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딸' 논란 최초로 입 연 이수자씨"그 고통 이해하지만 윤이상을 팔지 마라"

2012. 1. 2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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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통영의 딸 3모녀를 북한 지옥에 내다 판 대가로 호강한 윤이상. 그 가족까지 통영-평양-독일 오가며 호강한다는 게 웬말이냐? 인신매매 간첩을 우상화하는 곳이 통영이더냐. 윤이상을 몰아내자."(대한민국 대청소 500만야전군)

 푸른 남해 바다를 고즈넉이 품어안은 경남 통영이 앓고 있다. 유치환·김춘수 등 수많은 문인과 음악가를 배출한 '동양의 나폴리'에선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간첩 딱지 붙이기 놀이가 한창이다. 주인공은 바로 통영이 배출한 세계적 작곡가 고 윤이상. 현존하는 세계 5대 작곡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는 이 현대음악의 거목이 세상을 떠난 지 16년이 흘렀건만, 희망찬 흑룡의 해에도 '상처 입은 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윤이상의 이름 석자가 다시금 입에 오르내리게 된 직접적 계기는 지난해 여름부터 일부 보수 시민·종교단체들이 이곳 출신인 신숙자(69)씨와 두 딸 오혜원(35)·규원(33)씨 3모녀가 함경남도 요덕 정치범수용소에서 살고 있다며, 이들을 북으로 보낸 장본인이 윤이상이라고 지목하면서부터다. 이른바 '통영의 딸' 논란이다. 이들 3모녀는 1980년대 독일 유학생 오길남 박사의 부인과 딸들로, 오 박사 가족은 1985년 독일을 떠나 입북했다가 이듬해 오씨만 홀로 탈출해 1992년 귀국한 바 있다. 오씨는 이후 저술과 각종 강연을 통해 윤이상이 자신과 가족들에게 입북하도록 직접 권유했으며, 또 자신이 북한을 탈출한 뒤에도 윤이상은 북에 남은 가족의 생사를 위협하며 자신에게 북에 있는 가족 품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압박했다는 주장을 펴왔다.

 논란이 불거진 뒤에도 국내 언론과 접촉을 피한 채 침묵을 지키던 이수자(85)씨와 딸 윤정(62)씨 등 윤이상 유족은 <한겨레>와 단독으로 만나 처음 입을 열었다. "윤이상 선생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오셨습니까?" 이씨와의 인터뷰는 처음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간 언론과의 접촉을 꺼려온 만큼, 가슴 속에 담아뒀던 이야기를 속시원하게 펼쳐보이겠다는 의지가 묻어나왔다. "더 이상 윤이상 이름을 팔아먹지 말라", "우리도 가족이 8년 동안 흩어져 살아본 경험이 있어 오씨 가족의 송환을 위해 특별하게 신경썼다"는 대답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씨는 특히 지난해 11월3일 윤이상의 기일에 보수단체 회원들이 집까지 찾아와 규탄대회를 연 것과 관련해 "고향 땅에 집 짓고 처음으로 영혼을 달래려 제사 준비 중이었는데 결국 펜션으로 옮겨가 제사를 지냈다"며 격한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씨와의 인터뷰는 지난 10일 통영 앞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딸 윤정씨 소유의 자택 응접실에서 3시간 남짓 진행됐다. (※ 표시된 부분은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곁들인 부분임.)

- 오길남 씨와 방수열 목사(통영현대교회)를 사자명예휘손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나라 밖에서 50년을 살았다. 2006년 우리 정부가 동백림간첩단 사건이 옛 군사정권의 잘못이라고 밝혀, 큰 마음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다. 그때만해도 그간 쌓였던 한이 풀리는구나,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간 오길남 씨 주장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은 건 역사가 정당함을 밝혀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너무 지나쳤다. 한국도 모자라 미국까지 가서 일방적으로 떠들고. 도저히 가만히 참고만 있을 수 없더라. 계속 조용히 있다간 저쪽 주장이 정당화될거 아니냐."

