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의 사람人] 2년4개월간 나라살림 마치고 퇴임하는 김황식 총리의 소회

김윤덕 입력 2013. 2. 18. 10:56 수정 2013. 2. 1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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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울보 名재상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바위처럼 살고 싶었죠"

김황식 (65) 총리는 광주일고 시절 농구선수였다. 스타 플레이어도 아닌데 선배들은 그에게 주장을 맡겼다. 팀의 포워드로 경기를 조율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선수들 사이 일어나는 크고 작은 다툼도 김황식이 나서면 해결됐다. 김 총리는 "뛰어난 개인의 단독 플레이를 팀워크가 이긴다는 걸 일깨워준 농구부의 경험이 내 삶의 바탕이 됐다"고 했다.

민생을 최우선으로 한 탁월한 국정 운영과 겸손하고 소탈한 성품으로 "모처럼 명총리가 났다"는 칭송을 받았던 김황식 총리가 퇴임한다. 연평도 전사자 1주기 추모식에서 경호원의 우산을 물리치고 40분간 장대비를 맞으며 젊은 병사들의 희생을 눈물로 추모했던 김 총리는 정치 지도자의 표상을 '침묵의 언어'로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으며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최장수 총리다.

김황식 리더십의 키워드는 '조용한 소통'이었다. 광주법원장 시절 전 직원에게 매주 한 통씩 띄웠던 편지글 '지산통신'은 감사원장 시절 '삼청편지'로 이어졌고, 총리가 된 뒤에는 '연필로 쓰는 페이스북'이란 문패를 달고 전 국민에게 확장됐다. 국정 운영의 단상과 인간적 고민을 자필로 적어 내려간 총리의 소박한 편지는, 무슨 무슨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왁자지껄하게 했던 정치꾼들의 행태와 대조를 이뤘다.

"대통령이 계시는데 총리가 나서는 건 도리가 아니다"며 언론의 인터뷰를 거절해온 김황식 총리가 2년 4개월간 나라 살림 하며 겪은 이야기와 퇴임 소회를 조선일보 'Why?'에 처음 밝혔다. 취임 당시 "소나기가 아니라, 소리 없이 내리지만 대지에 스며들어 새싹을 피우고 꽃을 피우는 이슬비 같은 총리가 되겠다"고 했던 김 총리는, 이 시대가 원하는 지도자의 덕목은 "국가를 위해 자신의 정치적 이해를 뛰어넘는 용기"라고 했다. 도통 '재미'와는 거리가 먼 판사 출신 총리라는 선입견은 말 그대로 선입견이었다. "무(舞)는 몰라도 가(歌)는 좀 했다"며 웃던 김 총리는, 가수 김창완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를 애창하는 낭만주의자다. 인터뷰는 13일 오전 정부 세종청사 총리 집무실에서 이뤄졌다.

현장에 답이 있다

―세종시와 서울을 오가며 국정을 수행하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KTX로 오가고, 총리라고 가능한 한 편의를 봐주니 난 괜찮은데,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하는 우리 직원들이 불편하지요."

―설 명절에도 비공식으로 군산 나포의 노인요양원에 다녀오셨더군요.

"보육원, 장애시설 등 소외된 곳에 가서 그분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나누는 게 마지막까지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퇴임입니다. 취임 당시 대독총리, 의전총리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는데, 지금은 '명총리'라고들 합니다.

"상당 부분 과대평가됐지요(웃음). 소통을 위해 노력은 했습니다. 반드시 일치된 의견을 얻지 못하더라도 갈등의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통은 중요합니다."

―그 방식이 민생 현장을 살피는 것, 그리고 '글쓰기'였습니다.

"시간을 갖고 신중하게 생각한 뒤 내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게 글쓰기의 장점이지요. 그리고 제가 말 많이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웃음)."

―학창시절 '문청(文靑)'이셨지요?

"젊었을 때 나도 좋은 소설 한 편 써봤으면 좋겠다 생각은 했었지요. 습작도 좀 있지만 재주가 모자랐어요."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23만명이나 되더군요. 창덕궁으로 봄 소풍까지 다녀오셨고요.

