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석자도 못쓰는 사람들 간첩 조작..가장 가슴아픈 사건

2009. 11. 20.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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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가 만난 사람] 퇴임 앞둔 안병욱 진실·화해위원장

서울 중구 퇴계로 매일미디어센터 3층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실에선 늦가을의 남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평생 학자로 얽매이지 않은 삶을 살아왔던 안병욱(61·가톨릭대 교수) 위원장은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해야 하는 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남산의 사계절을 볼 수 있었던 건 가장 큰 위안이고 기쁨이었다"고 말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남산 풍경의 한가운데엔 옛 중앙정보부 수사국 건물(현 서울시청 별관)이 있다. 그렇게 안 위원장은 매일 과거와 대면하면서 2년을 지냈다. 이달 말로 그는 2년 임기의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직을 벗는다. 정치와 무관한 자리까지 새 정권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간 게 현실인데, 한나라당과 보수 인사들의 공격 목표였던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을 임기 끝날 때까지 그대로 뒀다는 건 뜻밖이다.

아무튼 4년 전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많은 일을 했다. 우리 현대사의 과정에서 깊은 상처를 받은 이들로부터 1만1000여건의 신청을 받아 진실 규명 작업을 벌였다. 한국전쟁 관련 피해가 9800여건이었고, 과거 정권의 인권침해 사례가 700여건, 항일독립운동 관련이 270여건이었다. 한국전쟁 관련 사안이 전체의 90%를 넘는다는 건, 전쟁의 상흔이 반세기가 넘도록 풀리지 않고 우리 사회에 깊게 드리워져 있다는 걸 뜻한다. 진실화해위는 1만1000여건 중 지금까지 75% 정도 조사를 끝냈다. 안 위원장은 "내 임기 중에 70%까지 처리한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목표는 달성한 셈"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과 관련한 피해 접수 건수가 이렇게 압도적으로 많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한 구체적 통계는 없습니다. 50만명일지, 100만명일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쟁 피해자 현황을 조사하기 위해 지지난해부터 3년째 용역을 줬는데, 성주·울진 등 특정 지역에 가서 현지 증언을 모두 듣는 거였습니다. 그렇게 파악해 보니 실제로 진실 규명을 신청한 사안은 증언을 해준 사람의 5% 정도밖에 안 됐습니다. 만약 신청 요건이 되는 사람이 모두 다 신청을 했다면, 지금의 20배가 넘을 거라는 얘기이지요."

과거사 정리로 반세기 넘게 싸운 독특한 나라학계가 할 수 없다는 것 확인돼 정부가 나선 것

-보수 진영에선 '과거 청산'이란 용어 자체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청산'이란 게 단절이란 어감을 주는데, 과거를 재단하고 처벌하는 게 바람직하냐는 겁니다. '청산'이란 단어를 대체할 다른 용어는 없습니까?

"그래서 우리나라는 과거사 정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세계적으로는 진실위원회나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라는 단어가 하나의 국제적 보통명사화가 되어 있습니다. 거기다 우리는 '과거사 정리'라는 걸 또 붙였는데, 이건 한국의 독특한 작명법입니다. 6~7년 전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한국학 영문 학술지 <코리아 저널>에서 과거사 정리 특집을 기획한 적이 있습니다. 한글 원고를 받아 영어로 번역하는데, 영어에는 우리말에 해당하는 '청산'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청산이라고 하면 'liquidation'이라는 '부채 청산'이란 단어만 나오지 아무리 찾아도 '과거 청산'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영어학자에게 자문해 'to settle the past'라고 작명을 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라고 명명해도 되는데, 여기에 '과거사 정리'를 붙인 건 한국의 특수성 때문이란 말씀인가요?

"과거사 정리·청산 문제를 가지고 1945년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넘도록 싸우는 나라로는, 우리가 독특합니다. 식민지에서 해방되면서 친일·어용 세력들에 사회적 제재를 가해야 했는데, 남북이 분단되면서 그런 분들 중 상당수가 중요한 보직을 여전히 맡다보니, 저 사람들이 우리 민족을 탄압하고 반민족적인 행위를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의문이 나왔던 겁니다. 그래서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다가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사 청산 문제로 된 겁니다."

-친일 문제는 굉장히 복잡하고 중층적인 사안입니다. 해방 직후라면 모를까,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은 이 문제를 학계의 평가에 맡기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정부가 나서서 친일이다, 아니다 판정하는 데 대한 반론이 적지 않은 거 같습니다.