 - 논란의 계기는 지난 1985년 독일 유학 도중 가족과 함께 입북했다가 혼자 탈북해 한국으로 온 '오길남 사건'이다. 오 씨와의 인연은 어떻게 되나?

"윤 선생은 1977년 봄 독일 바트 고데스베르크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에서 처음 본 것으로 기억한다."

 - 윤 선생과 오 씨는 이미 74년부터 독일 교민과 유학생을 중심으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회) 활동을 함께 하지 않았나?

 "인간적으로 가까이서 그를 만난 게 그렇다는 얘기다. 언젠가 민건회 사람들 열 몇 명이 우리 집에 놀러와 불고기도 얻어먹고 갔다고 오 씨가 말하는 거 같던데, 정확한 인상은 남아있지 않다. 그만큼 친밀한 인간관계가 없었다는 뜻이다. (※ 지난 92년 오 씨가 한국으로 돌아온 뒤 '윤이상의 회유로 북한에 들어갔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자, 윤 선생은 '오길남 사건과 나'라는 제목의 친필 서한에서 오 씨를 처음 만난 건 77년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반면, 오 씨는 75,6년 무렵 윤 선생 집에서 민건 회의가 열렸고, 그날 자신이 윤 선생이 작곡한 '낙동강'을 부르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 이후에도 계속 교류는 있었나?

 "그 사람도 민주화운동 한다고 애썼고 윤 선생은 교민사회 연장자였으니 이런저런 자리에서 더러 만나기야 했겠지. 하지만 오 씨도 박사학위 논문 작업에 힘써야 할 처지라 그리 친밀한 사이는 전혀 아니었다. 그러다가 북한에 다녀왔다고 불쑥 연락이 온거다"

 윤 선생은 민건 2대 회장을, 오 씨는 민건 4대 부회장을 지내는 등 두 사람 모두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에 힘쓰기도 했다. 다만 당시에 함께 활동했던 주변 인사들은 같은 단체에 몸담고 있었다 하더라도 두 사람이 가까이 지낸 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윤 선생은 서베를린에, 오 씨는 4시간 이상 떨어진 북부도시 킬에 거주하고 있었던 탓도 크다. 오 씨 스스로도 자신의 책에서 80년 초 망명에 즈음해서는 민주화운동에서 서서히 거리를 뒀다고 밝히기도 했다.

 - 당시 상황은?

 "86년 11월이다. 내가 먼저 전화받았다. 갑자기 '사모님, 저 오길남입니다. 제가 북에 가족 데리고 살러갔다가 혼자 도망해 왔습니다' 그러더라. 북쪽 사람들 속이고 도망나와 6개월 동안 독일 정보당국하고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조사받고 이제 나왔다고 하더라. 우리 선생님도 참 기가 막힌다 했다. 마침 며칠 후에 하노버에서 음악회가 열리니 그리로 찾아오라 하고 끊었다. ( ※ 오 씨는 탈북해 독일로 돌아온 뒤 독일 북부도시 하노버의 기숙사에 살았다.)

 - 음악회 끝나고 만났나?

 "음악회 뒤 만나 설명을 들었다. 급한대로 잡비도 좀 쥐어주고, 서베를린으로 돌아가 알아보겠노라고 하고 일단 헤어졌다."

  - 그 다음엔?

 "특별히 신경썼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유가 뭔지 아나? 우리 가족도 8년간 헤어져 산 경험이 있어 그 고통을 너무 잘 안다. 그 때는 통독 이전이라 동베를린에 있는 북한 대사관에 직접 찾아가서 만났다. 아마 참사인가 누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 씨 가족을 데리고 나오게 해달라, 꼭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당시 분위기로는 그 양반도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았다."

 - 어떻게 됐나?

