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때려 없애야하는 '게임 속 괴물'이었어요

이재준 기자 2012. 1. 13.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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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학생, 왕따폭행 상황을 게임에 비유해 사과 편지

1년 동안 같은 반 친구에게 '왕따 폭력'을 휘두른 가해 학생은 피해 학생을 때려 없애야 할 컴퓨터 게임 속 괴물로 비유했다.

서울 강서구 K중학교 1학년 임모(13)군을 폭행한 학생 7명은 피해 학생에게 사과 편지를 썼고, 이를 담임교사인 정모(27)씨가 지난 5일 임군에게 전했다.

본지 확인 결과 가해 학생 신모(13)군은 임군에게 보낸 편지에서 "메이플(스토리)로 말하면 괴물 '자쿰'을 한명이 공격했을 때 2000씩 대미지를 주고 두명이 공격하면 4000의 대미지를 주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조금씩 했지만 그 조금씩이 모여서 아주 큰 대미지를 받은 것이야. 나는 이것을 알지도 못했어"라고 썼다. '자쿰'은 임군을, '대미지'는 왕따 폭행에 따라 임군이 받는 피해를 비유한다.

'메이플스토리'는 게임업체 넥슨 이 서비스하는 인터넷 게임으로 이용자들은 게임상의 가상 인물이 돼 괴물을 무찌르는 임무를 수행한다. 거대 괴물 '자쿰'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반복적으로 때려야 하며, 보통 여럿이 무리지어 한 마리의 '자쿰'을 공격한다.

서울대 사회학과 서이종 교수는 신군의 편지에 대해 "게임을 즐기는 청소년 중 많은 수는 가상현실과 실제 세계를 구분하지 못한다"며 "게임에서 벌어지는 상황으로 현실세계를 바라보려는 사례"라고 말했다. 서 교수는 "여러 명의 이용자가 레벨(게임상의 계급)을 높이는 경쟁을 할 경우 패자에게 잔인하고 가혹해지는 방법을 배운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말했다.

왕따 폭행을 저지른 가해학생이 상황을 게임에 비유할 정도로 요즈음 일부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은 게임 속에 빠져서 살고 있다.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최근 초등학생들은 온라인 게임 레벨이 낮으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며 "레벨이 낮으면 학급회장 선거에도 못 나올 정도"라고 했다.

지난 11일 밤 10시 강남구의 한 PC방에서 온라인 게임을 하던 초등학생 이모(13)군은 "세상에서 (게임) 레벨 높은 친구들이 제일 부럽다"며 "돈을 주고 캐릭터 키워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먹을 것도 사다준다"고 말했다.

이군과 함께 게임을 하던 권모(13)군은 "팀을 짜서 적을 공격해야 하기 때문에 게임을 못하는 '찐따(바보라는 뜻의 은어)'들과는 함께 놀지 않는다"고 말했다. 메이플스토리는 지난해 12월 같은 반 친구들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구 중학생 김모(14)군에게 가해 학생들이 "대신 게임을 해서 레벨을 높여 놓으라"고 강요했던 바로 그 게임이다.

'게임 중독'에 빠지면 현실과 게임 속 세상을 혼동해 폭력을 휘두르는 등 사고를 내는 극단적인 경우도 나온다. 2010년 11월 부산에서는 한 중학생이 게임 중독을 나무라던 어머니를 살해하고 자살했다. 게임을 못하도록 하는 부모를, 물리쳐야 할 게임 속 적으로 간주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지난 2008년 용인에서는 한 초등학생이 평소 즐기던 자동차 게임을 모방해 승용차를 훔쳐 몰다 사고를 내기도 했다.

K중학교에서 임군을 지속적으로 왕따시켰던 학생들은 정작 현실에서는 친구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건이 알려지고 난 이후에야 후회하는 반응을 보였다. 김모(13)군은 임군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생각을 해봤어. '만약에 내가 너였다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매일 애들이 이름 대신 별명을 부르고 괴롭힘도 당하고 그러면 나도 매일 힘들고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라고 썼다. 안모(13)군은 "네 입장에서 이 일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마음이 많이 아플 것 같아"라고 썼다. 또 다른 김모(13)군은 "내가 (임군과) 입장 바꿔 생각해본다면 당하는 것에 대해 많은 괴로움을 느꼈을 것이고 우울해했을 거야"라고 편지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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