"댓글 달아주는 분들을 직접 만나니 평소 잘 알고 지낸 듯 낯설지 않았어요. 글쓰기의 힘이지요. 오랫동안 암 치료를 받아온 주부는 내 글을 통해 위로를 받으셨다고 해서 감사했어요. 상주시청에서 올라온 여성 공무원과도 같은 공직자로서 진솔한 대화를 주고받았지요. 나의 소통 방식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생각에 반가웠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우문현답'이란 말이 총리실에 유행했을 만큼, 쪽방촌부터 태풍으로 제방이 무너진 낙도까지 소리 소문 없이 민생 현장을 다녔습니다. 삼청동 골목길에서 만난 재동초등학교 아이들도 공관으로 불러 함께 놀았다던데 사실입니까?

"날 보고 하도 다정하게 인사를 하길래 어른들만이 아니라 저 아이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러놓고 보니 다문화 가정의 아이도 있었지요. 내가 알지 못했던 어려움을 그 아이에게 들었어요. 우리 안방에도 들어오게 해서 집사람이 밥을 해서 먹이고 집에 피아노가 있으니 함께 쳐보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지요."

나는 정치하는 사람 아니다

김황식 총리는 소신 있는 발언으로 국회의원들을 당황하게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총리 인사청문회 때 부동시(不同視)로 인한 병역면제를 두고 끈질기게 시비를 거는 야당 의원들에게 "맡겨주면 열심히 하겠다는 것이지, 이 순간에도 내가 총리직을 탐하거나 원하는 것은 아니다"고 싸늘하게 반박했다. 지난 14일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도 강단을 보였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失政)을 성토하는 의원들을 향해 "물러나는 총리로서 정치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포문을 연 김 총리는 "이명박 정부가 시행한 정책 중에는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맞섰다.

그가 법원장 시절에 쓴 '지산통신'에 이런 글이 있다. '국회의원들의 많은 질문은 답변을 듣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자기의 주장을 펼치기 위한 것이니 그 취지에 맞게 응대해 드리되, 그들이 원하는 답변을 끌어내어 이를 활용하려는 의도적인 경우가 있으면 그때는 명백히 의견을 개진해 막아야 한다. 질의하는 의원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공감을 표시하되 견해가 다른 부분에 한해서는 내용은 단호하되 표현 방식은 부드럽게 대응해야 한다.'

―국회의원 다루는 노하우는 어떻게 익힌 겁니까?

"법원 행정처에 있을 때 국회를 자주 다니면서 국회가 움직이는 모습, 의원들의 행태를 많이 봤어요. 그런데 그게 국회에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에요. 일반 사회생활에서도 똑같이 해당하는 이치지요."

―페이스북에 '국회에 출석하는 일만 없으면 총리도 할 만하다'라고 쓰셨어요. 상대하기 제일 까다로웠던 의원이 있습니까?

"질의 내용이 나라 발전을 위해 도움되는 것이라면 상대방이 아무리 거칠어도 상관없어요. 다만 정치적 목적으로 자기 생각을 강요한다든가 총리나 장관을 골탕먹이려고 작정하고 나온 경우는 힘들지요. 거기에 감정적으로 응대하면 나 스스로 지는 거고, 그걸 지켜보는 국민이 불편해지니까 굉장히 자제를 하는데, 속으로는 '정말 못됐다'고 생각한 분들 있었어요. 그 이름을 거명하면 내가 지금까지 지켜온 원칙을 거스르는 게 되니 양해해 주시지요(웃음)."

―국정 장악 능력이 '고무골무'에서 나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총리실로 배달되는 각종 보고서를 서류가방에 들고 다니며 틈날 때마다 읽는다던데 사실인가요?

"고무골무는 판사 시절 판결문을 보느라고 사용했던 거고 지금은 아니에요. 보고서를 다 읽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죠. 다만 문제점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부분은 반드시 봅니다. 총리가 현안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면 국정 수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니까요. 법원에서 평생 기록을 봐온 요령이 있어서 그리 어렵진 않았어요. 신문 볼 때처럼 헤드라인으로 만족하는 부분이 있고 관심 있으면 더 자세히 읽고요."

―이명박 대통령이 가장 잘한 일이 김황식 총리 임명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대통령과는 늘 의견이 일치했나요? 대통령에게 쓴소리 한 적 없습니까?

"총리가 자기 소신을 당당히 밝혀야지요. 생각의 방향이 달랐던 몇 건이 있지만 밝힐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대통령과 총리의 의견이 다르고 합의가 안 돼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총리는 대통령 뜻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총리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이고, 또는 대통령과 총리의 신뢰가 깨진 것이 원인이라면 총리가 그만둬야지요. 다행히 대통령은 내 의견을 많이 존중해주셨어요."

