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삼포세대'

2011. 6. 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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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빠듯한 현실·불안한 미래로 생애사적 주기 깨져

↑ 지난해 4월 한 청년단체 회원이 20대의 팍팍한 삶을 풍자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30 정치네트워크 제공

"시간은 흘러서, 나이는 먹어가고 / 무슨 낙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 결혼도 연애도 집도 차도 내 몫은 아닌 듯한 밤 / ... / 대학 가면 빚더미, 난 평생 일개미 / 경쟁에 밀려, 시간에 치여 / 대학 가면 빚더미, 난 평생 일개미." 아카펠라 그룹 원더풀(One The Full)이 최근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올린 노래 '삼포세대'의 가사다. 불안정한 일자리, 학자금대출 상환, 기약없는 취업준비, 높은 집값 등 과도한 삶의 비용으로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거나 유예하는 청년들의 고민을 담았다. 간결한 반주를 타고 흐르는 멜로디는 서정적이다. 그러나 현실은 가사보다 더 어둡다. < 편집자 주 > 수업시간에 몰래 사회과학 책을 읽던 고교 시절, 서유정씨(28)가 상상한 대학의 모습은 시트콤 < 논스톱 > 속의 그것이었다. 드라마 속 대학에는 풋풋한 사랑과 방종에 가까운 낭만이 있었다. 그러나 2006년 봄 한 서울 소재 대학에서 시작된 그의 대학생활은 잔혹동화에 가까웠다.

서씨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혼자 해결해야 했다. 서씨는 오후 11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드물다. 오후 11시는 강의와 '알바'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다. 다음날 제출해야 할 과제가 있는 날엔 날이 밝을 무렵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자주 피곤했고, 자주 아팠다. 어느 해 중간고사 기간엔 학교까지 갈 차비가 없었다. 무임승차를 하던 사흘째, 수유역 개찰구를 통과하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달아오른 얼굴로 지하철역 구석으로 가 평소에 하지도 않는 욕을 하며 계속 울었다."

알바 생활에 치여 연애는 짐일 뿐

↑ 오늘의 청년들은 낭만적인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사진은 연극의 한 장면. |경향신문 자료

그는 학자금대출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차상위계층 장학금을 신청했다. 장학금 신청을 그는 "사연을 팔아 돈을 버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장학금 '경쟁'을 벌이는 다른 지원자들보다 두드러지기 위해 가난을 각색해야 했기 때문이다. 저소득층임을 '입증'하는 일은 동시에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것은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점철된 학창생활을 힘겹게 지속해온 자신의 노력을 부정하는 일이다. 그는 "나의 노력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나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해야만 하는 아이러니를 견디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에게 연애는 도피이자 위로였으나, 끝내 짐이 됐다. '중산층 명문대생' 남자친구는 서씨를 매일 만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학교생활과 병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시급 5000원짜리 패밀리레스토랑 알바 대신 최저임금선의 알바를 두세개씩 몰아서 해야 했던 서씨에겐 여유가 없었다. 어느날 그가 말했다. "알바를 그만두고 날 만나. 돈은 내가 줄게." 그에겐 만남이 간절했겠지만, 서씨에게 그 말은 모욕이었다. 그 다음엔 중산층이 아닌 부산 남자를 만났다. 그는 부산에서 올라와 찜질방에서 혼자 잔 뒤 다음날 서씨와 데이트를 했다. 왕복차비만 10만원이다. 둘은 서로에게 미안했다. "조건이 좋은 사람을 만나면 이해받기 어렵고, 조건이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답이 없다."

