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독립영웅' 그는 조선 청년이었다

정환보 기자 2011. 8. 15.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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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징용 끌려간 양칠성, 독립전쟁 중 체포돼 처형일대기 번역서 국내 출간

"나는 죽어서도 인도네시아의 독립(메르데카)을 원한다. 메르데카, 메르데카, 메르데카!"

1949년 8월10일 독립전쟁 중이던 인도네시아에서 한 청년이 네덜란드 군에 처형당했다. 인도네시아는 독립했고, 1975년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독립영웅'으로 인정받은 이 청년은 이듬해 자카르타 소재 칼리바타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비석에는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라는 일본식 이름이 새겨졌으나 그는 '양칠성'(사진)이라는 한국인이었다. 1919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난 그는 20대 초반 남양군도로 끌려갔다. 양씨는 서부 자바 치마히 수용소에서 포로감시원으로 일하게 된다. 일본 패전 후 350여년간 인도네시아를 지배한 네덜란드가 다시 점령국으로 등장했다. 양씨는 게릴라 부대 '팡에란 파팍'을 이끌며 '반둥 불바다 사건' '치바투 철교 폭파' 등의 공을 세웠으나 네덜란드 군에 체포돼 총살당했다. 함께 독립전쟁에 참여했던 인도네시아인 동료들이 훗날 고위직에 오르면서 양씨를 독립영웅으로 추대했다.

한국 시민단체들은 1995년 양씨의 비석에 '양칠성'과 '코리아'를 새겨넣을 수 있었다. 사후 46년 만의 일이었다. 그에게는 세 번째 이름인 '인도네시아를 비추는 달'이란 뜻의 '코마루딘'도 비석에 함께 새겨져 있다.

'조선인 양칠성'의 활동이 빛을 보기까지는 무라이 요시노리(68·村井吉敬)와 우쓰미 아이코(70·內海愛子) 와세다대 교수 부부의 역할이 컸다.

1975년 양칠성이 묻힌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국립묘지의 묘소 앞에서 시민들이 묘비를 살펴보고 있다. | 우쓰미 아이코 교수 제공

무라이 교수는 1976년 묘지 이장 행사의 통역을 맡아 인도네시아를 찾았다가 유족이 없는 야나가와의 신상에 의문을 품었다. 조사 결과 야나가와가 양칠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후 우쓰미 교수와 함께 양씨를 포함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일본 패망 이전부터 비밀결사 '고려독립청년당'을 조직해 일제와 싸웠다는 것도 밝혀냈다. 교수 부부는 이들의 활동상을 담은 < 적도 아래의 조선인 반란 > 이란 책을 1980년 일본에서 펴냈다. 30년간의 조사결과를 포함해 올해 안에 이 책의 개정판을 출간할 예정이다.

한국에서도 개정판 번역서가 출간된다. 번역 작업에는 지난해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을 폭로했던 김종익씨가 참여하고, 김경남 호세이대 교수가 감수를 맡는다.

< 정환보 기자 botox@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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