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서명까지 위조했다

이태진 | 서울대 명예교수·한국사 입력 2010. 6. 3. 17:26 수정 2010. 6. 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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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황태자 마중 나가는 순종 황제 마차. ⓒ연합뉴스

올해는 한·일 병합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910년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이후 36년간 치욕스러운 식민 통치를 받아야 했다. 1945년 광복이 되었지만 식민 지배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한·일 양국에 깊은 앙금으로 남아 있다. 지난 5월11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교수 등 한·일 양국의 지식인 2백14명은 '한·일 병합 조약은 무효이다'라는 내용의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 가운데도 '왜 조약이 무효인가'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 시사저널 > 은 지난호에 이어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기고를 통해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조약이 왜 무효인지를 알아본다.

'제2차 일한협약'(보호조약)의 한·일 양국어본 비교(왼쪽). 한국어본의 끈이 일본어본과 같은 청색이다. 일본어본은 '의정서'처럼 '재한국일본공사관' 용지를 사용했지만, 한국어본은 '한국 외부' 표시가 없는 적색 괘지이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① 보호조약 강제의 현장, 일본이 남긴 강제 증거

'제2차 일한협약'(을사륵약)은 가장 중요한 주권인 외교권을 빼앗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측의 저항은 어느 때보다 컸고, 일본측의 강압도 가장 난폭했다. 일본은 총리대신을 네 번 지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보내 현장을 지휘하게 했다.

1905년 11월15일 이토가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이 자리에서 세 시간이 넘도록 쟁론이 벌어졌다. 일본의 요청을 들은 고종 황제는, 그렇다면 한국은 아프리카의 토인국이나 오스트리아에 병합된 헝가리 신세가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절대로 이에 응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토는 외부대신에게 협상에 임하라고 지시해주기를 협박조로 거듭 말했지만, 황제는 이런 중대사는 정부에서도 절차가 있고 중추원과 일반 신민의 의견까지 들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거부했다. 이토는 전제국가에서 황제의 뜻 외에 다른 무슨 절차가 필요하냐고 폭언하면서 협상 지시를 거듭 촉구하고 물러났다.

대한제국의 '의정부회의 규정'(최종 규정, 1904년 3월4일자)에 따르면, 조약은 외부대신이 상대국의 제안을 접수해 의정부 회의에 회부해 의정(또는 참정)이 토론을 주재해 다수 의견으로 회의록을 작성해 황제에게 재가를 구하는 한편, 중추원에도 동의를 구하도록 되어 있었다. 11월16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겐죠(林權助)는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협상안을 제출했다. 고종 황제와 대신들은 곧 회동해 이 안건은 회의에 아예 회부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11월17일 아침부터 일본 공사는 한국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으로 초치해 제안을 수락할 것을 회유·압박했다. 대신들이 응하지 않자 하야시 공사는 황제와 직접 의논할 것을 제안하면서 황제의 거처인 중명전(重明殿)으로 이동했다. 황제와 대신들은 간담회 형식으로 다시 만나 계속 거부할 것을 다짐했다. 오후 6시께 하야시 공사는 이토 특사가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 대사가 직접 나설 것을 요청했다. 이토는 종일 한국주차군 사령부(현 웨스틴조선호텔 건너편에 있던 대한제국의 영빈관 대관정을 무단 점거해 사용)에서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쯔(長谷川好道)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토는 이 전갈을 받고 하세가와와 함께 헌병들을 거느리고 중명전으로 갔다. 좁은 입구와 마당은 일본군 헌병들로 가득 차다시피 했다.

'한국 병합 조약'의 한국측 전권위임장. 국새가 날인되어 있고 그 위에 순종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보인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이토는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했지만, 황제는 대사와는 더 할 얘기가 없다고 거절했다. 이토는 퇴궐하려는 한국 대신들을 불러 세워놓고 한 사람씩 심문조로 찬반 의견을 물었다. 이토는 반대 의견에 대해서도 엉뚱한 토를 달아 찬성으로 간주해 찬성자를 다수로 만들었다. 이완용이 조약의 시한을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라고 명시하고, '한국 황실의 안녕을 보장한다'라는 구절을 넣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전날 이토와 짠 각본이었다. 이토는 반대자는 참정(한규설)과 탁지대신(민영기) 두 사람뿐이라고 선언하면서 이완용의 제안을 반영해 조약문을 새로 쓰게 했다. 이즈음 통역관 마에마 교오사쿠로 해금 헌병들을 데리고 한국 외부에 가서 외부대신의 직인을 가져오게 했다. 새로 쓴 조약에 날인을 마쳤을 때는 11월18일 새벽 1시 30분께였다. 외교권 이양이라면 '조일 수호 조규'처럼 한국 황제의 비준서가 반드시 첨부되어야 하는데도 이 조약에는 외부대신 직인만 찍혀 있을 뿐이다.

