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한국, 서민은 대체 누구인가.. 정치·사회 키워드로 떠오른 '서민'

2010. 8. 12. 18: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서민(庶民)'을 얘기하고 있다. 정부 부처마다 '서민 정책'을 쏟아낸다. 한나라당은 서민정책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서민 현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서민과 중산층의 정당을 표방해온 민주당은 지난 8일 "정부의 친서민 정책은 무늬만 서민"이라며 독자적으로 '30대 서민정책'을 발표했다. 온통 서민을 위한다고 난리다. 그런데… 서민이 누구야?

기업은 상품을 개발할 때 먼저 타깃 소비자를 설정한다. 그들이 뭘 원하는지 분석해 10대 소녀에겐 휴대전화 '연아의 햅틱'을, 장년층엔 '실버폰'을 판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타깃 계층이 명확해야 효과적 정책이 나올 텐데, 서민 정책이라면 서민이 타깃이란 얘긴데, 연봉 3000만원이면 서민인가? 그럼 5000만원은? 무주택자가 서민인가? 그럼 요즘 '하우스 푸어'는?

박상준(44·가명)씨는 서울 도봉구에 3억원대 아파트를 갖고 있다. 아파트 사느라 대출한 빚이 5000만원쯤 남았고, 월 소득은 300만원 정도인 4인 가구 가장이다. 소득은 올 1분기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한 달 평균(372만원)에 못 미치지만 내 집 마련에는 성공했다. 박씨는 서민일까?

이진수(46·가명)씨는 서울 서초구에 산다. 두 자녀 교육을 위해 강북 집을 팔고 전세로 옮겼다. 매매가 10억원이 넘는 재건축 아파트지만 워낙 낡아 집 판 돈으로 2억5000만원에 전세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연봉은 5000만원. 소득은 전국 평균보다 높은데 내 집을 잃었다. 이씨는 서민일까?

서민이 누구죠?

한나라당 홍준표 최고위원은 당 서민정책특위 위원장이다. 그에게 10일 "서민은 누굴 말하는 겁니까" 물었다.

"허허, 연봉 1억원 미만이면 서민이고, 그 이상이면 귀족인가요? 그런 접근은 맞지 않아요. 국민적 감정을 봐야죠. 못살고 힘든 사람이 서민이지요. 사회 양극화 때문에 국민의 80%가 서민이라고 느끼는데, 그걸 해소하자는 게 친서민 정책입니다."

민주당의 '30대 서민정책'은 전병헌 정책위의장이 발표했다. 같은 질문을 던졌다.

"예전엔 자가용 있으면, 내 집 있으면 중산층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런 게 기준이 되지 못해요. 국민주택 규모(85㎡) 이하의 집에 살면서 가계대출 받는 사람들, 그들이 서민의식을 갖고 있다고 봐요. (서민을 규정하는 데)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생각이죠."

친서민 정책 핵심 부처인 보건복지부 진수희 장관 내정자는 "서민에게 기회와 희망을 주도록 정책 우선순위를 조정하겠다"고 했다. 그가 말한 서민은 누구일까.

"서민은 정치적 용어예요. 시대에 따라, 경제 수준에 따라 범위가 변하겠지만, 소득과 재산을 기준으로 힘든 분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계층이라고 생각해요. 굳이 구체화하라면 중산층이 되도록 도와줘야 할, 빈곤층으로 추락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할 분들이겠죠. 하지만 친서민 정책의 서민에는 빈곤층도 포함돼요. 복지 분야는 오히려 빈곤층이 더 중요하죠."

'서민'이란 용어를 정책 전반에 퍼뜨린 진원지는 청와대다. 청와대에는 친서민 정책을 총괄하는 비서관이 있다. 박병옥 서민정책비서관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청와대가 '이런 사람들'이라고 특정한 건 없습니다. 서민은 합의된 개념은 없어도 두루 통용되는 용어예요. 개인적으로는 소득을 기준으로 중하위 그룹이라고 봅니다. 물론 정책적 관심은 그 중 하위 그룹에 더 많이 두겠지만요."

