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길, 신비의 길, 군산 구불길

김은남 편집국장 ken@sisain.co.kr 2011. 5. 24.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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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 늘 화근이다. 군산 가는 당일까지 걷는 코스를 확정 짓지 못했다. 내 잘못만은 아니었다. 군산 구불길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그 길이 그새 7코스까지 늘었을 줄이야. 너무 빨리 확장된 길은 문제가 많다던데…. 그래도 취재 중 만난 사람들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어서 구불길을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나름 걷기에 일가견 있다는 이들이 공통으로 그랬다. "군산에 걷는 길이 생겼는데, 지자체가 만든 길치고 썩 괜찮더라"고.

경험칙상 이렇게 길이 여러 갈래일 때는 1코스를 택하는 게 가장 실패 확률이 낮다. 처음 만든 길인 만큼 풍광으로건, 다른 무엇으로건 그 동네에서 가장 자신 있게 내세울 만한 곳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번엔 일찌감치 마음속에서 1코스를 접었다. 구불길 1코스는 이름하여 비단강 길이라 해서 금강을 따라 걷는 길이다. 이 길은 누가 뭐래도 가을철 갈대와 철새를 감상하며 걸어야 제맛이다(가을에 다시 걷는 길 부록을 만든다면 꼭 이 길을 소개해드리겠다).

ⓒ이준석(http://blog.daum.net/sannasdas) 제공 옥산저수지는 1963~2008년 상수원 보호 구역으로 묶여 있은 덕에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돼 있다. 사진은 저수지 초입 수변산책로.

첫째가 월명이고, 둘째가 은파라고?

그렇다면 봄에는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일단 인터넷 구불길 카페(cafe.daum.net/gubulgil)에 오른 도보 후기를 죽 읽어봤다. 군산이 항구인 만큼 구불길 중에는 바다를 끼고 걷는 길, 바다를 조망하며 걷는 산길이 많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저수지를 끼고 걷는 길이 여럿이라는 사실. 4코스(구슬뫼길)가 옥산저수지, 5코스(물빛길)가 옥산저수지와 은파관광지(미제저수지), 7코스(새만금길)가 안골·은골 저수지를 지난다. 이 중 옥산저수지에 마음이 끌렸다. 1963년에서 2008년까지 45년간 저수지 일대가 상수원 보호 지역으로 묶여 있었던 덕에 자연 생태계가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군산역에 내려서 만난 토박이 최금자씨 말에 그만 귀가 또 얇아졌다. "아, 군산 하면 첫째가 월명이고, 둘째가 은파고, 옥산저수지는 그 다음이지." 그래서 월명공원에 먼저 올랐다가 후회 좀 했다. 이미 서울 여의도에까지 벚꽃이 활짝 핀 4월 중순이었건만, 군산의 봄은 아직 더뎠다. 서해와 금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까진 좋았는데 너무 춥고 황량했다. "여긴 바다가 있어서 남들보다 봄이 늦게 오고 여름이 빨리 온다"라고 공원 매점을 지키던 아낙이 말했다. 그나마 월명공원에서 구 도심으로 이어지는 구불길 6-1코스(일명 탁류길)가 있어 위안이 되었다(53쪽 상자 기사 참조).

ⓒ시사IN 김은남

군산 시내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옥산저수지로 향했다. 저수지 가는 길은 어수선했다. 도로 확장공사가 한창이었다. 저수지 초입 풍경도 조금은 심란했다. 멋없는 둑방길이 먼저 길손을 반겼다(구불길 사무국은 우동마을에서 시작하는 코스를 권하는데, 택시를 타면 기사 대부분이 우동마을 대신 옥산면사무소 인근 둑방길에 손님을 내려준다). 그러나 둑방길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놀랄 만한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옥산저수지 길은 단순하다. 저수지를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면 된다. 길 잃을 염려가 없다. 그런데 동쪽 방향으로 도느냐, 서쪽 방향으로 도느냐에 따라 느낌이 꽤 달라진다. 어느 쪽으로 출발하든 길은 곧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등산로이고, 하나는 수변 산책로이다. 등산로는 말 그대로 산을 타며 걷는 길이고, 수변 산책로는 물 가까운 쪽을 따라 저수지를 한 바퀴 도는 길이다.

총길이 5.5㎞에 이르는 등산로는 험한 대신 걷는 시간을 줄여준다.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두 시간에서 두 시간 반이면 충분하단다. 반면 수변 산책로는 길이 평탄한 대신 걷는 시간이 30분쯤 더 걸린다. 매주 옥산저수지를 찾는다는 공무원 박 아무개씨는 "산에 오르면 호수가 한눈에 들어와 좋고, 수변으로 걸으면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서 좋다"라고 했다. 두 길이 모두 탐났다.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두 길을 번갈아 걷는 것. 그러니까 저수지 둑방 길에서 청암산이 있는 서쪽을 향해 출발하되 처음 만나는 갈림길에서는 수변 산책로를 택하고, 3.5㎞쯤 되는 중간 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된 갈림길에서는 등산로를 택했다.