"정말 운좋게" 최근 취업한 그에겐 1000만원 가까운 빚이 남아 있다. 언제쯤 다 갚을 수 있을까. "엄두가 나지 않아 계산해보지 않았다. 그러면 의욕이 안 생길 것 같다. 회사도 다니기 싫을 것 같다. 언젠가는 갚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명문대생의 사랑이라고 다 풍족한 것은 아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과거 명문대 재학생이 누려온 혜택을 누리자면 부모의 소득이 뒷받침돼야 한다. 서울 소재 한 사립 명문대에 다니는 김도원씨(26)는 등록금과 제 생활비는 물론 가족의 생활비까지 책임진다. 김씨는 서유정씨가 '편안한 알바'라고 생각하는 과외를 5~6개씩 한다. 그러고도 돈이 모자라 등록금을 학자금대출로 해결하고 있다. 매달 30만원의 이자가 꼬박꼬박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그의 연애는 번번이 오래 가지 못했다. 외모 탓이다. 외모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관리의 산물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돈에 매달리며 살다보니 관리에 소홀했다. 1학년 때만 해도 뚱뚱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는 말한다. "연애를 너무 하고 싶다. 위로도 받고 싶고 육체적으로도 간절하다. 하지만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외모도 부족한 나를 누가 좋아해주겠나." 김씨는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포기했다. 취업에 필요한 '스펙'도 쌓지 못했다. 자격증을 딸 시간이 없었다.

불안한 미래 때문에 결혼생각 없어

↑ 지난해 6월 청년유니온,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 등 청년단체 회원들이 서울 대학로에서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김씨의 경우처럼 수능점수와 부모 소득 사이의 관계가 갈수록 비례하고 있는 요즘 대학에서 저소득층 명문대 학생들은 상대적 열패감을 겪는다. 저소득층 명문대 재학생들의 연애를 주제로 올해 초 석사학위를 받은 연세대 대학원생 김효진씨의 말이다. "저소득층 명문대 재학생들은 성공에 대한 욕망이 강하지만 생활의 압박 때문에 그 욕망을 성취하기 어렵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잘 드러나지 않던 이들의 계층적 정체성은 중산층 학생이 다수를 차지하는 명문대에 진학하면서 저소득층으로서의 경험을 하게 된다. 이들은 중산층 학생들과 달리 데이트와 기념일 챙기기로 전개되는 연애각본을 따를 수 없다. 커피전문점의 5000원짜리 커피를 마실 돈이 없다는 걸 숨기려고 몸이 아프다고 거짓말을 한 사례도 있다. 이들에게 연애 가능성을 결정짓는 건 호감이나 사랑이기보다는 경제적 조건이다."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면 달라질까. 불안정한 노동은 불안정한 연애를 낳는다. 대학진학률이 80%를 상회하는 요즘, 졸업생 두 명 중 한 명은 비정규직이다. 한희정씨(가명·28)는 서울 소재 중위권 대학을 졸업했다. 3년 동안 비정규직으로 일했지만 박봉에 휴일도 없었다. 지금은 취업준비를 위해 학원에 다닌다.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 55만원으로 월셋집에서 산다. 불안정한 노동은 불안정한 연애를 낳는다. 남자친구와 만난 지 2년이 된 한씨는 "미래가 불투명해" 결혼 생각이 없다. 남자친구는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임금은 적고 일은 많은 곳이다. 얼마 전 남자친구가 식사 비용을 아끼려고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말이 비수로 꽂혔다. "다음날 남자친구가 소풍을 가자며 김밥을 싸왔다. 이것도 밥값을 아끼려고 그러는 건 아닌지, 좋다가 싫다가 했다. 어디 놀러가자고 해도 비용문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까봐 괜히 가기 싫어진다." 한씨는 안정된 직장에 다니면서 비슷한 조건의 남자를 만나 얼마 전 결혼한 친구가 부럽다.

불안정 노동에 대한 불안은 안정된 일자리를 찾게 만든다. 청년들이 '스펙'에 관계없이 성적만으로 당락을 가르는 고시에 몰리는 이유다. 그 입구로 들어서기는 쉽다. 고시원에 들어가거나 혼자 공부하면 된다. 그러나 출구를 찾은 이들은 극소수다.

기간제 교사로 일하는 강영석씨(가명·30)는 2년째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그도 한때는 연애를 했다. 여자친구도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시험에 떨어지는 일이 지속되면서, 결국 헤어졌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그의 친구는 4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훌쩍 서른을 넘겼다. 강씨는 기간제 교사 일을 계속해야 할지, 임용고시에만 전력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기간제 교사로 근무 중인 사립학교에서 정교사로 전환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과 '0.1점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시험'에 대한 불안감 사이에서 그의 선택은 끊임없이 유예되고 있다.