일본측은 억지를 부리던 중에 결정적인 강제의 물증을 스스로 남기고 있는 것을 몰랐다. 한국측의 손으로 작성되고 철해져야 할 한국어본의 조약문이 일본공사관측에 의해 처리된 증거가 남겨졌다. 1년여 전의 '의정서'만 해도 조약문은 각기 외교 업무를 주관하는 양측의 기관이 주관해 처리되었다. 즉, 한국은 '韓國外部', 일본은 '在韓國日本公使館'이라는 글자가 인쇄된 용지를 사용하고, 각기 서로 다른 끈으로 그 문건들을 철해 교환했다. < 사진 1 > 한국측은 황색, 일본측은 청색의 끈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때는 일본어본은 '의정서' 때와 같은 용지와 끈을 사용했지만, 한국어본은 기관명이 인쇄되지 않은 적색 괘지에 일본측이 사용한 청색 끈으로 철해져 있다. < 사진 2 > 이것은 일본공사관측이 한국어본까지 직접 챙겼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귀국 후 천황에게 올리는 보고서의 내용까지 조작했다. 추밀원 비서실장(都築馨六)이 작성한 보고서의 초고(일본 국회 헌정 자료실 소장)에는 이토 특사가 한국 황제를 알현했을 때의 분위기를 '한국 황제는 이번 조약에 찬성하지 않아'라고 적었다. 그런데 '찬성하지 않아'의 구절 위에 흑색 선을 긋고 '찬성하지 않을 수 없어'라고 고치고 한국 황제가 처음부터 협조적으로 임한 것으로 내용을 바꾸었다. 이런 조작 후에 '황제 협상 지시'를 정론처럼 삼아 한국 정부의 < 官報 > 에 이 조약을 '한일 협상 조약'으로 게재하게 하는 한편, 한·일 양측의 공식 기록들을 모두 이 각도에서 작성하도록 했다.

(왼쪽) 이탈리아의 사진 잡지(1907년 8월4일자)의 표지 사진. '신황제' 대역의 젊은 환관이 '구황제' 대역 환관으로부터 양위를 받고 막 용상에 올라앉아 있다. 앞쪽에 일본 장교 복장의 인물이 보인다. (오른쪽) 순종 황제 이름자 서명 위조 상태. 하나여야 할 필체가 여섯 가지 정도 된다. 통감부 직원들이 각기 소관별로 위조 처리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② 고종 황제 퇴위 강제, 뒤이은 순종 황제 친필 서명 위조

고종 황제는 '제2차 일한협약'이 강제되자 곧바로 독일,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 수교국의 국가 원수들을 상대로 조약 무효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906년 1월 말에 외교권 실행 기구로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이토는 고종 황제가 1907년 6월에 비밀리에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3인을 파견하자, 이를 구실로 퇴위를 강제했다. 황제는 이를 거부했지만, 일본 정부는 7월20일에 환관 두 명을 신·구 황제의 대역으로 동원해 양위식을 거행했다. < 사진 3 >

이토는 7월24일에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통감이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직접 관여하는 체제를 만들기 위한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퇴위 강제와 함께 추진된 것이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절차를 밟는 것이 될 수 없었다. 한국 황제가 퇴위를 거부하고 황태자가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전권 위임과 같은 절차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이 조약은 말미에 두 사람이 '각기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 조인한다'라고 밝히고 있지만, 신·구 황제 어느 쪽도 위임을 허락해준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이 조약은 통감이 나서 대한제국의 통치 체제를 통감부의 것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한국 병합 조약' 전권위원들의 기명 날인 상태.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황제와 황태자는 이토의 강압에 오래 맞섰다. 8월2일에 통감부가 융희(隆熙)라는 새 연호를 공표했지만, 황태자는 나서지 않았다. 일본은 황태자의 이복동생인 10세의 영친왕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그를 인질로 삼는 계략으로 황제를 압박했다. 일본의 황태자가 먼저 서울을 방문하는 것으로 계략이 가시화되자 고종 황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황제는 11월15일 종묘를 방문한 다음 경운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황태자(순종)가 있는 창덕궁을 들렸다. 3일 뒤 황태자가 종묘를 찾고 선대왕들의 신위 앞에서 황제의 위에 오르겠다는 서고(誓告)를 올렸다.

