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복지공단은 삼성관리공단?

장일호 2010. 10. 20.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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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인 황상기씨는 10월 들어 운전대를 채 열 번도 잡지 못했다. 황씨가 10월20일 이른 아침 눈을 뜬 곳은 강원 속초의 집이 아니었다. 근로복지공단 민원실 바닥 위에서 그는 밤새 잠을 뒤척였다. 잠을 뒤척인 것은 황씨 뿐만이 아니다. 강원 춘천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인 딸 한혜경씨를 병원에 놓고 온 어머니 김시녀씨 역시 ‘노숙’을 감행했다. 정애정씨는 다섯 살, 세 살 꼬맹이들을 친정에 맡긴 채로, 유영종씨 역시 일손을 놓고 나와 낯선 곳에서 몸을 누였다. 이들은 모두 꿈의 공장인 삼성에서 남편을, 딸을 백혈병 등으로 잃거나 지금 치료를 받고 있는 ‘삼성  백혈병’ 피해자 가족들이다.  10월19일 오후 2시, 신영철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찾아온 가족들에게 근로복지공단은 이사장실로 통하는 엘리베이터의 전원을 내리고, 비상구에 자물쇠를 걸고 막았다.  “신 이사장을 만나기 전까지 나가지 않겠다”라며 민원실에 마냥 주저앉은 피해자 가족들에게 근로복지공단측은 잠자리용 깔개를 제공 했다.

ⓒ시사IN 장일호 강원 춘천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인 딸 한혜경씨를 병원에 놓고 온 어머니 김시녀씨

이들이 근로복지공단에 몸을 누인 이유 9월까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반올림)’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삼성에서 근무하다가 백혈병을 비롯해 희귀암에 걸린 노동자가 100여 명에 달한다. 이들 중 16명이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심사를 요청했다. 이종란 노무사는 “16명 중 10명이 ‘발암물질을 찾지 못했으니 업무관련성이 없다’라는 이유로 산재 승인 불가 판정을 받았고, 나머지 6명 역시 비슷한 이유로 불승인 판정이 날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산재 불승인 판정을 받은 피해자 중 5명은 지난 1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던 중 지난 10월15일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열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이미경 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공문 한 장이 피해자 가족들의 화를 돋웠다.  공개된 공문은 근로복지공단이 경인지역본부에 보낸 ‘소송지휘 요청에 대한 회신’이라는 제목의 내부 공문이었다. 공문에는 “삼성전자가 보조 참가인으로 소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조치할 것”과 “소송결과에 따라 사회적 파장이 클 것으로 판단되는 사건임을 감안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공문은 피해자들이 행정소송을 낸 직후인 올해 1월22일에 작성됐다. 결국 삼성전자는 법무법인 율촌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피고 보조 참가인 자격으로 소송 참가 신청을 했다. 이 소송은 형식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행정소송이지만, 실제로는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달라”는 산재 소송이나 다름없었는데 이 소송의 법률적인 이해 당사자인 삼성전자가 공문 내용대로 보조참가인 자격으로 근로복지공단을 돕기 위해 소송 참가 신청을 낸 것이다. 이미경 의원은 국감장에서 “근로복지공단이 삼성복지공단인가”라고 강하게 따졌다.  분을 삭이며 만 하루를 꼬박 버틴 10월20일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피해자 가족과 신 이사장의 만남이 이뤄졌다. 신 이사장을 만난 피해자 가족들은 장장 3시간여에 이르도록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했다. 이들은 신 이사장에게 “근로복지공단이 삼성을 행정소송에 참가시킨 데 대해 사과하고, 역학조사에서 제기된 소수의견(업무관련성 있다)을 적극 반영해 산업재해를 인정해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신 이사장은 기존 입장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현재의 산재 시스템을 존중해야 한다”라고 답했다. 또한 신 이사장은 삼성전자를 보조 참가인으로 행정소송에 참여시킨 것에 대해서도 “(공문 내용의) 표현상 부적절한 부분이 있었다고 보지만, 근로복지공단이 피고일 때 기업 측에 참여 요청을 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계속되는 피해자들의 문제제기에 신 이사장은 마지못해 “검토하겠다”라는 말로 면담을 마무리 지었다.  허탈하게 이사장실을 나선 가족들은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지난 3년간 산재 인정을 받기 위해 부단히 드나들었던 근로복지공단이었다. 삼성전자 온양공장에서 일하다가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한혜경씨의 어머니 김시녀씨는 “3년만에야 공단의 최고 책임자를 직접 만나 하소연했지만, 얼굴 봤다는 거 말고는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다”라고 말했다. 반올림과 피해자 가족들은 10월22일 열릴 국정감사 종합감사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다.  올해 국정감사에서 근로복지공단은 ‘팔이 안으로 굽는 이중 잣대’로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근로복지공단 직원들은 지난해 사내 체육대회나 등반대회에서 다치고 선반에 손가락을 베여도 산재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일반 노동자들의 직업성 암에 대한 인정은 지난 한해를 통틀어 고작 4건에 불과했다. 

장일호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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