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냐, 쿠데타냐..5·16 상반된 기억

2011. 5. 15. 17:5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5ㆍ16'만큼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한국 현대사의 사건이 또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대한민국 성공의 역사, 그 서막을 알린 진정한 혁명이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옥죄었던 군사독재의 시작을 알린 쿠데타였다. 매일경제가 5ㆍ16 50주년을 앞두고 만난 두 사람의 인생사에도 대한민국 성공의 역사와 군사독재의 아픔이 녹아 있었다. 5ㆍ16을 혁명으로 인정하든 쿠데타로 인식하든 두 사람의 인생에 녹아 있는 한국 현대사는 그 자체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역사 그 자체다.

◆ '베트남 참전'정진호씨 "보릿고개 해결한 결단"= "5ㆍ16은 박정희 대통령이 결단을 내렸던 진정한 혁명이었습니다. 1960년대 매년 3~5월에 찾아왔던 보릿고개는 겪어보지 않았던 사람은 그 처절함을 모릅니다. 제가 이처럼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성공한 사업가로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5ㆍ16혁명으로부터 시작된 대한민국의 경제개발이 성공했기 때문이겠죠." 홍삼 관련 식품을 만들어 파는 '홍삼나라'의 대표이자 대한민국 베트남참전 유공전우회 서울시지부 회장을 맡고 있는 정진호 씨(66)는 5ㆍ16이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1966년 귀국했지만 호남 출신인 그에게 취직은 쉽지 않았다.

서울 용산시장에서 배추잎을 주워다 팔며 11명 식구를 먹여살릴 방법을 찾아나섰다.

때마침 베트남 파병의 대가와 각종 차관으로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면서 유통망이 발달했고 농수산물시장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경제발전 과정에서 서울로 몰린 직장인들의 소비도 늘어났다.

열심히 일한 덕에 '동화청과'의 7대 회장을 맡아 상인관리를 하면서 유통전문가로 이름을 날린 정 회장은 1985년 가락시장이 생긴 뒤에도 지속적으로 유통업무에 종사하다 2000년 정년퇴임을 하면서 '홍삼나라'를 설립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가 극복되면서 '공기업 민영화'와 '웰빙 열풍'이 불지 않았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사업이었다. 최근 고려대학교와 '홍삼 막걸리'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정 회장에게 5ㆍ16은 인생을 바꿔놓은 혁명이었음이 분명했다.

◆ '민청학련 연루'정화영씨 "경제발전 개인 공 아냐"=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절 경제가 발전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게 박 대통령 개인의 공은 아닙니다. 5개년 경제개발계획은 장면 정권의 계획을 계승한 것이었고, 민주주의 정부에서도 그러한 개혁은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사회 발전에 있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도 필수적인데,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한 것이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모진 고문을 겪고 6년간 옥살이를 하다 최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정화영 씨(62)에게 5ㆍ16은 대한민국의 정상적인 발전 궤도를 틀어버린 명백한 '쿠데타'였다. 경북 예천 농사꾼의 아들인 정씨는 어릴 때부터 상위권 성적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1967년 경북대로 유학을 갔고, 1968년 부정선거 규탄운동에 참여하면서 저항을 시작했다. 1969년 3선 개헌반대 투쟁을 하던 중 강제 입영된 정씨는 군대에서 결핵을 얻고 1972년 8월 말에 제대했다. 1973년 3월에 복학해 후배들과 만나 유신반대 투쟁에 나섰다.

정씨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동료 이름을 대라'는 경찰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은 것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길이기도 했다. 많은 선배들이 자기 의사를 표현했다는 것 때문에 사형을 당했다.

1981년 석방되고 나니 이미 집안은 풍비박산 난 상태였다. 정씨의 형은 직장을 계속 옮겨다녀야 했고 정보기관의 사찰을 받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서점을 차려 그럭저럭 살았지만 IMF 외환위기로 그마저 어려워졌다. 정씨는 "IMF는 '박정희 경제개발 모델'의 모순이 폭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고승연 기자 / 배미정 기자 / 사진 = 박상선 기자 / 이충우 기자] [화보] XXX컵 가슴 가진 '거유女' 무게만 22kg

서점가 '예쁜 엉덩이' 열풍 부는 이유는?

85억짜리 미국 랩퍼가 타는 섹시한 이건희 車

스페인 누드 헬스클럽 화제…'운동이 될까?'

'나가수'에 집착하는 가수들, 이유있었네

김나영 '5년 전 헤어진 남친에 아직 미련'

'우결' 김원준-박소현 알콩달콩 신혼여행에 시청자들 "부러워"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BA도 모바일로 공부한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