이때 통감부는 다시 기묘한 계략을 부렸다. 황제의 서고문에 이름자를 친필로 기입하는 난을 만들었다. 새 황제가 '李拓'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여기에 써넣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이날부터 황제의 결재 방식을 황제가 이름자를 직접 쓰는 친서(親署) 제도로 바꾸었다. 이 방식은 일본에서 명치유신 이래 해 오던 것이었다. 서고가 끝나자마자 통감부의 직원들은 서고문을 넘겨받아 이날부터 1910년 1월18일까지 2개월간 61건의 문서에 황제의 이름자 서명을 흉내 내어 안건들을 처리했다. < 사진 4 >

이 문건들은 대한제국의 정부 조직과 재판소, 감옥 제도 등을 통감부 감독 체제로 바꾸는 것들이었다. 공문서 위조 행위가 내정권 탈취에서도 대규모로 행해졌다.

'한국 병합 조약'의 한국 황제 '칙유'(조선총독부 홍보용). 국새가 아닌 것이 찍히고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없다.

③ 병합 조약에 순종 황제는 서명하지 않았다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한 후 무력 투쟁을 벌이는 의병들의 기세는 국내외에서 날로 높아갔다. 1909년 6월에 이토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통감 자리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10월에 일본의 만주 진출에 한몫하고자 하얼빈으로 갔다가 거기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본거를 둔 대한의군의 참모중장 안중근이 이끄는 특파대에 의해 처단되었다. 일본 군부는 이토가 통감에서 물러나기 직전에 한국 병합에 대해 이토도 찬성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본 군부는 하얼빈 사건 후 배후 조직에 대한 철저한 탐문 조사를 마치고 1910년 3월에 안중근을 극형에 처한 뒤, 6월에 '한국병합준비윈회'를 발족시켰다. 병합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검토하고 문건들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안중근 사건에 대한 조사를 주관한 육군대신 데라우찌 마사다케(寺內正毅)가 7월 하순 통감으로 부임해 병합 집행에 나섰다.

일본은 병합 조약만은 정식 조약의 요건을 다 갖추려고 했다. 준비위윈회는 한국측의 이름으로 낼 문건들도 모두 준비했다. 데라우찌는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사전에 협조를 당부한 뒤, 8월22일에 위임장부터 내놓고 이것을 순종 황제에게 가져가서 서명과 날인을 받아오라고 했다. 황제는 이완용 외에 친일 분자 윤덕영, 민병석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시간 이상 버텼다. 그것은 침묵 시위였다. 창덕궁 낙선재에 갇힌 몸이 된 그에게는 이미 저항할 아무런 수단이 없었다. '大韓國璽'라고 새겨진 국새를 찍고 그 위에 자신의 이름자를 직접 썼다. < 사진 5 > 이완용은 이를 받아들고 남산 아래 통감 관저로 달려갔다. 데라우찌가 내놓은 조약 본문에 기명 날인했다. < 사진 6 > 그런데 데라우찌는 다시 각서 하나를 내놓았다. 병합의 사실을 알리는 양국 황제의 조칙을 언제든지 발표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은 체결과 동시에 한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 비준 절차를 밟을 시간이 없으므로 병합을 알리는 조칙의 공포로 대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신한민보(新韓民報) 1926년 7월18일자에 실린 순종 황제의 유조. '병합 인준은 일본이 제멋대로 한 것이요 내가 한 바가 아니다'라고 밝히고 "여러분들이여 노력해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라고 끝맺었다.

양국 황제들의 조칙은 8월29일에 반포되었다. 그런데 한국 황제의 조칙은 '칙유'로 이름이 바뀌고, 위임장과는 달리 국새가 아니라 '勅命之寶'라고 새겨진 어새가 찍혔다. 그 위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황제의 이름자 서명도 없다. < 사진 7 > 이 어새는 황제의 행정 결재용으로서 통감부가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킬 때 빼앗아간 것이었다. 따라서 이 날인은 순종 황제의 의사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순종 황제는 1926년 4월26일에 운명하기 직전에 곁을 지키고 있던 조정구(趙鼎九)에게 유언을 구술로 남겼다. 자신은 나라를 내주는 조약의 조칙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구술 유언 조칙은 멀리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이 발행하던 신한민보에 실렸다. < 사진 8 > 이 진술은 '칙유'의 상태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한국 병합 조약'만은 정식 조약의 구비 조건을 다 갖추려 했던 일본측의 계획과는 달리 비준서를 대신할 한국 황제의 조칙은 발부되지 않은 것이 되었다.

'한국 병합 조약'의 한·일 양국어본 재질 비교. 앞표지, 첫 페이지 그리고 뒤표지(왼쪽부터).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일본측은 병합 조약에서도 결정적인 강제의 흔적을 남겼다. < 사진 9 > 에서 보듯이 이 조약은 한·일 양국어본이 똑같은 용지에 똑같은 필체로 작성되고 똑같은 끈으로 묶여져 있다. 조약이 한쪽 의사로 강제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세계 조약사상 이런 예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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