상대방의 경제적 조건을 긍정하고 오랜 연애를 이어가는 커플도 있다. 강아리씨(가명·28)가 그런 경우다. 강씨는 대학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7년째 만나고 있다.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한 강씨는 학원에서 일한다. 영화감독의 꿈을 여전히 품고 있다. 남자친구는 노무사 시험을 준비한다. 강씨는 학원 강사로 일한 돈의 절반은 집에 준다. 강씨는 그 부담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기는 불투명하다. "남자친구가 다른 데 관심이 많아서 노무사 시험을 열심히 준비하지 않는다." 한쪽만 일을 하다 보니 데이트 비용도 부담스럽다. 만나는 횟수를 줄였고, 밖이 아니라 상대방의 자취방에서 만난다. 장교로 복무하는 동안 강씨에게 카드를 만들어주기도 했던 남자친구는 지금은 경제력이 없다. "수능 끝날 때까지 만나지 말자고 하는 고3 수험생 커플 같다. 결혼할 나이에…." 강씨는 "결국 결혼은 하겠지만 출산은 포기할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열심히 살면 성공한다는 말은 거짓말"

약간의 돈이 생겨도, 여유는 없다. 정규직 일자리를 가진 청년이라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한국에서는 자기 생활을 포기해야 한다. 최기훈씨(가명·27)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기업 하청을 받는 IT 중소기업에서 정규직으로 일한다. 연봉은 2000만원 후반대다. 그는 연애하지 않는다. 만날 시간이 없다. 그에게는 낮과 밤이, 평일과 주말이 다르지 않다. 평일 중 4일은 야근,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시기에는 주말도 없이 밤샘 근무를 한다. "시간이 없어 잘 만나지 못해 싸우고, 지친 모습으로 만나니 성의가 없다고 또 싸운다. 연애야 하고 싶지만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다."

지난해 4월 진보신당이 IT 노동자들 1665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 IT 노동자들은 주당 평균 61.7시간, 연간 3000시간을 일했다. 프랑스는 연평균 1533시간, 독일은 1433시간이다. 최씨는 결혼을 꿈꾸지 않는다. 집 때문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엄청난 도움을 받지 못하는 한 결혼하기 어렵다. 이 연봉으로는 안 된다. 지금도 서울에서 전세를 구하지 못해 1시간 30분 거리를 통근한다. 결혼을 못하는데 아이는 생각할 수도 없다."

연애만이 결혼에 이르는 왕도는 아니다. 결혼하지 않고 출산하는 이들도 분명 있다. 그러나 오늘 청년들에게 연애는 돈 드는 사업이 됐다. 경제적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결혼을 실행하는 이들도 드물다. 졸업-취업-연애-결혼으로 이어지는 통념적 인생 각본을 별 무리없이 수행했던 한 세대 이전까지의 청년들과는 분명 다르다.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 의 저자 엄기호씨(사회학자)는 "청년층의 생애사적 기획이 불가능해졌다"고 표현한다. 연애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출산하는 생애사적 주기가 깨졌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연령대별로 주어진 삶의 시나리오가 있었다. 연령대에 맞춰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기획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런 시나리오를 뒷받침해주던 사회경제적 구조가 붕괴했다."

죽어라 열심히 살면 문제가 해결될까. "열심히 살면 성공할 수 있다는 어른들의 말이 우리 세대에게는 완벽한 거짓말"이라고 서유정씨는 말했다. "남들보다 덜 자고 덜 먹고 더 일하고 더 애써도 내게 돌아오는 것이 없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취업에 필요한 학점과 자격증도 너끈히 마련하는 건 도무지 잡을 수 없는 두 마리 토끼였다.

삶을 기획하기 위해서는 삶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에서는 높은 등록금을 감당하느라 불안정 노동자와 학생 사이의 경계를 오가고, 졸업 후에도 실업자와 비정규직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 삶을 안정적으로 예측할 수는 없다.

이것은 그들의 탓이 아니다. 반값 등록금 공약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부터 나왔다. 그러나 시행되지 않았다. 2009년 금융위기를 겪자 정부는 대졸 초임자들의 임금부터 삭감하자고 했다. 김도원씨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온갖 복지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정치에는 기대할 게 없다"고 말했다. 정혜교씨(27)는 "정치권의 빈말에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청년들은 국가의 말이 아니라 국가의 행동을 본다. 국가는 그들을 방치했다.

<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박송이·백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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