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은 지금도 계속된다

주진우 기자 입력 2010. 8. 23. 11:44 수정 2022. 1. 21.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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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조선을 강제 점령한 지 100년, 친일은 이제 역사의 유물이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보수 우파는 '식민지 근대화론' 등을 거론하며 오늘도 일본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지난 100년간 '친일'이 우리를 어떻&

1910년 8월29일,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일제강점기 35년은 다른 식민지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억압과 인권 유린이 심했다. 민족과 문화는 거의 사망 직전까지 갔다. 그 뒤에는 늘 친일 조선인들이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점령한 지 100년, 친일은 역사의 유물로 사라졌을까. 아직 보수 우파들이 ‘식민지 근대화론’ 등을 거론하며 노골적으로 일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게 현실이다. 지난 100년간 ‘친일’이 우리 역사와 사회를 어떻게 헤집고 할퀴었는지 짚어본다.  

1910년 8월22일 어전회의에서 순종은 한국에 대한 통치권을 일본 황제에게 넘겨주겠다고 밝힌다. 이완용 총리대신은 곧바로 데라우치 총독을 만나 합방조약에 서명했다. “한국 전체에 대한 일본의 통치권을 완전히 일본에 넘겨준다.” 8월29일 메이지 일왕과 순종의 조서가 공포되면서 519년 조선왕조 역사는 숨이 멎는다. 합방의 이면에는 친일파의 적극적인 매국 행위가 있었다. 친일 단체 일진회는 1909년 말부터 일본 야쿠자 흑룡회(黑龍會)의 두목 우치다 료헤이와 손잡고 합방 분위기를 조성하고 다녔다. 일진회는 순종에게 보낸 합방 요청서에서 “합방이 성취되는 날은 황실의 종말이 아니고 영원히 존속하는 시발점이고, 이천만 조선 민중이 천황의 은덕 아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완용과 일진회 등 친일파의 매국 행위는 일본 우익에게 합방 합리화의 빌미를 주었다. 최근에는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가 “한·일병합은 한국이 원해서 합법적으로 했다”라고 주장했다. 친일파들은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사람은 모두 친일을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징용에 간 사람과 징용 및 위안부를 강제 동원하는 데 앞장선 사람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친일파는 독립이 불가능하다며 독립운동을 폄훼하고 방해하고 나섰다. 이완용 등 친일파는 3·1운동이 전국 각지로 번지자 ‘자제회’ ‘자제단’ 등을 만들어 경거망동에 반대한다는 담화문을 내기도 했다. 친일파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제의 식민 통치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일제강점기:식민이 문명 전파라고? 강제 병합 이후 한반도는 빠르게 변했다. 식민지 자본주의 경제로 급속히 빨려 들어갔다. 철도 등 도로가 열리고, 공장이 들어섰다. 서구 문물도 전파됐다. 일본 근대화의 대부로 추앙받는 니토베 이나조는 “식민은 문명의 전파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대륙 침공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조선총독부 관리 야마나 미키오는 “동화란 항상 두세 발 앞서가는 일본인 뒤를 감사하는 마음을 안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라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데라우치 통감은 “완전한 동화란 절대 복종을 의미한다”라고 지적했다.  

