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통일의 꽃 그 원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현우 기자 2016. 6. 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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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우의 인간正讀] 국회의원 마치며 '임수경 스토리' 출간한 임수경 나를 붙들고 있는 原罪 '통일의 꽃' "젊을 땐 벗어날 수 있다 여겼는데 이제는 그게 안 된다는 걸 알아 나는 오히려 북한에 관심 없어..北서 오신 분들에게 더 관심

공천에서 떨어진 통일의 꽃은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 국회의원 임기 만료일을 1주일 앞두고 만난 그는 의원회관 638호실을 비워줘야 하는 입장이었다. 지난 4년간 제19대 국회의원으로 일한 임수경(48)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공천받으면 파주에서 출마하려고 올해 초 파주로 이사하고 사무실도 얻었는데…." 그는 "공천받지 못한 이유가 궁금하긴 한데, 내가 정치적이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27년 전 가장 정치적인 사건 중심에 있었던 그가 스스로 "정치적이지 못하다"고 말하는 게 낯설었다.

1989년 여름 스물한 살 대학생 임수경은 정부 허가를 받지 않고 평양에 갔다. 당시 그곳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 자격이었다. 대한민국 대학생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또 대표가 됐으나 '불법 방북'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도쿄와 취리히를 거쳐 아직 분단 중이던 독일 서베를린으로 갔고, 버스를 타고 동베를린으로 가서 조선민항(옛 고려항공)편으로 평양에 갔다. 46일간의 북한 체류 기간 동안 대학생들은 그를 '통일의 꽃'이라 칭송했고, 대부분 기성세대는 '철부지'로 치부했다. 그해 8월 15일 판문점을 통과해 내려오자마자 체포된 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3년4개월 수감 생활 끝에 1992년 성탄절 특사로 가석방됐다.

이후 간간이 알려진 임수경의 인생은 순탄치 않아 보였다. 2000년 5·18 전야제 때 전대협 출신 선배들의 광주 단란주점 모임을 폭로했고,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으며 2005년엔 외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2012년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됐으나 불과 며칠 만에 탈북 대학생에게 욕설을 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다시 구설에 올랐다. 최근 임수경은 자신의 인생을 인터뷰 형식으로 엮은 책 '임수경 스토리'를 출간했다. 할 말이 꽤 있을 것 같았다.

北에 다녀온 뒤 나서기 싫어져

―파주에 사무실을 얻을 정도면 20대 총선 공천에 자신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저한테 절실함 같은 게 없나 봐요. 이번에 반드시 공천을 받고 총선에서 꼭 이겨야 한다는 그런 절실함 말이죠. 누구는 공천받으려고 새벽에 누구 집에 찾아가고 그랬다던데 저는 '뭐가 저렇게 하고 싶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나는 정치적인 사람이 못돼요. 나는 국회에서도 카메라 기자 옆에 앉아 있어요. 그러면 카메라에 찍히지 않으니까요. 남들은 다 당대표 옆에 가려고 하는데 나는 카메라에 찍히는 게 싫었어요. 89년 이후로 그렇게 됐어요."

―1989년 평양을 말하는 겁니까.

"트라우마까지는 아니어도 피해 의식이 있어요. 평양에 다녀온 직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몇 차례 갈등을 겪으면서 그렇게 됐어요. 1990년대에도 시민단체 행사 같은데 가면 자꾸 저를 맨 앞자리 가운데 세우려고 해서 사실 싫었어요. 나를 내세우는 걸 피하고 싶었거든요. 그때만 해도 어딜 가나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힘들었어요. 너무 싫었어요."

임수경이 평양에 갔을 때는 같은 또래 대학생으로 '당연히' 그를 지지했고, 그가 1990년 옥중에서 항소 이유서를 책으로 펴냈던 '어머니, 하나 된 조국에 살고 싶어요'를 읽었을 때는 그 순수한 열망에 공감했었다. 그러나 통일은 혈기로 되는 것이 아니었고 이른바 386세대는 꼰대나 아재 소리를 듣는 나이가 됐다. '임수경 스토리'에는 방북 이야기가 절반을 차지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그도 아직 대답할 것이 남아 있다는 뜻일 것이다.

―책에서 아직도 89년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에게 '아직도 그 얘기를 듣고 싶으냐'고 한다더니 그 이야기가 절반이나 되네요.

"내가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해도 임수경은 결국 89년에 평양에 갔던 대학생 임수경이라니까요."