"그 얘기가 원론적으로 타당한 측면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해방 직후 친일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정부 차원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었지만 실패했습니다. 학계에서도, 4·19와 6월항쟁 등 역동적인 과정을 겪어 오며 학문적인 발전이 많았지만 친일 청산을 하진 못했습니다. 학계든 시민·사회단체든 끊임없이 문제제기는 했는데 해결을 못한 게 사실입니다. '학계가 잘하고 있는데 왜 나서느냐'가 아니라, 학계가 할 수 없는 게 확인됐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야 했던 겁니다. 그렇게 지난 4년 동안 정부가 나서니 실질적으로 성과가 나왔습니다. 결과가 증명합니다."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고 화해하는 게 진실화해위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본다면, 지난 4년 동안의 활동이 우리 사회의 아픔과 분열을 치유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보십니까?

"(조사를) 신청한 분의 70%는 저희 조사에 굉장히 고마워하십니다. 더러는 가해자를 왜 밝히지 않느냐고 불만을 제기하는 분도 있지만, 그래도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못한 억울한 사연을 우리가 들어줬다는 걸 고마워합니다. 제일 어렵고 아픈 사람을 도와줬다는 측면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니면 누구도 진실 규명을 해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가시적인 성과로, 인권침해를 당한 분들이 사법부에 재심을 신청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재심을 권고한 45건 중 29건이 재심 청구됐고, 그중 17건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법원이 재심을 기각한 건 한 건도 없습니다. 이건 세계 사법부 사상 상당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중에 개인적으로 특히 의미 있는 건,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의 재심을 법원이 받아들인 겁니다."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인가요?

"그 사건은 제 임기 중에 한 건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제 임기 중 사안으로는) 1970~80년대 발표된 간첩 조작 사건들이 가슴 아픕니다. 간첩으로 조작돼 처벌받은 사람들은, 자기 이름 석자를 겨우 쓰거나 못 쓰는 사람들입니다. 아주 밑바닥의 사람들을, 배 타면서 고기 잡고 하는 어부들을 간첩으로 만들었습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그랬습니다. 또다른 간첩 희생자는 재일동포 모국 유학생들입니다. 일본에서 모국으로 공부하겠다고 찾아온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간첩으로 둔갑돼 지금까지 불행하게 살고 있습니다. 순진한 사람, 자기방어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한국의 좌우 대립 속에 가시밭길을 걸었습니다. 그런 사건들을 하나씩 조사해,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도록 하고, (피해자들로부터) 인생 다 끝난 황혼에 한을 풀고 죽을 수 있다는 말을 들을 때, 가슴이 벅찹니다."

-우리 사회의 극심한 이념 대립, 정치적 대립이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에 큰 부담이 되었을 거 같습니다. 실제 활동하면서 그런 걸 많이 느꼈습니까?

"저한테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건 주로 국회였습니다. 국회에 가게 되면 전 완전히 포로예요. 손과 발, 입까지 묶어놓고 고문을 받습니다. 국회에 가면 전혀 엉뚱한 세상을 간 것 같아요. 정책을 논의해야 할 자리에서, 사람의 과거 흠집을 들춰내 그걸 물고늘어집니다. 위원회의 과거사 정리에 대해서는 조금도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물론 나한테 뜨끔한 질문을 한 사람도 있고, 문제를 정확하게 제기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몇몇 분들은 나처럼 사상이 불순·불온한 사람이 진실화해위원장을 맡아서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을 조장하고 군경의 위신을 깎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사회 안정을 위해 당장 없어져야 한다, 당장 사표를 내라고 말합니다. 그분들은 과거사 정리에 굉장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거 같습니다."

-진실화해위는 전임 정권, 진보 정권의 유산이고 결국 진보 진영에 유리한 일을 하는 거란 인식이 강한 거 같습니다. 현 정권이 이 작업에서 나름의 성과와 결과물을 얻을 수는 없는 건가요? 정권의 성격에 관계없이 이 작업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 당위는 어떤 겁니까?

"몇 차례 기회 있을 때마다 말했습니다. 과거사 정리 문제는 특정 정당, 정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역사와 민족 전체의 문제이고, 현재가 아닌 미래와 미래 세대의 문제라는 걸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부분을 건너뛰면서 시비를 겁니다. 위원회를 시작한 건 지난 정부일지 모르지만, 과거사 정리로 성과와 소득이 있다면 그건 현 정부에 돌아간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실질적인 조사는 현 정부 아래서 이뤄졌기에, 현 정부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과거사에 불편해할 정당이 의외로 과거사 문제에 애정을 가지고 지원했다고 한다면 훨씬 더 빛이 날 텐데 말입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상처가 더 첨예하게 드러나과거사연구재단 설립해 긴 시간 두고 치유해야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2007년 12월, 2년 임기를 끝마친 송기인 초대 위원장의 후임으로 진실화해위원회의 새 위원장에 선임됐다. 이명박 정부 출범을 두달 앞둔 시점이었다. 진실화해위는 오래전부터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었다. 정권 교체를 눈앞에 두고 누구도 '뜨거운 감자'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면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자리, 이젠 정부 지원은커녕 숱한 압박을 받아야 하는 자리를 그가 맡은 건 나름의 '순진한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권 교체 시기에 위원장이 됐습니다. 그때 누구도 맡지 않으려는 자리를 맡으신 이유가 뭡니까? 이렇게 임기를 무사히 다 채우리라는 예상을 했습니까?