 "대사관 양반이 본국에 다녀오기를 한참 기다렸더니, 나중에 독일로 돌아와서 전하는 말이 '선생님, 오길남 가족 못데려온다' 그러는거야. 놀라서 '왜요?'라고 물었지. 그 양반이 말하기를 '오길남은 가족을 모두 데리고 이삿짐 꾸려 북한 공민으로 들어갔다. 그랬는데 자기 혼자 도망와 미국 정보당국 조사까지 받았으니 조국의 명예를 모욕한거다' 이러더라구. 답답했다."

 - 나중엔 오 씨 부인의 편지와 사진, 육성 테이프까지 전달해줬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북쪽에 오 씨 딱한 처지 전하며 송환 요청했다. 그나마 편지나 사진, 육성 테이프라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 특히, 사진과 육성 테이프 전해준 날 상황을 두고 오 씨 주장과 크게 엇갈린다.

 "아마 오 씨가 북을 탈출하고 2~3년인가 지났을 무렵이다. 빨간 넥타이를 매고 찾아 왔더라. 윤 선생과 나, 오 씨가 아랫방에 모여 앉아 카세트를 틀었다. 듣고 있자니 눈물이 마구 흐르더라. 오 씨 부인은 '우리 걱정하지 말고 잘살라'고 했고, 아버지를 그리는 아이들 목소리도 담겼다. 옆에 앉은 윤 선생도 무척 슬퍼했다. 그런데 오 씨는 피식 웃더니 느닷없이 '나는 우리 아이들이 이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못생겼구나' 이러는거야. 얼마나 어이 없었는지 짐작하겠나? 눈물은 커녕 '선생님, 저 가족 찾는거 단념했습니다' 하더라구. 그 소리 듣더니 윤 선생이 불같이 화를 냈다. 다시는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호통을 쳐서 보냈다. 그랬더니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다. ( ※ 오 씨는 상당히 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가족을 살려둔 것이 누구 덕인 줄 아느냐? 내 말을 듣지 않고 경솔한 짓을 하면 가족을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윤 선생이 말했다는 게 오 씨 주장이다.)

 - 북쪽에서 오 씨 부인 사진과 테이프 내줄 때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달라

 "처음부터 거리낌없이 내준건 아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오 씨 처지 이해해달라고 부탁하니 그쪽에서도 난감했겠지. 나중엔 최소한 사진이라도 우선 전해줄 수 있냐고 했다. 결국 그건 거절 못하더라. 오 씨가 북한 탈출했을 무렵엔 한 3년간쯤 우리도 김일성 주석을 직접 만날 기회가 없었다. 북한에서 음악회 열려 갔더니, 참사 하나가 계속 따라다니면서 '오길남 얘기는 꺼내지말라'고 당부하더라. 오 씨가 독일로 돌아와 북한 사회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 선전하고 다니고 있어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는 분위기였다. 음악회장에서 사람들 만나더라도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뒤엔?

 "오 씨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꾸 우리 모략을 하더라구. 한번은 윤 선생과 친한 작가 루이제 린저가 우리 집에 왔다. 마침 북한 방문할 일이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만일 김 주석을 만나거든 오 씨 가족이 돌아올 수 있도록 말해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루이제 린저도 그러겠노라고 약속하고 떠났는데, 북에 다녀와서 하는 말이 그 얘기 꺼낼 분위기가 도저히 못 돼 말을 못했다고 하는거야. 그나마 큰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 더 이상의 송환 노력은 없었나?

 "이런 일도 있다. 나중엔 궁리궁리하다가 윤 선생이 연판장이라도 써서 북쪽에 보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까지 했다. 북한에서 윤 선생 체면도 있고 하니 그렇게라도 하면 혹시 긍정적으로 돌아서지 않을까 싶었던 거지. 만일 오 씨 가족을 내보내준다면 이곳에 있는 우리와 주변 사람들이 북쪽 체면 크게 손상되지 않도록 조용히 지내게끔 책임지겠다, 뭐 이런 내용을 담아서 서명을 받아보려 했다. 주변 사람들한테 뜻을 전했는데, 찬성한 사람이 둘인가 셋 뿐인가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 계획도 접었다."

 - 누가 찬성하고 누가 거절했나? 대표적인 인물 몇명만 꼽아줄 수 있나?