결론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특히 처음 만난 수변 산책로(2.3㎞)는 환상 그 자체였다. 산책로 초입 대나무 숲에서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잘생긴 대나무가 죽죽 뻗어 있는 것이 담양 대나무길 부럽지 않았다. 소나무 숲길을 지나고 진달래 군락을 지나니 옥빛 물에 몸을 담근 왕버드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경북 청송 주산지를 가보신 분은 알 게다. 물에 잠긴 왕버들이 얼마나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지. 주산지 왕버들만큼 내력이 오래인 것 같지 않았지만, 옥산의 왕버들도 충분히 신비로웠다.

ⓒ시사IN 김은남 옥산저수지 길은 청신한 기운이 살아 있는 이른 아침 시간이나 해질 녘에 걷기를 권한다.

첫 번째 수변 산책로가 끝나고 습지 체험지를 지나자 등산로가 나타났다. 호수 따라 걷는 길이 조금 지루해진다 싶을 즈음 나타난 산길이 반가웠다. 말이 등산이지 저수지 둘레 산길은 완만하기 그지없다. 가장 높다는 청암산 정상이 해발 115m다. 산길을 걷다보면 중간중간 햇빛 반짝이는 호수며, 평화롭게 펼쳐진 만경평야가 시야에 들어온다.

호숫길은 새벽 일찍 걸어야 제맛

산길이 다시 지루해진다 싶으면 수변 길로 내려오면 된다. 서쪽 수변길과 달리 동쪽 수변길은 폭이 좁다. 때로 하늘이 보이지 않는 대나무 숲 사이로 내 몸 하나 간신히 빠져나갈 외길을 지나야 한다. 아이들은 이런 길에서 오히려 더 신이 난다. 대나무 터널을 떠나려 들지 않는다.

이 길의 최대 약점이라면 걷는 중간에 가게나 식당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화장실은 있다). 그러니 게으르거나 준비성 없는 분들은 주의를 요한다. 저수지 입구에도 가게가 없으니, 먹을 것 마실 것은 출발할 때 미리 챙겨야 한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길을 다 걸을 즈음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수가 있다. 나처럼. 게으른 분께 드리는 또 하나의 팁. 가능하면 알람 맞추고 새벽 일찍 일어나시길 권한다. 호수는 역시 청신한 기운이 살아 있을 때가 제맛이다. 아니면 아예 해질 녘 이곳을 찾는 것도 방법일 듯하다.

옥산저수지를 다 걷고 나면 군산역 쪽으로 향하는 4코스 길, 또는 은파관광지 쪽으로 향하는 5코스 길을 선택하면 된다.

먹을거리군산의 '맛 4형제' 중 으뜸은…

군산은 전주와 더불어 전북을 대표하는 맛의 고장이다. 특히 아귀찜·꽃게장·생선회·생선매운탕이 유명해, 이를 '맛의 4형제'라 부른다고 한다. 이번 여정에서는 꽃게장을 택했다. 꽃게 살이 한창 통통하니 오를 철이어서였다. 군산나들목 인근 계곡가든은 전국적으로 입소문이 난 맛집이다. 워낙 손님이 붐벼서 그런지 서비스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다만 간장게장(1인당 1만9000원·사진 위) 맛만은 그 이름을 떨칠 만했다. 살아 있는 게를 얼음물에 넣어 기절시킨 다음 당귀·감초 같은 한약재 달인 간장 소스를 부어 담근다는데,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노란 알과 적당히 잘려 나온 게다리의 싱싱한 살점을 쪽쪽 빨다보니 짜지도 달지도 않은 달큼한 맛이 입맛을 돋웠다.

옥산저수지 길을 걷는 도보꾼에게는 옥산파출소 인근 '향촌국수'를 권한다. 깨끔한 내부와 단아한 인상의 주인장이 눈길을 끄는 집으로, 멸치와 콩나물로 우려낸 담백한 육수에 고명이라고는 송송 썬 대파밖에 없는 물국수(3000원·사진 아래) 맛 또한 정갈하기 그지없다.

밑반찬은 풋고추와 묵은지 두 가지뿐인데, 풋고추에 딸려 나오는 된장이며 간장·고추장 등은 주인이 인근 정안사 스님·신도들과 함께 해마다 직접 담그는 것이라고 한다. 매실 원액이 들어가 매콤하면서도 향긋한 비빔국수 또한 이 집의 인기 메뉴다.

김은남 편집국장 /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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