北 관객 얼어붙게 한 '꽃다발 사건'

책에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꽤 실려 있다. 예를 들어 북한 혁명 가극 '꽃 파는 처녀'를 관람한 뒤에 출연진에 꽃다발을 주는 순서가 있었다. 다들 지주에게 모진 설움을 받던 주인공 꽃분이에게 줄 것을 기대했는데, 임수경은 지주 역을 맡은 배우에게 꽃다발을 줬다. 임수경은 '순간 장내가 조용해지면서 정적이 감돌았다. 꽃분이 역할을 했던 배우의 얼굴도 완전히 굳어버렸다'고 썼다.

―왜 지주에게 줬습니까.

"그 아저씨는 한 번도 꽃다발을 못 받아봤을 것 같았어요. 꽃분이는 맨날 받겠지요. 그런데 사람들 반응이 너무 뜨악하기에 깨달았죠.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아마 북한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일 거예요. 그때 나 혼자 그 공연장에 간 게 아니고 외국인들도 많고 외신기자들도 많았으니까 나를 통제할 수가 없었던 거죠." 임수경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북한이 경제도 성장하고 인권도 좋은 쪽으로 갔더라면 나도 이렇게 탄압받지 않았을 텐데…."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을 ‘변절자’라고 했다가 지탄받은 것 말입니까.

“그 사건은 억울한 면이 있어요. 아무리 국회의원이라고 해도 사적인 자리에서의 대화는 보호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솔직히 하태경 의원에게는 미안해요. 사과도 했고요. 친구인데 조심스럽게 말하지 않은 게 알려진 거잖아요. 그런데 ‘국회의사당 앞에서 화형해야 한다’는 식의 비난을 받으니까 정말 어쩔 줄 모르겠더라고요.”

―‘통일의 꽃’이었으니 국회의원으로 북한 인권운동을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요.

“그게 오히려 더 작위적인 것 같아요. 초선 의원으로서 그런 정치 활동을 하는 데는 어려운 면도 있었어요. 하여튼 국회의원 임기 시작하자마자 그 일이 터져서 너무 시끄러워지니까 아예 조용히 있으려고 노력했죠. 임수경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도 있겠지만 개인의 한계와 정당의 한계와…. 그래서 민생 문제에 집중하면서 의무 방어만 하려고 했어요.”

―책을 읽어 보면 여전히 북한에 대해 이른바 ‘내재적 접근’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북한 사람들이 유일하게 아는 남한 사람이 저예요. 임수경은 북한 사람들이 다 안다고요. 그런 임수경까지 북한을 비판 일변도로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종북(從北)’ 이야기가 나오는 것 아닙니까.

“저는 평양 갔을 때도 ‘북한 체제를 동경해서 온 게 아니다’고 말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종북이 아니라고요. 물론 북한 체제를 비판하려고 간 것도 아니었죠. 그렇지만 제가 북한에 다녀온 뒤로 탈북자가 크게 늘어났어요. 북한 사람들이 저를 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남쪽 대학생의 자유로움과 발랄함을 봤죠. 그때 이쪽에서도 저를 보면서 황당해할 만큼 제가 엉뚱한 행동과 말을 했죠. 남에서 온 여학생,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말을 쓰는 대학생을 보면서 분명히 북한 사람들이 변화됐다고 생각해요.”

―국회의원으로서도 적극적으로 통일과 관련된 일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자꾸 벗어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나의 일종의 원죄(原罪), 통일의 꽃, 거기서 벗어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절대로 안 돼요. 20대, 30대 때까지만 해도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게 안 되는 걸 알아요. 저는 오히려 북한에는 관심이 없어요. 북한은 제가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오히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북한에서 오신 분들에게 관심이 있어요.”

“국회의원 임수경은 89점”

임수경은 “국회의원 임수경에게 89점 정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떤 부분은 매우 우수했고, 또 어떤 부분은 잘하지 못했다고 했다. ‘매우 우수한’ 부분은 자신의 성실함이며, ‘잘못한 부분’은 얼굴 내밀고 자기 정치 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발의해서 통과된 대표적인 법안으로 용역 폭력을 제도적으로 막는 ‘경비업법’과 소수 지역 언어 교육을 지원하는 ‘특수외국어교육법’을 꼽았다. 통일과 관련해 ‘통일법제추진위원회설치법’을 제정하려고 했으나 국회에서 논의도 해보지 못하고 임기가 끝났다고 했다.

―국회에 있어 보니 왜 국회의원들이 욕을 먹는지 알게 됐습니까.

“국민은 욕할 대상이 필요해요. 욕먹는 것이 국회의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인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정치라는 것은 국가의 매우 중요한 영역이기 때문에 ‘욕먹는 짓을 뭐 하려 하느냐’며 내던질 수도 없어요. 국민은 정치인들이 뭔가 확 바꿔주기를 원하지만 정치는 한꺼번에 많은 걸 바꾸지 않아요. 그건 혁명이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게 정치예요.”