 "정확히는 잘 모른다. 오해 소지 있으니 더는 얘기하기 곤란하다. 양해해달라. 당시 독일에서 민주화운동 하던 사람들 중심으로 뜻을 물어봤다."

 - 그 뒤에도 오 씨 소식은 간혹 들었나?

 "오 씨 심리상태가 좋지 않다는 얘기는 간혹 들리더라. 술 마시고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전화해 울다가 협박하다가, 말이 아니었다고 들었다. 그 양반도 오죽 힘들었겠나. 이해는 간다. 그러다가 92년인가 느닷없이 본 주재 한국 대사관에 자수한 뒤 한국 들어와 조서 쓰고 큼지막하게 인터뷰했잖아. 윤이상이 자기를 회유해서 북에 가도록 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더라. 어이가 없었다. 처음엔 가족 팔아먹고, 나중엔 윤이상 팔고 산다. 더 이상 윤이상이란 이름 팔아먹지마라. 우리만큼 오 씨 가족 송환 위해 애쓴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라. 그런데도 이런 모욕을."

 이 씨는 북에 남은 오 씨 가족 송환을 위해 윤 선생과 자신이 끝까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사진하고 테이프라도 구해다준거, 그건 뭐 쉬운 일이었는줄 아나. 그거라도 하나 얻어오려고 눈치보고 간청했는데, 그걸 되레 윤이상 잡아먹는 용도로 쓸 줄이야." 잔잔하던 목소리에도 잔뜩 힘이 들어갔다. 

 - 쟁점은 두가지다. 도망나온 오 씨한테 북한 가족 곁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야단쳤다는 것과, 애초에 처음 북한에 가라고 회유했다는 것. 이제 오 씨가 가족과 함께 북한에 살러 들어간 85년 얘기를 해보자. 오 씨는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가게 된 게 전적으로 윤 선생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윤 선생이 어떻게 가라 말라 할 수 있나. 동백림 사건 때 그리 말 못할 일을 몸소 겪었으면서. 그런 일을 왜 만들겠어. 게다가 당시엔 음악활동 위해 북한도 공개적으로 왔다갔다 하던 상황이었는데, 무엇이 아쉬워서 이제 갓 박사학위 받은 사람을 몰래 꼭 찍어서 가라고 하겠나." 

 - 오 씨는 윤 선생이 편지까지 보내 권유했다고 주장한다.

 "기가 막히다. 그런 일 없다. 백번 양보해서 만에 하나라도 윤 선생이 그런 생각을 가졌다 치자. 그리 중요한 일이라면 직접 말로 하지, 편지를 쓰겠나. 세살짜리 애도 아니고, 박사학위까지 받고 나이 50이 다 된 양반이 본인이 판단해서 가족들 데리고 세간 다 정리해 들어갔는데, 뭐가 회유고 뭐가 협박이란 건지." ( ※이삿짐을 챙겨 북한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편지를 잃어버렸다는 게 오 씨 주장이다.)

- 92년 오 씨 귀국한 뒤 한동안은 조용했는데. 왜 최근 다시 논란됐다고 보나?

 "잊을만하면 한번씩 <월간조선> 같은데서 오 씨 인터뷰 종종 튀어나오긴 했지. 그러다가 지난해부터 여기 통영현대교회 쪽에서 바람 일으킨거다. 목사 부인이 어디 가서 오 씨 부인 신숙자에 대해 처음 얘기를 들었던 모양이야. 그 양반이 통영 출신이란 얘기를. 처음엔 좋은 마음으로 '아, 그 여자가 통영출신이니 구출 노력하자' 이랬는지 모르겠는데, 어찌하다 보니 윤 선생 이름이 막 튀어나오고 일이 커진거지. 윤이상 죄 묻는게 하느님의 뜻이란 얘기까지 나오더라."

