴지 주목했다. 2월25일 박근혜 대통령 취임일을 첫 고비로 봤고, 정부 출범 후에는 5월1일 노동절을 또 하나의 분기점으로 삼았다. 박근혜 정부 노사정책의 첫 시금석으로 매김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그러나 노동현안에는 침묵하고 있다. '경제민주화' 공약은 축소하면서 재계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였지만 노동계에는 '법과 원칙'을 강조했다. 취임 후 두 달을 두고 '노동 없는 정부'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답답한 현실에 절망한 현대·기아차 비정규직의 자살과 분신도 지난 15~16일 이어졌다.

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은 "대선 직후 노동자들의 이어진 죽음이 정권교체도 없고 희망이 만들어지지 않은 데 대한 절망 때문이었다면 지금 현대·기아차 비정규직의 자살 문제는 정부가 불법파견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방치하면서 일말의 기대와 희망을 놓게 된 때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박 집행위원은 "박 대통령이 '임기 내 비정규직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겠다'고 하고, 노동부 장관이 청문회에서 '불법파견에 대한 시정명령과 직접고용 조치를 하겠다'고 말했지만 정부에서 실행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며 "쌍용차도 정부가 대선 기간 약속했던 최소한의 조치만 취해도 대화로 교섭을 풀 여지가 있을 텐데 통로가 봉쇄당해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고 밝혔다.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는 "박근혜 정부는 노동현안을 어떻게 풀겠다는 장기적 방침도 없이 노사 자율을 강조하는 이명박 정권의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면서 "노동권 보장을 위해 개입하지 않을 테니 힘 있는 기업이 알아서 하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밝혔다.

<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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