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7월27일 '강남의 악몽'

임지영 기자 2011. 8. 9.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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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지면 끝이다. 사방이 늪이었다. 잘못 발을 디딜 때마다 진흙탕에 엉덩이가 빠졌다. 깊이를 가늠할 길이 없었다. 숄더백은 진작부터 '진흙백'이다. 토사와 물이 뒤엉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몸의 무게가 불었다. 저 밑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오른쪽으로 곰이 그려진 어린이용 네발자전거가 둥둥 떠갔다. 뒷걸음칠 수도 없었다. 서울 강남의 서초구에 거대한 늪이 생겼다.

집중호우 하루 만이었다. 7월26일 저녁부터 서울 강남에 시간당 61㎜의 폭우가 내렸다. 27일 하루 동안 서울에 내린 비는 301.5㎜였다. 역대 7월 강수량 중 최대치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앞 우면동 래미안 방배아트힐 103동이 토사에 휩쓸린 건 7월27일 아침 8시30분쯤, 우면산에 산사태가 나면서였다. 흙더미는 8차선 도로와 방음벽을 넘었다. 산 정상의 바위가 103동 2층까지 굴러왔다. 말로만 듣던 쓰나미 같았다.

ⓒ시사IN 조우혜 7월27일, 우면산 산사태로 흙더미에 뒤덮인 래미안 방배아트힐 103동 1층에서 실종자 2명의 수색 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실종자 가족 중 한 명이 수색 작업을 애타게 지켜보고 있다.

당일 오후, 빗줄기가 약을 올렸다.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곧 소리조차 공포스러울 정도로 다시 쏟아졌다. 8차선 도로에선 굴착기 몇 대가 토사물을 치우고 있었지만 빗줄기에 작업이 더뎠다. 103동 단지는 여전히 흙탕물에 잠식된 상태였다. 주민들은 출입구가 막혀서 2층 집에 사다리를 놓고 출입하고 있었다. 5세 아이를 업고 내려오는 아버지가 위태로워 보였다. 발코니가 높아서 넘는 게 수월치 않았다. 아이의 분홍색 샌들이 땅에 닿자마자 진흙으로 더러워졌다. 아이가 발을 구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어쩔 수 없어. 괜찮아." 103동 주민들의 '피난' 행렬이 이어졌다. 10층에 사는 이혜경씨(52)도 딸과 함께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인근 친구네 집으로 피난을 가는 길이다. 등산 가방을 메고 우비를 썼다. 한쪽 손엔 빵·반찬 등을 챙겼다. 전기가 끊겨 버티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아기나 노인이 있는 집은 아파트에 남았다.

이씨는 그날 아침 출근 시간 집에 있었다. 밖을 내다보니 남부순환도로의 자동차 행렬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차가 빠지길 기다렸다 출발하려 했다. 갑자기 무시무시한 굉음이 들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집 안이 흔들렸다. 밖을 내다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우면산의 한 축이 무너졌다. 흙더미가 아파트로 밀려왔다. 103동에서만 사망자 세 명이 발생했다. 집 안 리모델링을 위해 도배를 하던 작업자 1명과 노인 두 명이었다.

ⓒ시사IN 조우혜 우면산 산사태로 흙더미가 아파트4층까지 쓸려 들어왔다.

어머니 시신 앞에 선 아들

102동 1층 한 가구도 침수됐다. 집주인 친구들이 사람을 불렀다. "여기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 진흙투성이의 40평대 아파트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거실에 걸린 명화 속 소녀의 얼굴에도 진흙이 튀었다. 러닝머신과 소파가 진흙더미로 변해 을씨년스러웠다. 소방관 2명이 소방전을 찾으려고 들렀다. 도움을 요청하자 "사정은 아는데, 사람이 먼저라서요. 실종자를 수색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103동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 할머니 시신을 발견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들은 망연자실했다.

주민들은 성이 나 있었다. 며칠 전에도 우면산에 다녀온 주 아무개씨(56)는 "아무리 비가 와도 하루 만에 이게 뭔가. 지난해 태풍 곤파스 때문에 피해입은 걸 빨리 복구했어야지. 나무를 토막 내 쌓아놨던 게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그 더미가 내려오며 나무들을 쓸고 오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는 소리다.

293m 높이인 우면산은, 서초구 우면동·서초동·양재동에 인접해 있다. 소가 조는 모양이라 우면산이다. 평소 주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이번에 발생한 크고 작은 산사태로 형촌마을·전원마을 등 우면산 인근에서만 16명 이상이 사망했다. 모두 오전 8시께 일어난 일이다.

그 시각, 강남역 출근길도 물바다였다. 강남은 양재천 등의 잦은 범람으로 상습 침수 구간이지만 국지성 호우가 내릴 때마다 속수무책이다. 서울환경운동연합은 불투수 면적이 근본 문제라고 지적한다. 아스팔트가 늘면서 물이 빠져나가지 않는 면적이 1962년 7.8%에서 2009년 47.7%로 늘었기 때문이다. 도시 지역으로 한정하면 85%에 이른다(20~21쪽 딸린 기사 참조).