―그렇게 답하시면 국민이 이명박 정부의 실정이라고 여기는 부분까지 총리가 덤터기를 쓰지 않을까요?

"나라를 위해 어떤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누가 더 이익을 보고 손해를 보느냐를 생각할 수 없지요. 그런 일로 밖에서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의식하고 일한다면 국정이 엉뚱한 방향으로 갑니다. 나는 정치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악한 약자' 보호할 필요 없다

―'총리의 눈물'에 많은 국민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페루 수력발전소 답사 중 헬기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의 유족을 위로하는 자리에서도 울먹이셨지요. 원래 눈물이 많은가요?

"글쎄, 많다고 해도 되지요(웃음). 내가 7남매의 막내인데 막내가 좀 여리잖아요. 형님들은 위쪽에 있고 내 바로 위, 또 그 위가 누님들이라 여성성이 강한가 봐요. 어릴 때 (장성에 계신) 부모님과 떨어져 (광주로) 유학을 해서 외로웠던 원인도 있을 거예요."

―반면 매우 단호한 면도 있더군요. 전국철거민연합회와 경찰 사이 충돌이 벌어진 '용산 사태'와 관련해 '악한 약자는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발언한 게 논란이 됐습니다.

"우리 사회가 계속해서 발전하려면 법과 원칙이 서야 합니다. 취약계층은 국가가 복지 등 여러 차원으로 뒷받침해야 하지만, 법치가 정치적 요인이나 복지적인 차원과 뒤섞여 버리면 나라가 혼란스러워져요. 엄정하게 다룰 것은 다뤄야지요. 좋은 게 좋은 거다 식이면 국가 발전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재직 시절 총리로서 가장 뿌듯하게 여기는 일이 무엇입니까?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G20 정상회담 등 경사가 많았지만, 대외의존도가 높고 수출에 의존하는 우리 경제 시스템에서 2년 동안 연속해서 무역 1조달러를 달성한 게 자랑스러워요. 1965년부터 시작된 해외건설 플랜트 수출의 누적 수주액이 5300억불이에요. 그중 52%가 이 정부 안에서 달성됐어요. 엄청난 성과지요. K팝과 드라마가 한류라고 하는데, 저는 우리 기업인들과 정부 정책, 부지런하고 다이내믹한 국민 자체가 한류라고 생각해요."

―4대강 사업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있습니다. 총리도 총체적 부실을 가져온 한 사람으로 지목됐고요.

"총체적 부실이란 표현은 과장입니다. 감사원도 일부 문제를 지적한 것이지 총체적 부실이라고 한 게 아니에요. 대규모 사업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시정·보완할 점이 나오고, 지금까지 계속 보강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수년 내 확실히 드러날 겁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할 때 '이게 사치 아니냐' 했지만 세월이 가면서 잘한 일이다 평가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만 논란이 있지 유엔환경기구인 UNEP나 OECD에서는 아주 모범적인 물관리 사업으로 평가합니다. 태국에는 12조원 상당의 물관리 기술을 수출하고요. 4대강 비판은 상당 부분 왜곡되고 침소봉대되었습니다."

―총리로서 가장 큰 고비는 '한·일정보보호협정'의 밀실 추진 의혹으로 국회에 해임안이 상정됐을 때인가요?

"그 일과 관련해 총리로서 위법을 했다든지, 어떤 부끄러운 짓을 한 것은 전혀 없어요. 다만 일 처리 부분에서 정치권이나 언론, 국민에게 오해를 주었다고는 생각합니다. 국민 정서를 좀 더 잘 헤아렸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국가로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고, 그 일로 곤욕을 치렀으나 고비였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새 총리 후보로 다시 법조인이 지명됐습니다. 대통령들이 법조인 출신의 총리를 선호하는 것은 개혁 마인드가 적고 정치적 야심이 없기 때문이라던데 동의하십니까?

"법조인이 비교적 원칙을 갖고 합리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경향이 있지만, 개혁 마인드가 적다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어요. 개혁 마인드 없이 고분고분해서 어떻게 국정을 수행합니까?"

―새 정부의 지도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입니까.