네 사람의 답변에서 '서민'에 대한 몇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①못살고 힘든,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사람 ②국민주택 규모 이하에 살면서 가계대출을 받거나 중하위 소득을 가진 사람 ③스스로 ①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박상준씨는 서민인가요?

-그럼 박상준씨는 서민인가요? 3억원대 아파트가 있고 월 소득이 300만원 정도인데.

이 질문에 박 비서관은 "서민에 포함된다"고 답했다. "서민을 미들 앤드 로우 인컴 클래스(middle-and-low income class), 중하위 소득층으로 볼 때 박씨 소득은 미들 클래스에 속하니까요."

성신여대 강석훈 경제학과 교수의 답은 조금 달랐다.

"박상준씨는 중산층이라고 부르는 게 맞습니다. 경제학에 서민이란 용어는 없어요. 상류층-중산층-빈곤층이 일반적인 구분이죠. 중산층 가운데 가장 하위 그룹 가구의 월 평균소득이 190만원쯤 돼요. 박씨 가구는 300만원이니까 충분히 중산층이라 할 만하죠. 그런데 아마 그분께 '당신은 중산층입니다' 하면 화낼지도 몰라요."

-왜죠?

"소득은 중산층인데 지출은 빈곤층에 더 가까울 수 있어요. 집 사느라 진 빚 갚아야 하고, 자녀 교육시켜야 하고, 꼭 필요한 생활비를 써야 합니다. 이 세 가지의 합이 150만원쯤 된다면 남는 돈으론 중산층다운 지출을 못하는 거죠.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 박씨 같은 사람이 급속히 늘었어요. 그들을 위해 정치인들이 찾아낸 용어가 서민인 것 같아요. 빈곤층, 저소득층보다는 거부감이 덜한 말이니까. 서민에는 경제적 약자란 뜻 말고 일반 백성이란 뜻도 있잖아요."

-그래도 박씨는 내 집이 있는데….

"그 집 때문에 더 중산층이란 생각을 갖기 힘들 거예요. 박씨 같은 심리적 저소득층이 급증한 가장 큰 계기가 2002∼2006년 강남 집값 폭등이에요. 나도 집이 있지만 강남 집값이 워낙 오르니까 강남에 집 없으면 내 경제력을 평가절하하게 된 거죠. 또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는 고성장이 멈췄어요. 경제성장률이 3∼5%에 머물면서 언젠가 나도 강남 사람처럼 잘 살 거란 기대를 갖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기를 낮춰 보게 된 거고요." 부동산 서민, 금융 서민, 교육 서민…

박 비서관은 "불특정 다수의 서민을 대상으로 정책을 추진할 생각은 없다. 개별 정책마다 다양한 형태의 서민층을 겨냥한다"고 말했다.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는 이미 많은 서민 정책을 발표했고, 시행하고 있다. 각종 서민 정책의 수혜자를 보면 요즘 말하는 서민의 윤곽이 나온다는 얘기다.

전라북도는 지난달 전문가와 기업인들을 초청해 '서민 일자리 창출 토론회'를 열었다. 서민을 위해 일자리를 만들려다 보니 자연히 '서민은 누구인가'란 문제가 나왔다. 이 토론에서 전라북도는 도내 서민 숫자를 도출했다. 전체 70만1419세대 중 23.4%인 16만4136세대.

전북발전연구원 김시백 부연구위원이 제시한 서민 규모 추산 방식은 이렇다. ①기초생활수급자 등 정부의 현금 지원을 받는 사람은 제외한다(이들은 취약계층이다) ②최소한의 삶의 질을 향유하는 4대 보험 적용 직장인은 제외한다 ③노후를 대비하고 있는 국민연금 가입자는 제외한다.

이에 따라 '현금 지원을 받을 만큼 가난하진 않으면서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이 전라북도 일자리 정책의 타깃인 '취업 서민'으로 규정됐다. 이는 한국인의 소득을 10단계(1분위=최하위 10%, 10분위=최상위 10%)로 나눌 때 대략 3∼4분위에 해당한다. 3분위는 월 평균소득 196만원, 4분위는 243만원인 가구를 말한다(올 1분기 기준). 이 기준에선 박상준씨도, 이진수씨도 서민이 아닌데….