 통영의 딸 논란이 커지는 과정에선 공안당국의 의중이 실린 흔적도 드러나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오 씨의 저서 200권을 구입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를 통해 통영 지역 오피니언리더들에게 뿌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분위기 탓에 딸 윤정씨 소유의 집 앞에선 반대자들의 시위가 연일 끊이지 않고 있다. 기자가 찾은 날 오전에도 100여명이 집앞에 몰려와 구호를 외치다 돌아가기도 했다. 집 대문과 덤벼락은 이들이 던진 달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 집 앞에서 반대 시위가 계속되는 모양이다.

 "한번은 외출하려는데 우리가 탄 차를 추격해서 막다른 언덕까지 내몰리기도 했다. 우리 딸 애가 아버지 영혼 달래겠다고 고향 통영 앞바다 보이는 곳에 집을 지었다. 끝까지 버티겠지만, 나도 정신 강하게 살아왔는데 내 삶이 너무 쓰라리다."

 - 경찰 신변보호는 안했나?

 "주한 독일대사관에 연락했더니 대사관에서 외교부에 연락은 했다더라."

이 씨는 지난해 11월3일을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날로 꼽았다 이 날 '대한민국대청소 500만 야전군본부'(의장 지만원)란 이름의 단체 회원 50여명은 통영에서 윤이상의 흔적을 지우라며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규탄대회를 열었다. 마침 이 날은 지난 1995년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난 윤이상 선생의 기일이었다.  

 - 그 날 상황을 좀 설명해달라.

 "소문엔 버스 다섯대 나눠타고 통영에 데모하러 내려올거라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혹시 위험한 상황 벌어질 수 있으니 집에서 피하는 게 어떠냐고 그러더라, 그런데 그 날이 바로 윤 선생 기일 아니냐. 어딜 떠나겠어. 고향 땅에 집 짓고 처음으로 영혼 달래겠다고 제사 준비 중이었는데. 하지만 견디다 견디다 못해 결국 집에선 제사 못지내고 근처 펜션에 옮겨가서 지냈다. 펜션 가는 길에도 우리 차를 막 쫓아오더라. 우리 마음 이해하겠나. 우리 딸 애가 왜 여기 집 짓고 살려는지 아나. 끝내 고향 땅 밟아보지 못하고 떠난 아버지 슬픈 영혼 위로하겠다는거다. 우리가 이런 상태다. 우리가 대체 뭘 잘못한 건가?…"

한동안 목이 메이던 이 씨가 감정을 추스르는 사이 옆에 앉은 딸 윤정씨가 잠시 얘기를 이어갔다. 화제는 동백림 사건으로 부모가 모두 서울에 잡혀온 뒤 남동생과 함께 독일에 남겨졌을 때의 아픈 기억으로 옮아갔다. "그 때 나는 만 16살이었다. 독일에 네살 어린 동생과 둘이만 남았다. 아직도 가슴속에 응어리진 게 사람들이 그리도 무심하게 한순간에 등을 돌릴 수 있는가였다. 결국 부모 없이 기숙사로 보내졌다. 어린 나이에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 이 씨도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 50년을 함께 산 윤이상이란 사람은 어떤 인물인가?

 "통영을 좋아해도 그리 좋아할 수가 없어. 머리 맡에 큼지막한 통영 앞바다 사진을 평생 걸어두고 살았다. 민족과 예술을 짊어지고 산 사람이다. 음악과 조국 두가지 개념 속에서 살다간 사람이다. 외갓집은 지리산, 자란 곳은 아름다운 통영. 이순신 장군 대첩있던 곳 아니냐. 자연스레 민족정신이 강하게 자리잡았다. 일제 때 형무소살이도 했고, 해방 뒤 고아원도 하고 그러다보니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이 강했다. 뉴스 중독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남북한 관련 뉴스는 하나도 빼놓지 않았던 사람이다."

- 윤이상이라는 인물이 갖는 이런 상징성 때문에 계속 논란에 휩싸인다고 보나?