ⓒ뉴시스 지난 6월28일 대한어버이연합 회원들이 역사교과서를 왜곡하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극우 단체와 함께 ‘대북 삐라’를 보낸 국민행동본부를 규탄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교사가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수업을 하기 시작했다.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한국인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질 수 없었다. 한·일 병탄 공로로 은사금까지 받은 일진회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회단체가 해산되었다. 모든 출판물의 원고는 미리 검열받았다. 인도·필리핀·베트남 등 다른 식민지와 대비되는 대목이다. 검사와 경찰은 현행범이 아니더라도 압수 수색과 피의자 구인 등의 처분을 할 수 있는 조선형사령 12조가 제정되었다. 강경구의 〈일제말기 파시즘과 한국 사회〉에 따르면 1939년 이후 한반도에서 노역자 480만명, 일본 강제연행자 152만명, 군속 20만~30만명, 군인 23만명, 위안부 14만명이 발생했다. 광복 직전 인구 2576만명의 29%에 해당되는 수치였다. 일제 말 해외로 이주한 한국인 수는 유대인과 더불어 해외 이주 국민 수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한편으로 일본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특히 한국인은 열등한 민족이며 역사와 문화가 일본에 예속되어 있었다는 주장을 거세게 폈다. 일제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 등 허황한 역사도 만들어냈다. 일본 대장성에서 펴낸 〈일본인의 해외 활동에 의한 보고서〉에는 “한국사에서 늘 주도권을 쥔 것은 주변 국가였고, 조선은 순응하여 자기 보전을 할 것인가에 집중했다. 당파성이 조선 민족의 특성이다”라고 기술돼 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구보 시게루 교수는 “한국 사람은 해부학상 야만에 가깝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이 황국신민화운동에 매진하자 친일파들은 적극 일제의 나팔수가 되었다. 윤치호는 1943년 매일신보에 “파격적인 광영인데 어찌 주저할 것인가. 개인과 가정, 일본과 세계 인류를 위해 총출진하라”고 적었다. 조선일보 편집국장과 주필·회장을 지낸 홍종인은 1944년 학병 입영에 대해 “조선 사람에게 역사에 없었던 감격을 일으킨 것이다. 살아 돌아온 병정들이 돌미륵같이 미더운 존재가 될 그때야말로 내선일체의 실을 훨씬 올리고 동아의 지도자 된 광영이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라고 서술했다. 김신석은 1944년 경성일보에 “조선의 부형들은 어린 딸을 여자 정신대로 안심하고 보내라”고 기고했다. 김신석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부친 홍진기의 장인. 홍진기와 김신석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뉴시스 지난해 11월 열린 <친일인명사전> 발간 보고대회

일제와 친일파는 강점기를 근대적 시민사회의 시작이라고 강변했다. 비교적 최근에는 안병직 전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이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의 근대화가 진행됐다”라고 주장해 주목을 받았다. 한승조 전 고려대 교수는 아예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축복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일본이 한국을 문명화시키기 위해서 왔는가. 소나 돼지에게 살을 찌우기 위해 먹이를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실질적 이득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 거두어갔다”라고 말했다. 그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독립운동을 전면으로 부정해 독립운동이 한국의 건국을 막았다는 오류를 불러왔다”라고 말했다. 이승만 정권:반미 친일파, 반공 친미파로 한국은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았다. 그런데 미국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간접 통치하고, 피해를 입은 한국은 직접 통치한다. 그 사이 ‘미국 귀신을 때려잡자’고 싸웠던 반미주의 친일파들은 어느새 영어 완장을 차고 있었다. 미 군정은 물론 이승만 정권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충성했던 친일파를 중용했다. 미 군정의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령은 “그들이 일본을 위해서 훌륭히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 처벌법안이 발의되자 친일파들은 국회와 서울 시내에 협박장을 뿌렸다.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다.” 이승만 대통령도 이에 동조했다. “친일파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한 것이 공산당이다.” 1946년 10월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 문제는 우리 환경이 해결할 수 없으니 극렬 친일 분자라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친일 행위 청산을 이야기하면 빨갱이로 몰리는 상황이었다.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장면 부통령 암살사건 등의 배후에 친일 경찰이 있었다. 친일파 경찰은 고문으로 사건을 조작해내는 능력과 부정부패를 물려주었을 뿐, 사회에 기여한 바가 그다지 없었다. ‘반공 경찰’ 노덕술·이구범·최운하 등은 일제 때부터 고문을 잘해서 출세한 사람이다. 이들은 ‘반공’을 이용해 국민에게 공포를 심었다.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현역 소령 안두희는 재판에서 ‘의사’로 추켜세워졌고, 변호인은 피고에게 표창을 주어야 한다고 변론했다. 안두희는 재판에서 “김구 주석의 한독당이 공산당과 같은 노선이다”라고 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얼마 후 안두희는 풀려나 중령으로 승진했다. 군을 예편해서는 군납업으로 떼돈을 벌어 강원도 양구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로 살았다. 박정희 정권:독도 파괴하자는 주장 나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본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을 하고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한다”라는 혈서까지 쓰며 만주군에 지원했다. 5·16 쿠데타는 일본 군인의 쿠데타와 맥이 닿아 있다. 박 전 대통령은 1932년 5월 청년 장교들이 만주 침략에 이견을 보인 일본 총리를 죽인 사건과, 1936년 2월26일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위 관료를 죽이고 국가 개조를 요구한 국수주의 신봉자들에게 심취해 있었다는 지인들의 증언이 여러 차례 있었다. 1991년 〈월간조선〉 7월호 보도에 따르면 박정희는 친구인 부산일보 황용주 주필에게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자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시사IN 조남진 지난해 11월 개최한 <친북인명사전> 편찬 관련 기자회견.

