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도 사냥 연습하듯 학살했다"

정희상 기자 입력 2011. 9. 27. 09:18 수정 2011. 9. 27.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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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륜적 국가 범죄 배상에는 시효가 없다." 문경 학살 사건이 발생한 지 61년 만에 나온 사법적 결론이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지난 9월8일 한국전쟁 직전 국군이 공비를 토벌한다며 민간인들을 집단 총살한 문경 학살 사건 피해자 유족 채의진씨(74) 등 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10억3000여 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국가의 범죄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한 1·2심을 뒤집은 것이다.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방청석에 앉아 있던 채의진씨는 오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건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그는 집단 학살 구덩이에서 아홉 식구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 후 진상 규명과 국가 배상을 요구하며 모진 세월을 견뎌온 지 60년이 넘었다. 그동안 채씨의 삶은 한시도 그날의 참혹한 기억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다. 학살 사건은 한 개인의 질곡이자 살아남은 자로서 풀어야만 할 숙제였다. 채씨가 지난 20여 년 동안 문경학살사건 희생자유족회 대표와 전국민간인피학살유족회 대표를 맡아 특별법 제정을 통한 진상 규명에 앞장서온 것도 그 일환이었다. 채씨는 대법원 판결 직후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가신 영령들 앞에 비로소 고개를 들 수 있게 해준 사법부의 정의로운 판결에 감사드린다"라고 말했다(33쪽 인터뷰 기사 참조).

문경 학살 사건은 1949년 12월24일 정오, 공비 토벌 명목으로 수색 정찰 중이던 국군 제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 및 3소대원 70여 명이 경북 문경군 산북면 산간 마을 석달동을 지나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마을 주민 전원을 불러내 사냥 연습하듯 학살한 반인륜적 범죄다. 당시 학살로 마을 주민 136명 중 어린이 9명과 여성 44명을 포함해 모두 86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8년에 사건 진상·가해 책임자 밝혀져

끔찍한 학살 범죄를 보고받고 당황한 이승만 정부는 사건 직후 신성모 국방부 장관을 현지에 내려보내 은폐와 조작의 길을 택했다. 신 장관은 군 내부적으로 비밀리에 민간인 학살 범죄의 책임을 물어 사단장과 연대장을 해임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언론 보도를 통제하고, 군부대의 범행을 공비의 소행으로 둔갑시켰다. 사망자들의 호적에 '공비가 출몰해서 총살'이라고 거짓 기재한 것이다. 이후 유족에게는 멸시와 공포와 침묵의 세월이 강요되었다.

ⓒ문경시청 제공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6월27일 문경 양민 집단 학살사건 현장에서 '진실규명 결정 보고대회 및 고유제'(위)를 개최했다.

문경 학살 사건은 참여정부 들어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사건이 접수돼 2008년 여름에야 사건 진상과 가해 부대 책임자가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이런 공식 결정을 받고 나서야 유족 대표인 채의진씨가 학살 책임자인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던 것. 하지만 1심과 2심 재판부는 '국가의 불법 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은 발생한 날로부터 5년, 손해를 안 날로부터 3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논리를 들어 유족의 가슴에 못질을 했다. 문경 학살 사건이 발생한 때가 1949년 12월이었고, 유족들이 이 사건과 관련된 헌법 소원을 낸 2000년 3월을 기점으로 손해를 알게 됐다고 봐서 소멸시효가 끝났다고 판결한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번 사건을 훨씬 전향적인 사법 정의의 관점에서 바라봤다. "진실을 은폐하고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조차 게을리 한 국가가 이제 와서 문경 학살 사건의 유족인 원고들이 미리 소를 제기하지 못한 것을 탓하며 시효 완성을 이유로 채무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판시한 것이다. 이어 "위난의 시기에 국가 권력의 묵인 아래 자행된 기본권 침해에 대한 구제는 통상의 법 절차에 의해서는 달성하기 어려운 점 등에 비춰 진실화해위의 진실 규명 결정이 있던 2007년 6월까지는 객관적으로 원고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었다"라고 밝혔다. 손해배상 청구권 시효가 진실화해위가 진실 규명 결정을 한 때부터 시작된다고 못 박은 것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유사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에게도 고무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승소를 이끌어낸 박갑주 변호사는 "이 판결로 여타 민간인 학살 사건들도 사법적으로 구제할 길이 열렸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 정도 대법원 판결이 나왔으면 국가가 입법적 결단을 내려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대법원의 배상 판결까지 났는데도 국가가 다른 피학살 유족에게 또다시 비용을 들여 처음부터 비슷한 소송 절차를 밟도록 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고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빨간 베레모 아저씨의 참혹했던 60년

정희상 기자 /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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