 "윤 선생은 명예도 높았다. 독일 대공로훈장도 받았고 현대음악 명예회원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장자인 독일 작가 귄터그라스와 함께 함부르크 자유예술원상도 받았다. 그런 사람 하나 배출하기가 얼마나 힘든 건데. 나라가 해준 거 하나도 없으면서."

 - 한국 사회엔 여전히 섭섭한 마음 남아있는 것 같다.

"우리가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 겪은 뒤 독일로 돌아와서 그 모욕과 치욕을 씻어내는데 자그만치 10년이 걸렸다. 그 시기에 윤 선생이 쓴 작품들은 하나같이 굉장히 강렬했다. 깊은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기까지 10년이 걸린거다. 세월이 10년 정도 흐르고 나서야 작품세계가 조금 달라지더라. 평화와 사랑, 순수와 자비, 이런 게 베어나오더라. 이전 시기보다는 작품이 상당히 순화됐다. 윤 선생 주변의 음악하던 친구들은 '윤이상의 음악을 들으면 슬픔이 난다'고 그랬다. 조국은 깨어지고 두동강 났지만 동분서주하면서 음악으로 민족화합을 위해 정성껏 노력한 사람이다."

 - 두 분이 처음 만난 얘기나 좀 들려달라.

 "부산사범학교에서 둘 다 교편 잡을 때 만났다. 언젠가 일요일날 교무실에 나와 서로 일을 하다가 우연히 점심을 함께 먹게 됐다. 퇴근하는데 뒤에서 쫓아오더라. 날은 어두워지고 점심은 내가 냈으니까 저녁은 자기가 사겠다고. 아무리 한 교실에 있어도 식당에 같이 가서 밥먹기를 꺼린다 말이다. 그런데 그 양반은 어딘지 몸에 인격이 베어 있었다. 생각도 깊어보이고 그러더라. 중도에서 먼저 내리면서 내 머리에 검풀하나 붙은거 떼주더라.(웃음) 그러다가 가까워졌다. 그런데 막상 사귀려고 보니 이 양반이 폐병환자 3기야. 피도 많이 토해서 겁 많이 났지. 다른데 시집간다고 거절했는데, 그래도 인연이 있었는지. 부부간이라도 깊은 데까지 닿을 수 있도록 깊이 사랑했다."

-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나?

 "고소 건이 어떨게 마무리될지는 기다려봐야하고. 윤 선생 편지집을 정리해 출판할 생각이다. 지금까지 3분의2 정도 정리를 마친 상태다."

 통영/최우성 최우리 기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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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필자들의 연재물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합니다.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 등에서 뜨거운 진실게임으로 막무가내 수사의 관행을 바꾼 김형태 변호사가 사건 비망록을 처음으로 공개합니다. '따뜻한 헌법학자'로 알려진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인터뷰어로 나섭니다. <십자군 이야기>로 많은 팬을 확보한 김태권 만화가는 위트 있는 그림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 비밀을 파헤칩니다. 대중적 역사칼럼의 새 지평을 연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1970년대 유신체제가 오늘날 어떻게 우리 곁에 떠돌고 있는지를 흥미로운 필치로 그립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와 여성학자 정희진씨의 짧지만 통찰력 있는 칼럼, 김성윤·이승한 평론가의 문화비평, 전 국가대표 이청용 선수의 축구 이야기도 함께 합니다. 이 밖에도 다큐사진, 엄마칼럼, 동물칼럼, 지도뉴스 등의 꼭지가 신문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 토요일 신문의 변신, 28일 첫선

토요판은 독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결과물입니다. <한겨레>는 지난해 11월 '토요판'을 준비하며 기초자료 수집을 위한 독자 조사를 벌였습니다. 이 조사에서 독자들은 주말엔 숨을 고르며 다른 지면을 맛보기를 원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모든 신문의 토요일치 열독률은 평일치에 비해 떨어지는 추세에 있습니다. <한겨레>는 '토요일의 반전'을 꿈꿉니다. 주말 내내 독자들이 손에 쥐는 신문이 되려 합니다. 28일치 첫 토요판에서 그 내용을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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