유신체제를 만들고 수호한 고위 관리들 역시 대부분 친일파였다. 박정희 정권 초기 6년7개월 동안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씨는 일본 육사 출신이었다. 10년 넘게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씨는 친일파 거두 민병석의 아들로 조선총독부 판사 출신이었다. 유신체제 때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3부 수장 그리고 유정회 의장까지 예외 없이 친일파였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통점은 친일파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으로 반민족 행위를 한 사람들을 중용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직전인 1964년 3월16일 당시 박 대통령은 “과거 한·일 간의 불명예스러운 조약들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 당시 한국 일각에서는 독도 문제를 제3국에 맡기자는 주장이 나왔다. 동아일보 1992년 6월22일자 보도에 따르면 한국 측에서 독도를 파괴하자는 제안까지 꺼냈다고 한다. 유신체제 때에는 일본 군국주의를 떠오르게 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켜 3권 분립을 무력화했고,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국민을 물 샐 틈 없이 감시했다. 또 출소한 사상범들은 사회안전법을 가동해 감시했다. 일제의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과 유사한 법이었다.  향토예비군과 민방위 설치도 모자라 학교에서까지 군사교육(교련)을 시켰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묶는 데도 일본 군국주의 수법을 고스란히 차용했다. 학도호국단 부활, 반상회 개최, 국기 하강식, 영화 상영 전 애국가 따라 부르기, 국민가요, 재건체조, 재건복, 미니스커트 단속은 물론이고 비상계엄·위수령·국가 비상사태 선포·10월 유신·긴급조치 등등. 일본 군국주의 통치 역사를 보면,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국가를 일본식·군대식으로 이끌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명박 정권:친일이 국가 정통성이라는 궤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우파들은 광복절을 건국절로 대체하겠다며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중·고교에 배포한 책자 〈건국 60년 위대한 국민-새로운 꿈〉에는 대한민국의 모태가 미 군정에 있다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임시정부는 자국의 영토를 확정하고 국민을 확보한 가운데 국제적 승인에 바탕을 둔 독립국가를 대표한 것이 아니었고, 실효적 지배를 통해 국가를 운영한 적도 없다”라는 대목도 있다. 김영일 광복회장은 “1948년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정의하는 것은 망발이다.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한 친일 세력 근대화에만 초점을 맞춰 자신들의 과오를 덮으려 한다”라고 말했다. 역사학계와 국사편찬위원회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육과학기술부는 역사 교과서 수정에 나섰다. 2009년 8월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역사 교과서 집필 지침’은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관이 대폭 반영됐다.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 과정을 특히 강조했다. 지난해 11월,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왔다. 친박연대 한선교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이 국가에 큰 공을 세웠으니 친일파가 아니다”라는 취지의 인터뷰를 했다. 공이 크다고 친일 행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공처럼 과도 역사의 일부다. 조선일보는 11월9일 ‘대한민국 정통성 다시 갉아먹은 친일사전 발간 대회’라는 제목의 사설로 〈친일인명사전〉 발행을 비난했다. 동아일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에 단호한 대처로 맞서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정리하자는 ‘외침’과 노력은 국가 정통성을 훼손한다고 비난받는다. 그렇다면 친일이 대한민국 정통성인가. 그래서 일부 언론의 논리는 궤변에 가깝다. 서중석 교수(성균관대·사학과)는 “친일 문제만 나오면 국가 정통성을 훼손한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며 빨갱이 운운하는 색깔론을 꺼낸다”라고 말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사대주의’를 아버지로, ‘식민지 근대화’를 어머니로 삼는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 등 기득권 세력이 교과서를 일본식으로 바꾸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이어 일본 통치 미화론까지 들먹이는 게 국치 100년의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100년의 시간이 흐르며 사람과 세상을 바꾸어 놓았지만, 친일의 끈적끈적한 기운은 좀처럼 변하지 않은 것이다.

주진우 기자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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