"나는 정권 교체를 전제로 들어왔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 당시엔 위원장 선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금방 쫓겨날 거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흠집을 내고 흔들 테니 다들 꺼려 했습니다. 나까지 못 맡겠다고 할 수가 없어 결국 하게 됐습니다. 그때 나름의 계산을 했습니다. 이듬해 봄 총선을 지나면 한나라당이 다수당이 될 테니 5월쯤엔 쫓겨날 거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면 길어야 6개월 정도 시달리다 끝낼 수 있겠구나 생각했고, 그 기간에 후임 위원장에게 인수인계나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6개월이 지금까지 오게 된 겁니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우스갯소리로 '내가 촛불집회의 최대 피해자'라고 말합니다. 그해 5월에 촛불집회가 없었다면 아마 위원회가 개편되고 정리됐을 텐데, 촛불집회 때문에 (정부가) 이곳까지 손을 대지 못했고, 그 뒤엔 긁어 부스럼 만들까봐 손을 안 대서 지금까지 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정부로부터 자진사퇴하라는 압력이나, 진실화해위의 활동과 관련한 압력이 없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협조해준 것도 없지만요. 가령, 법에 규정된 진실화해위 직원 수는 150명인데, 이 수로는 방대한 조사를 수행하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자체 채용이나 지방자치단체 파견 등으로 인원이 240명까지 늘었습니다. 이걸 문제 삼아, 법정 정원을 넘는 인원을 정리하자고 했다면 도리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게 없었습니다. 지난해 여름, 계약 만료된 계약직 직원 12명의 계약 연장을 신청했더니 그중 3명을 줄이라고 해서 9명만 재계약한 게 유일한 간섭이었습니다. 그 정도는 다른 부처도 다 그랬던 거고 …. 개인적으로 정부에서 압력을 받지 않은 이유로 짐작 가는 게 있긴 하지만 추측일 뿐이니 공개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고요 …, 아무튼 정부에서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은 점은 나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다만 국회에 불려 가 온갖 수모를 당했을 뿐입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내년 4월에 활동을 종료한다. 4년이란 법적 활동 시한이 만료되는 것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에 따르면, 진실화해위는 대통령과 국회에 활동 경과를 보고하고 2년 범위 안에서 기한을 연장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안 위원장은 몇 개월만 시한을 연장하면, 지금 들어온 신청을 모두 마무리할 수 있을 거라는 걸 몇 차례나 강조했다.

-결국 정부의 의지가 문제인데, 현 정권 아래선 연장이 쉽지 않을 거라고 보십니까?

"12월에 새 위원장이 오셔서 내년 4월까지 조사를 하면, 전체 신청 건수의 85% 정도는 완료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나머지 15% 정도는 정부가 적당한 시간만 연장해주면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정부의 생각이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몇 개월이라도 위원회 활동 시한을 연장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년 정도 시한을 연장하면 조사를 끝마칠 수 있습니까?

"지금 속도로 보면 내년 연말까지 8개월 정도만 연장해도 충분히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두르면 더 빨리 할 수도 있고요. (조사를 끝마친다고 해도) 그건 과거사 정리의 종착역이 아니라 첫 단계일 뿐입니다. 아예 진실 규명을 신청하지 않은 분들이 훨씬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 그런 분들은 추가 신청을 받아야 합니까?

"추가 신청을 받는다면, 몇 십만명 혹은 몇 만명이 신청할 텐데, 그걸 누가 어떻게 다시 조사하겠습니까?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과거사 연구재단의 설립입니다. 긴 시간을 갖고 과거사 연구재단에서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과거사의 특징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시간이 흘러 사회가 성장·발전할수록 상처가 더 첨예하게 드러난다는 겁니다. 이건 우리뿐 아니라 세계사적 특징이란 걸 이해해야 합니다." 인터뷰/박찬수 부국장 pcs@hani.co.kr, 정리/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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