―부질없는 질문이겠지만 그때 만약 평양에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아주 평범하게 살았을 거예요. 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거든요. 초·중·고 선생님이었던 분들도 저를 전혀 기억 못 하실 거예요.”

―책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더군요.

“통일 문제는 대통령이 하는 거예요. 국민 목소리나 국회 결정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개성공단을 폐쇄하더라도 정부 조치 때문에 국민이 손해 보는 것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거죠. 북한의 핵실험이나 도발에 국민이 분노하더라도 대통령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북한과의 끈을 잇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책에 2000년 5·18 전야제 이야기는 한 줄도 없더군요.

“나중에 알았어요. 그 얘기도 하긴 했어야 하는데.”

―그때 한 행동이 옳았다고 여전히 생각합니까.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뭘 폭로하던 시대가 아니라 PC 통신 시대예요. 카페 회원 38명이 제 글을 봤어요. 그러고는 지웠는데 누군가 그것을 프린트했다가 다시 올리면서 내용이 달라지기도 하고…. 물론 대강의 내용은 사실이죠. 전야제 사회를 5시간 동안이나 보고 왔는데 선배들한테 욕을 먹었으니 이걸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 일 때문에 운동권 내부에서 기피 인물이 됐나요.

“그랬을 수도 있죠. 제 인생이 그래 왔어요. 89년에 평양 가면서 나를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으로 갈라지고, 2000년에 그 일 때문에 또 갈라지고, 국회의원 돼서도 말실수 하면서 또 갈라지고…. 결국 저를 지지하는 사람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 같네요.”

아들 잃고도 울 수 없었다

‘임수경 스토리’에는 그녀 가족의 기구한 삶들이 소개돼 있다. 경찰이었던 외할아버지와 큰외삼촌은 6·25전쟁 때 인민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그의 작은 오빠는 연세대를 휴학하고 1984년 군 복무 하던 도중 숨졌다. 군에서는 자살이라고 했으나 가족은 믿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임수경은 2005년 아들 재형이를 필리핀에 보냈다가 수영장 사고로 잃었다.

―작은 오빠의 의문사가 ‘운동권 임수경’을 만든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그때 고등학생이었는데요, 뭘. 그건 개인의 슬픔, 가족의 슬픔이었을 뿐이에요.”

―아들을 잃었을 때 울지 않았다면서요.

“저 말고 수습할 사람이 있었다면 울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혼자 그 일을 해야 했어요. 필리핀에 가서 보니까 제가 거기 주저앉아서 울 수는 없더라고요.”

―하늘을 원망했겠네요.

“많이 원망했지요. 우리 엄마는 그 일 이후 하느님도 없고 부처님도 없다면서 그렇게 오래 다니던 성당도 안 나가고 집에만 계세요. 그런데 우는 게 참 부질없어요. 운다고 뭐가 해결이 돼요? 저도 아주 오랫동안 울지 않았어요. 제가 우는 순간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질 것 같아서요.”

―아들 꿈을 꿉니까.

“세 번쯤 꿨어요. 한 번은 꿈에서 안아보기도 했어요. 좀 무거워졌더라고요. 첫 번째 꿈에서는 창 밖에 서서 오지 않더니 두 번째 꿈에서는 와서 안겼어요. 세 번째는 무슨 티베트 스님처럼 노란 옷을 입고 명상하는 것처럼 앉아 있더라고요. 그래서 스님들한테 여쭤보니 ‘좋은 데 갔나 보다’고 했어요. 그리고는 꿈에 안 나타나요. 살아 있었다면 지금 스무 살이네. 내가 평양 가던 나이 비슷하네요.”

국회 근처 식당에서 임수경과 밥을 먹었다. 식당 주인이 “우리 임 의원님 오셨네”하며 반겼다. 그에게 “임 의원이 평양 갔을 때 어떻게 생각했느냐”고 물었다. 그가 답했다. “철부지라고 생각했죠. 저렇게 막무가내식으로 가는 건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다들 그렇게 생각했어요.”

임수경은 헤어지기 전 이렇게 말했다. “우리 젊었을 때 괜찮았어요. 하고 싶은 말 다 했죠. 지금 대학생들 보면 부모에게 의존하고, 사회에 의존하고, 책도 처세술 책만 읽고…. 하긴 우리 사무실 막내가 85년생이에요. 내가 뭐했던 사람인지도 모르더라니까요. 시대가 바뀐 걸 인정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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