"국가의 장래와 진정한 국익이 무엇인지를 아는 통찰력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국민에 대해 고통 분담이나 협조를 구할 때 명분 있게 설득하는 지혜와 용기도 필요하지요. 나라는 영속해서 발전해야 하는데 자기 시대에만 집착하면 바람직하지 않아요."

―복지 정책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런 대목도 있지요. 페이스북에 독일 슈뢰더 전 총리에 대해 쓴 글이 있어요. 자기가 정치적으로 손해를 보고 당장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국가의 장래 이익에 부합한다면 국민의 생각을 뛰어넘는 결단을 내리는 게 좋은 지도자입니다."

―대한민국 총리로서 자신에게 점수를 주신다면 100점 만점에 몇 점 주시겠습니까?

"B마이너스나 C플러스 정도 되지 않을까요(웃음)?"

거지를 손님처럼

김황식 총리는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중학교를 졸업한 부친은 향교를 관리하는 전교였다. 김 총리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배운 것이 이웃, 특히 약한 사람에 대한 배려"라고 했다. '지산통신'에 어머니에 대해 쓴 글이 있다. '어릴 적 마루에서 놀고 있노라니 거지가 구걸하러 대문간을 들어섭니다. 어머니, 거지 왔어요, 라고 소리치니 어머니는 쌀 한 움큼을 그릇에 담아 나오시며 나직하게 '다음부터는 손님 오셨다고 해라' 하시는 거였습니다.'

―어머니를 '큰 스승'이라 표현하셨더군요.

"학식은 없지만 지혜가 뛰어난 분이었죠. 좋은 물건, 좋은 음식이 생기면 어머니는 손님이 오면 써야 한다며 감추셨어요. 누구와 다툼이 생길 때에도 나보다 강한 사람이면 자기주장을 확실히 해서 가리되, 약한 사람이라면 양보하고 져주라고 하셨지요. 학교 폭력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밥상머리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해요. 부모·자식 간에 오가는 대화가 책 한 권 이상의 가치를 갖지요. 라디오에서 들으니 사우디아라비아 속담에 '손님이 오지 않는 집에는 천사도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고 해요. 우리 어머니 하신 말씀과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은 의사를 권했다던데, 왜 법학을 택했습니까?

"형님 한 분이 의사였어요. 또 좌우 이념 대결의 상처가 있던 때라 판검사가 되면 그런데 휩쓸릴까 걱정하셨지요. 그런데 내가 형님 병원에 가서 수술하는 걸 봤더니 무서워서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겁쟁이였거든요(웃음). 그러자 다른 형님이 법대를 권유하셨지요."

―농구 때문에 대학(서울대 법대)을 재수했다는 말은 뭡니까?.

"고3 때인데, 전남체육회에서 전남체육대회에 광주일고는 농구로 출전하라는 지시가 왔어요. 이미 농구부는 없어진 상태이니, 과거에 농구했던 사람들 다 모이라고 한 거죠. 시합 마치고 돌아오니 대입시험 준비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더라고요. 낙방했지요(웃음)."

―농구 경기를 보면 초반에 대충 어느 팀이 이길지 아신다면서요?

"개인 플레이어들의 단독 드리블이 많은 팀과 여럿이 빠른 패스로 기회를 만들어가는 팀이 있어요. 그럴 땐 처음부터 끝까지 팀워크로 경기를 풀어간 팀이 이깁니다. 스포츠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도 한두 사람의 개인 플레이가 아니라 협업 플레이로 갈 때 갈등이 줄고 행복해질 수 있지요."

법의 본질은 '배려'

김황식 총리는 '법의 본질은 배려'라고 했을 만큼 '배려'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다. 결혼 주례사에서조차 배려를 당부한다. 공직 생활 40년 동안 관료사회의 관행도 여럿 깼다. '차렷, 경례' 하는 절차를 없앤 것, 직원들 줄 서게 해 인사받지 않는 것, 심지어 사람들과 헤어질 때 '손 흔들지 않기'가 김 총리의 신조다. "건방져 보일까 봐서"다. 총리가 퇴근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하는 청사의 경비대과장, 방호실장에게도 '대기하지 말고 자유롭게 퇴근하라'는 명을 내렸다.

―위계가 엄격한 관료사회에서 관행을 깨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요.

