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백화점 붕괴 때 30명 신원 못밝혀 恨 의대 교수직 접고 국과수로 이직

박상기 기자 2012. 11. 3.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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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주년 '과학수사의 날' 대상 받은 정낙은 수석법의관

2일 오후 2시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관 1층에 있는 사무실에서 정낙은(55) 수석법의관은 컴퓨터를 켜고 전날 밤늦게까지 작업했던 '종합신원확인시스템'의 모듈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는 불과 1시간 전, 서울 미근동 경찰청사에서 열린 제64주년 과학수사의 날 기념식에서 법의학 분야 대상을 받고 돌아온 길이었다. 정 법의관은 13년 전, 모두가 탐내는 의과대학 교수 자리를 박차고 국과수에 들어와 국내 신원 확인 분야의 체계를 확립한 이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정 법의관은 17년 전인 1995년 처음 국과수 법의관이 됐다. 그로부터 17년간의 세월 동안 국내외에서 발생한 김해 항공기 추락 사고(2002), 대구 지하철 참사(2003), 동남아 쓰나미(2004), 캄보디아 항공기 추락 사고(2007), 이천 냉동창고 화재(2008) 등 대형 재난 현장엔 언제나 정 법의관이 있었다.

동남아 쓰나미가 났을 때 수십 개 안치소를 돌아다니며 한국인 시신 20구를 모두 찾았다. 1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나라 중 가장 빨리 단 한 구의 유실도 없이 모두 찾아낸 것이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때는 화재로 한 줌밖에 남지 않은 유골에서 나온 DNA로 시신의 주인을 찾았다.

"법의학은 죽은 사람을 다루지만, 산 사람을 위한 학문이기도 합니다. 죽은 한 사람의 곁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 때문이죠."

정 법의관이 이토록 신원 확인에 힘쓰게 된 이유는 그가 국과수에 들어와 처음 경험했던 사건 때문이다. 1995년 7월, 입사한 지 두 달밖에 안 된 신참 법의관은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서 500구의 시신과 마주했다. 정 법의관은 "두 달 동안 밤낮 안 가리고 시신 신원을 확인했는데 끝내 500구 중 30구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돌려보내지 못했다"며 "내 평생을 바쳐 신원 확인 분야를 체계화하고 정립시키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가 1997년 돌연 국과수에 사직서를 내고 의과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주변 사람 모두 그가 사회적 지위와 편안한 삶을 찾아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 법의관이 2년 8개월 만에 국과수 특채 시험에 다시 지원했다. 그는 "새로 생긴 의과대 기틀을 잡는 데 도움을 달라는 은사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 간 자리였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돌아오겠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던 건 내가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시 돌아온 정 법의관의 활동 영역은 현재에서 과거까지 넓어졌다. 그는 "제주 4·3사건 현장에서 나온 유골의 주인을 찾는 일은 슬프고도 뜻깊었다"며 "신원 확인 작업이 과거 사람들의 가슴에 맺힌 한을 푸는 데 도움이 돼 뿌듯했다"고 말했다. 법의학과에서 나이로는 첫째, 둘째를 다투지만 정 법의관의 열정은 여전하다. 15년 넘게 정 법의관과 함께 일한 구형남 법의관은 "정 법의관과 함께 일하면 젊은 사람들도 다 나가떨어진다. 그 시작은 정말 피곤하고 괴롭지만 그 끝은 가장 뿌듯하게 해주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요즘 정 법의관은 종합신원확인시스템 제작에 몰두 중이다. 신원 확인에 이용되는 지문이나 치아, 유전자 등을 종합적으로 다룰 수 있는 첨단 시스템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는 "삼풍백화점 때 가슴에 남았던 30구가 여기까지 오게 했다. 앞으로는 가족 품으로 못 돌아가는 슬픈 시신은 없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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