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 무상급식이 살린 학생과 농민

이종태 기자 2011. 9. 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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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사실상 패배'한 무상급식 주민투표 다음 날(8월25일)에도 서울시 측 분담금(650여 억원)을 집행할 수 없다는 종전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투표함을 열지 못한 상황은 현행 제도를 유지하라는 뜻이라고, 이종현 서울시 대변인은 '결의'를 다졌다. 오세훈 전 시장은 사퇴 기자회견에서 이른바 '과잉 복지'를 성토하며 "21세기 도시의 흥망은 '아름다움'으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를 전시 행정으로 폄하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의 배후에 깔린 오세훈 전 시장과 서울시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면 무상급식은 별로 아름답지도 않고 경제에도 도움이 안 되는 모양이다.

이런 서울시와 대조적인 철학을 실천 중인 지방자치단체가 있다. 전남 나주시(시장 임성훈)다. 나주시는 초·중학교에 대한 전면 무상급식을 지난 6월1일부터 시행 중이다. 전라남도 분담금이 2013년에야 들어오게 되자 지난 5월, 시 부담으로 추경예산을 편성했다. 이로 인해 초·중학생 자녀를 둔 나주시 가정은 학생 1인당 연간 30만~40만원 상당을 절약할 수 있게 됐다. 결코 부유한 편이라고 할 수 없는 나주시가 전면 무상급식을 서두른 데에는 나름의 철학과 의지가 반영되어 있을 터이다.

ⓒ시사IN 조우혜 전남 나주시 나주중학교 학생들이 8월24일 급식실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나주시의 가장 큰 걱정은 인구 유출이다. 1970~1980년대에는 20만명을 훌쩍 뛰어넘던 인구가 현재 9만명 수준. 이에 대해 "'나주시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이며, 나주를 살리려면 교육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임성훈 현 시장의 지론이다"라고 채진광 교육지원과 과장은 말한다. 교육 문제에 대한 시장의 강력한 의지가 실렸기에 전면 무상급식의 조기 실시가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나주시는 이미 2000년대 초부터 학교 급식을 지역 주력산업인 농업을 육성하는 데 활용해왔다.

2003년 9월, 나주시는 전국 최초로 학교급식조례를 제정한다. 핵심 내용은, 각 학교의 친환경 농산물 구입을 나주시 예산으로 지원하는 것. 공공 예산으로 친환경 농산물을 사서 학생들에게 먹였다는 이야기다. 예산 규모는 시행 첫해인 2004년 1억9000만원으로 시작해 2007년 21억3000만원, 2010년 23억여 원에 이른다.

서울시 같은 거대 지자체 처지에서 보면 얼마 안 되는 돈이다. 그러나 이 돈은 나주의 주력산업인 농업 구조를 효율화하는 지렛대로 발전한다. 한국 농업의 고질 문제인 농산물 가격 폭등·폭락과 이에 따른 농가 소득 불안을 지역 차원에서나마 상당히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개별 농가들은 각자 그해 어떤 농산물이 잘 팔릴 것인지 추정해서 재배 품목을 선정한다. 그래서 국가나 지역 전체적으로 어떤 작물은 너무 많이 생산되고 다른 작물은 너무 적게 생산된다. 더욱이 농산물 가격은 시장 수급 이외에도 기후 등에 엄청난 영향을 받아서 하루 단위로 급·등락한다. 언제 출하하느냐에 따라 해당 농가는 횡재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다. 이런 불확실한 시장 상황 속에서 농가의 자구책 중 하나는 가격이 비교적 안정적인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따라 일부 농작물만 재배되어 '농산물 다양성'이 사라지기도 한다.

나주시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대 중반부터 나주 지역 학교 급식을 연구해온 김흥주 원광대 교수는 "2003년 당시 학교 급식에 필요한 음식 재료를 따져보니 약 100가지였다. 그런데 당시 나주에서 조달할 수 있는 음식 재료는 10개 품목이 채 되지 않았다. 그 대안이 '계약 생산'이었다"라고 말했다(26쪽 상자 기사 참조).