ⓒ시사IN 조남진 남태령 전원마을은 반지하 가구의 피해가 컸다.

반지하 세입자의 비애

7월28일, 전날 6명 사망자를 낸 전원마을을 찾았다. 4호선 남태령역 1번 출구에 오르자마자 군복 차림의 사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슬리퍼를 신은 여성 두 명이 양손에 진흙 묻은 핸드백을 가득 들고 날랐다. "값 나가는 것들만이라도 일단 옮기고 있는데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전원마을이라는 이름대로 전원주택이 즐비하다. 높은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구조상 다세대주택이나 전원주택에 세들어 살던 반지하 가구의 피해가 컸다.

임시 피난처인 등대교회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유명렬씨는 전날 아침 8시를 생생히 기억했다. 방 2칸, 1억원짜리 반지하에 세든 것이 6년 전이다. 출근을 앞두고 빗방울이 심상치 않았다. 지난해 추석 즈음에도 물난리를 겪었다. 8시가 넘은 시각, 현관 출입구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을 퍼내는 간이 전기펌프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자 아들 둘과 양동이로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몇 분, 빗물이 갑자기 황톳물로 변했다. 1분도 안 되어서 허리까지 토사물이 쓸려 들어왔다. 귀중품을 높이 올려놓으라 소리치고 가족들이 간신히 몸을 피했다. 빗물이 흙탕물로 변할 때의 공포감을 잊을 수 없다. 1층 주인집은 별탈이 없었다. 반지하 위 1층이라 일반 1층보다 높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시사IN 조우혜 산사태로 자동차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초토화된 건 산 바로 아래 있는 집들이었다. 자동차와 나무가 밀려와 곧바로 집을 덮쳤다. 한 30대 남자는 출근길에 산사태에 쓸려온 나무에 맞아 즉사했다. 다세대주택 반지하 방에서 잠을 자던 영아도 익사했다. 여섯 살 난 아들과 엄마는 몸을 피했지만 다시 진흙탕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웃인 조정희씨(46)는 그날 오후 어린아이의 시신이 수습되는 걸 지켜봤다. 진흙더미 속에서 아이가 발견됐다. "정말 끔찍했다." 조씨가 몸서리를 쳤다.

모든 게 찰나의 운이었다. 이 아무개씨(63)는 "떠내려가다가 나무에 걸리면 살고 못 걸리면 죽는겨"라고 말했다. 조원철 연세대 교수(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의 집은 산 바로 아래 87호다. 집 앞 10m 지점에서 트럭 두 대가 멈춰섰다. 그대로 밀고 들어왔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이 안 된다.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반포에서 살다가 2000년, 조용한 곳을 찾아 여기로 이사 왔다. 조용하고 공기가 맑아 살기 좋은 곳이었다.

조 교수는 이 분야 전문가이지만 우면산이 산사태로 무너지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다고 했다. "원래 표토가 두껍다. 암석이 깊이 있어서 단단하다"라고 말하는 그는 비가 많이 온 게 1차 원인이지만 이번 피해가 인재(人災)임을 분명히 했다. "생태공원을 조성한다고 인조 저수지를 만들어 지반을 약하게 했다. 그린벨트 지역 일부를 주말농장으로 허가해 헤쳐놓은 것도 한 요인이다." 그는 산책로 조성도 문제점으로 꼽았다. 길을 만들면 편평해져 물이 고일 수밖에 없고 물기가 많아져 지반이 약해진다는 논리다. 배수관이 산 아래로 내려오면서 20분의 1 크기로 줄어드는 것도 침수를 부추겼다고 비판했다.

ⓒ시사IN 조우혜 남부순환도로에서 폭우로 침수된 자동차를 사람들이 밀고 있다.

주민의 원성과 달리 서초구청 측은 천재(天災)를 주장한다. 공원녹지과 관계자는 "비가 그 정도로 오면 어쩔 수 없다. 우면산은 지형상 자연경사가 높다. 수해예방비로 1000억원을 들인다고 해도 지형과 토질, 수종 모두 바꾸지 않는 한 힘든 일이다"라고 말했다. 침수 복구 등 공사 현장이 있었던 건 맞지만 그 지역만 산사태가 난 게 아니라고 밝혔다.

전원마을을 나오는 길. 복구의 손길이 한창인 골목길 입구, 집기를 다 드러낸 반지하 진흙 방에 70대 노인 한 명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혼자 사는데 뭘 어떻게 손대야 할지 모르겠어. 30년을 살았는데, 어디로 가야 해?" 노인의 시선이 집 밖을 향했다. 퇴근을 막 마친 듯한 젊은 여자가 지나갔다. 멀쑥한 정장 치마가 금세 진흙으로 얼룩졌다.

ⓒ시사IN 조우혜 서울 예술의전당 앞 8차선 도로가 침수돼 차량 통행에 애를 먹었다.

ⓒ시사IN 조남진 이번 호우로 사당역 도로 일부가 유실됐다.

임지영 기자 /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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