김 부연구위원은 "이것은 정책적 지원 대상을 도출하기 위한 좁은 의미의 서민"이라며 "통상 소득 1∼2분위는 빈곤층, 3∼7분위는 중산층, 8∼10분위는 부유층으로 본다. 현재 정부가 내놓고 있는 서민 정책 중에는 7분위(월 평균소득 396만원)까지 수혜자로 한 것도 있다"고 말했다.

교육 분야가 대표적이다. 서민층 대학생에게 학자금을 지원하는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ICL)' 제도는 신청 자격을 '소득 7분위 이하'로 규정하고 있다. 국민의 70%가 대상이다. 교육과학기술부 관계자는 "고교생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현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 갖는 특수성을 감안해 최대한 대상을 넓혔다. 재정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 범위가 7분위였다"고 말했다. 이렇게 '교육 서민'에는 중산층이 고스란히 포함됐다.

반면 '금융 서민'은 1분위(월 평균소득 58만원)∼2분위(140만원)가 주로 해당되고 소득 외에 저신용자라는 조건이 붙어 범위가 매우 좁다. 정부가 대출금의 85%까지 보증하는 서민 전용 대출 '햇살론'은 개인신용 6∼10등급(10등급이 최저)이거나 등급이 아예 없는 사람, 또는 연소득 2000만원 이하로 신청자격이 제한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이건호 교수는 "금융은 소득보다 신용을 봐야 한다. 정상적인 대출이 어려운 신용 6등급 이하가 금융 서민"이라고 말했다.

2008년 출간된 '부동산 계급사회'의 저자 손낙구씨는 형편이 어려워 집을 갖지 못한 무주택자 '부동산 서민'으로 꼽았다. 그는 "전국 주택보급률이 110%에 육박하지만 무주택가구 비율은 몇 년째 40%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 서민 정책의 타깃도 무주택자에 맞춰져 있다. 국토해양부 '서민주택정보' 웹사이트에 소개된 보금자리주택, 기존주택매입임대, 전월세 지원, 장기전세 시프트 등은 대부분 무주택자를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국토연구원 배순석 선임연구위원은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서민은 조금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서민 정책은 국민임대주택이었는데 지금은 보금자리주택이 핵심입니다. 국민임대가 내 집 마련 희망이 거의 없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보금자리는 분양 위주여서 조금만 도와주면 집 살 수 있는 사람이 타깃이에요. 정책상 부동산 서민층이 약간 높아진 거죠."

배고픈 서민, 배 아픈 서민

서민 정책이 겨냥하는 서민의 범위는 이처럼 제각각이다. 교육 서민은 국민의 70%, 부동산 서민은 40%, 취업 서민은 23.4%. 이들을 다 포괄할 경우 신용등급조차 받지 못한 사람부터 월 평균소득 396만원 가구까지 모두 서민이다.

이는 친서민 정책이 포퓰리즘이란 지적을 받는 이유 중 하나다. 강석훈 교수는 "지금 친서민 정책은 가능한 한 서민의 범위를 넓혀서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며 "많은 사람을 찔끔찔끔 돕는 것보다 좁은 범위라도 명확한 대상을 확실하게 돕는 게 정책적 효과가 더 크다"고 말했다. 이에 박 비서관은 "정책마다 특성이 달라 타깃 계층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당연한 현상"이라며 "정책의 무게중심은 분명히 더 하위 그룹에 가 있다"고 반박한다.

어쨌든 2010년 한국은 서민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스피드뱅크 부동산연구소 박원갑 소장은 부동산 서민 얘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아파트 미분양이 경제를 위협할 정도로 넘쳐나는데 부동산 서민은 갈수록 늘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예전엔 '배고픈' 사람이 서민이었는데, 요즘은 '배 아픈' 사람도 서민이에요."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

<goodnewspaper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