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사람] "석궁의거" 주장 vs "석궁테러" 법의 판단, 뭐가 맞나

2011. 11. 12.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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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에 석궁 발사로 실형 살고 후 출소 김명호 교수 "아직도 억울"

김교수 "핵심증거 은폐·조작"법관들의 국민우롱 알리려 석궁들고 갔다 우발적 발사… 혈흔없는 와이셔츠 등 의문법원 "살인미수"피해교수 진술번복했지만 당시 충격 고려땐 참작소지… 속옷 혈흔만으로 증거 충분

인터넷 홈페이지 'seokgung.org'에 접속하면 그 방대한 자료에 깜짝 놀라게 된다. 이른바 '석궁 사건'의 기록들이다. 이 사건의 주인공 김명호 전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는 지난 4년간의 모든 기록을 이 사이트에 모으고 있다. 김 교수는 자신의 재임용 탈락 관련 소송에서 패소하자 담당 판사에게 석궁을 쏜 혐의로 실형 4년을 살고 지난 1월 24일 출소했다.

출소한 김 교수는 사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의 책을 쓰는 중이다. 그와 석궁 사건을 다룬 영화 '부러진 화살'도 내년 2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남부군' '하얀 전쟁'을 만든 정지영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지난달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공개돼 관심을 모았다.

석궁 사건은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수학과에 재직 중이던 김 교수는 95학년도 성균관대 본고사 수학 문제의 오류를 발견해 총장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그 이후 김 교수는 예정된 부교수 승진과 조교수 재임용에서 연달아 탈락했다. 김 교수는 불복했다. 대학 측으로부터 보복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재임용 탈락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그러나 96년과 97년 두 차례 성균관대의 손을 들어줬다.

김 교수는 미련 없이 한국을 떠났다. 하지만 외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2005년 김 교수는 엉킨 실타래의 매듭을 풀기 위해 다시 귀국했다.

문제의 2007년 1월 15일. 성균관대를 상대로 제기한 교수 지위 확인 소송 항소심 선고 결과가 사흘 전 나온 것을 안 날이다. 김 교수는 "만약 패소한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했다. 대법원에 상고해봤자 뻔한 결과가 나올 것으로 봤다. 막연하게나마 마지막에 가서는 무슨 방법이든 동원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김 교수는 결과를 확인한 날 저녁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사놓았던 석궁을 들고 집을 나섰다. 재판을 담당했던 박홍우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의 서울 송파구 잠실동 집으로 찾아갔다. 김 교수는 퇴근하던 박 판사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맞닥뜨려 승강이를 벌였다. 그 와중에 석궁의 활시위에서 화살이 발사됐다. 김 교수는 현장에서 경비원과 박 판사의 운전사에 제압됐다. 박 판사는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다.

김 교수는 석궁으로 하루아침에 자신의 사건을 '이슈화'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다음날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됐다. 대상이 판사 아니라 누구를 상대로 했던, 물리적 폭력이나 폭력적 위협에 의존한 죄가 클 듯하지만 김 교수는 여전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도리어 판사, 검사에게 법을 지키라고 호통을 친다.

김 교수는 "'석궁 테러'가 아니고 '석궁 시위' '석궁 의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합법적인 수단을 다 썼다. 1년 6개월간 1인 시위를 하고, 탄원서도 써봤다. 최후의 수단으로 석궁을 들었다. 석궁을 들고 간 게 무슨 죄냐. 법관들이 어떻게 법을 위반해 국민을 우롱하는지 국민에게 알리려고 석궁을 들고 갔지 판사에게 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아직도 석궁 사건의 핵심 증거들이 조작되고 은폐됐다고 주장했다. 박 판사의 진술이 번복된 점도 미심쩍다고 했다. 박 판사는 사건 직후 '김 교수가 1.5m 거리에서 정조준해 석궁을 쐈고, 복부에 박힌 화살을 빼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검찰 조사에서는 "화살에 맞았다는 것 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경찰이 박 판사의 진술을 토대로 석궁 발사 실험을 해봤더니 화살은 2cm 두께의 합판을 관통하고도 뒤쪽으로 15cm나 더 나갔다. 내가 살인 미수를 했다는 수사 결과는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다른 증거물인 혈흔 없는 와이셔츠도 미스터리다. 박 판사가 입은 조끼와 속옷에서 발견된 혈흔이 그 중간에 입은 와이셔츠에는 없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사건 당일 박 판사가 입었던 와이셔츠에는 오른쪽 팔꿈치 부분에만 핏자국이 있을 뿐 화살에 맞은 구멍에는 흔적이 없다. 와이셔츠 혈흔과 화살에 묻은 혈흔을 감식해 박 판사의 것과 일치하면 박 판사가 화살에 맞았다는 게 입증 가능한데 부러진 화살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밝혔다.

또 석궁이 발사되기까지 김 교수는 박 판사가 석궁의 앞부분을 잡고 실랑이를 벌이다 우발적으로 발사됐다 했고, 박 판사는 석궁을 잡은 적이 없다고 했다. 석궁에 대한 지문 감식을 해보면 될 일이었다. 경찰이 지문을 채취하지 않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김 교수는 "석궁 재판 과정을 들여다보면 부러진 화살과 와이셔츠 등 증거 인멸과 박 판사의 거짓 진술 등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사법부의 문제점을 일반사람도 쉽게 알기 쉽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김 교수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수사기관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2008년 6월 선고에서 "범행이 어둠 속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났고 박 판사가 상당히 충격을 받은 사정을 고려하면 진술이 다소 일관되지 못하다 해서 박 판사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와이셔츠 혈흔이 육안으로 잘 확인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는 속옷과 내의에서 다량의 출혈흔적이 확인된다는 사실의 증명력이 훨씬 우월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래서 그는 살인 미수 혐의로 실형을 살아야 했다.

김 교수의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인이 박힐 정도로 깊다. 재임용 탈락 취소 소송 과정에 비롯된 법정 불신은 이제 석궁 문제로까지 옮아가 있다. 김 교수의 이러한 집착과 불신은 개인의 문제인가, 그가 주장한 대로 우리 사법체계의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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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은기자 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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