"권위적이고 불필요한 관행을 바꿔야 한다고 다들 느끼는데, 그 일부를 내가 이행한 것뿐이에요. 변혁이라고 할 것도 없지요. 물론 총리의 의전을 어느 정도까지 문턱을 낮춰야 하느냐는 것은 개인 생각에 따라 정할 수 없지요. 가령 외국 손님을 맞을 때 그레이드(등급)에 따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느냐, 방 앞에서 배웅하느냐가 정해지는데, 나는 방문 앞에서 잘 가시라고 하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아요. 그래서 나중에는 이야기를 하는 척하며 슬금슬금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나갑니다(웃음)."

―영화 '레미제라블'은 보셨습니까.

"세종시에 머물면서 주말에 대전 가서 봤어요."

―법의 수호자로 등장하는 자베르 경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베르는 '법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인물이에요. 나는 법의 본질은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법은 자기 권리와 이익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의 권리와 이익을 존중하기 위해서 만든 거지요. 그런 점에서 자베르 경감은 법의 본질에 대해 공부가 덜 된 사람이에요(웃음). 법은 인간을 위해 만든 것인데, 자베르는 자신을 법의 노예로 만들었으니까요."

―감사원장 시절, 사회복지 예산을 횡령한 40대 임부에 관해 쓴 글이 있더군요. 중죄인이지만 모성을 지닌 부녀자로서 겪을 고초를 안쓰러워하는 대목이 인상 깊었습니다.

"엄정한 법 집행을 원칙으로 하되,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야 한다는 뜻에서 쓴 글입니다. 그런 자세를 가져야 균형 잡힌 판단과 해결책이 나오고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판사 시절 국보법으로 구속된 22세 여공에 대한 판결이 화제가 된 적 있습니다. 법정에서조차 폭력혁명을 외치는 여성에게 '피고인이 신봉하는 사회주의는 200여 가지 종류의 사회주의 가운데 가장 낡은 구닥다리로서 우리 헌법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출소하거든 다른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공부해보기 바란다'고 하셨지요. 지금도 계속되는 좌우이념 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수와 진보는 이분법적으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에요. 인간이 더불어 살기 좋은 세상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에 대한 방법론의 차이일 뿐이죠. 보수는 자유와 성장에, 진보는 평등과 분배에 각기 방점을 찍는 것이지, 시대 상황에 따라 그것은 서로 넘나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는 상대를 배척하기 위한 원리로만 작동해요. 그 밑엔 증오가 깔려 있고요. 보수가 자기 기득권에만 연연한다면 추해지고, 진보가 현실은 모르고 이상만 추구한다면 철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스스로 '중도저(低)파'라 하셨습니다. 낮은 곳을 본다는 뜻에서.

"감사원에서 내가 '극우는 추하고 극좌는 철없다'고 강연했더니 어떤 보수단체가 와서 피켓 시위를 했지요. 이명박 정부는 우파 정권이고 총리도 우파라는데 우파가 와서 데모를 하니 아이러니했지요(웃음). 그런데 나는 이명박 정부가 결코 치우친 우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중도죠. 그래서 내가 대통령과 맞았던 것이고. 기업 프렌들리한 정부였지만 동반성장정책이나 재래시장 활성화, 서민금융정책 등 서민들 위해서도 열심히 일했어요. 복지가 얼마나 늘어났습니까."

―'내 속에는 마그마가 끓고 있다'고 하신 적 있지요?.

"어느 기자가 나를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라고 표현하길래 '총리가 마음씨만 좋은 할아버지여야 되겠어요?' 했지요. 겉은 눈 덮인 휴화산으로 보이지만 언제 분출할지 모르는 마그마가 속에서 끓고 있다, 그만큼 열정이 있고, 의욕이 있고, 감성이 넘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웃음)."

―나이 듦이 서글프지 않습니까?

"서글프기보다도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아, 이분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해요. 더구나 공직을 벗어나면 종착역에 다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 테니."

―인생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죠(웃음). 젊을 때는 내 뜻대로, 계획대로 돼가는 것 같지만 인생의 중후반으로 가면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돼요. 그러니 일희일비할 이유가 없어요. 순리의 물결에 몸을 맡기고 살아야지요."

―가슴에 늘 시(詩) 한 수 품고 다닌다 들었습니다. 퇴임을 목전에 둔 요즘 어떤 시를 새깁니까?

"오래된 시인데, 혹시 유치환의 '바위'라는 시 아세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청년 시절 품은 이 시가 여태 나의 좌우명입니다."

☞金총리가 평생 간직한 유치환의 詩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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