민간이 참여하는 '학교급식 실무협의회' 구성

학생들에게 필요한 영양소가 듬뿍 들어 있는 농작물이라도 판로가 없으면 생산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농작물을 재배하면 일정한 양을 정해진 가격에 구입하겠다고 시가 농가와 약속한 것이다. 시와 농가 사이엔, 나주 지역 13개 농협으로 구성된 연합사업단(2007년 나주시농협공동사업법인으로 개편)이 있었다. 연합사업단은 농가들로부터 계약한 작물을 거두어 가공해 보관하다가 나주시내 학교들에 공급했다. 이는 가격 안정화는 물론 보통 5~6단계를 거치는 유통 마진을 줄여 생산자에겐 더 많은 소득을, 소비자(이 경우는 나주시)에겐 더 싼 상품 가격을 보장했다. 현지에서 만난 지역 농민은 "민간 유통업자는 수수료가 35% 정도이지만 농협공동법인(이전의 연합사업단)은 7% 정도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조우혜 생산지에서 온 친환경 농산물이 나주시 산포농협 급식유통센터에 취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을 행정기관이 독단으로 운영하면 특정 농가와 유착하거나 감독을 소홀히 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나주시에서는 시 측과 민간이 함께 참여하는 '학교급식 실무협의회'가 구성되어 지금까지 활동 중이다. 예산을 집행하는 나주시, 생산 농가, 유통을 맡은 농협, 영양교사, 학부모 등을 대표하는 13명이 월 1회 모여 음식 재료의 종류와 공급량, 가격, 식단, 수송 체계 등을 논의하는 것이다. 채진광 교육지원과장은 "시에 소속된 학교급식지원심의위원회가 큰 틀에서 예산 규모를 결정한다면 실무협의회는 그 외 실질 운영을 전담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나주시는 음식 재료 조달체계와 농업 생산에 영향을 미쳐온 것이다.

실제로 나주시 농협 중 하나인 산포농협의 경우 2003년 학교급식조례 제정 당시엔 불과 7개 품목(쪽파·상추·쑥갓·얼갈이 등)만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공급 품목이 44개로 늘었다. 농가들의 소득도 '월급을 받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안정되었다.

농민 "월급 받고 일하는 것 같다"

산포농협 소속인 송철수 '학교급식 작목반' 총무는 "농가에서 내놓는 가격이 크게 오르지도 않지만 폭락하지도 않는다. 안정적 판매처가 있으니까 소득이 안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월급을 받는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친환경 농산물 재배 농민인 양귀수씨 역시 "큰 굴곡이 없다는 것이 장점이다. 마음 편하게 농사지을 수 있다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그는 2003년 이전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고추·애호박·수박 등을 재배했는데 지금은 쑥갓·시금치·열무 등 7개 품목으로 재배를 다양화한 경우다. 그에 따르면 친환경성에 대한 감독이 민간 차원에서까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불시에 학부모들이 비닐하우스에 들이닥쳐 농작물을 뽑아간다. 잔류농약 검사 때문이다. 그러나 나주의 학교 급식 농작물엔 농약을 치지 않는다. 먼지가 묻어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는 땅에서 막 뽑은 쑥갓을 털더니 입에 넣고 씹어 삼켰다.

공공 재정(=시민의 세금)이 공공성을 높이는 데 사용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나주시의 경우 지역 주력산업(농업) 활성화 및 시민들의 자녀인 학생들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것만큼 공공성 높은 부문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서울시의 세빛둥둥섬에 건립될 오페라 하우스보다는 시민들이 훨씬 더 공공성을 실감할 수 있다. 이는 나주시에서 지난 6월의 전면 무상급식 조기 시행이 거부감 없이 수용될 수 있었던 토양이기도 하다. 앞으로 서울처럼 지역 농업 비중이 작은 지역에서 전면 무상급식이 활성화되고, 이런 예산을 친환경 농업 육성과 결합시킬 수 있다면 이는 빈사 상태의 한국 농업 전체의 운명을 바꿀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나주시 사례는 이런 가능성의 씨앗이다.

이종태 기자 /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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