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류업체 사장하다가 고물상에서 '막일'PD수첩이 방송 못한 내 사연 취재해줘요"

2011. 5. 16. 09:0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김경년 기자]

김찬웅 (주)엔에프엔 대표가 'PD수첩'과 촬영하고도 방영하지 못한 데 대해 "지금이 유신시절이냐"며 하소연하고 있다.

ⓒ 권우성

"PD수첩 방송을 촬영하면서 목숨 걸고 모든 것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묻혀버리게 되어서 울분을 토하며 글을 올립니다. 꼭 기사화해서 이 문제를 널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12일 밤 < 오마이뉴스 > 편집국에는 한 시민기자로부터 이와 같은 '기사 아닌 기사'가 들어왔다.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PD수첩에 다 털어놨는데 불방되었다며 < 오마이뉴스 > 라도 나서서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이 글을 올린 사람은 대북 의류 위탁가공업체인 (주)엔에프엔 김찬웅 대표(43). 그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지금이 유신시대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지난해 5.24조치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는 최근 '남북경협 중단, 그후 1년'편을 제작하는 PD수첩 취재진을 만나 꼬박 이틀간 촬영에 협조했다. 그런데 이날 내려진 담당PD 인사조치로 다 물거품이 된 것이다.

5.24조치는 정부가 작년 천안함 사건 이후 개성공단을 제외한 모든 남북교역을 금지한 것으로, 북한을 상대로 위탁가공업을 하던 그에게는 날벼락과 같았다.

북에서 오기로 한 완제품 의류들을 반입하지 못하니 당장 클레임을 먹고 매장에서 쫓겨났으며 은행 압류가 들어와 건물과 사무실 집기는 다 경매로 넘어갔다. 더는 버틸 수 없어 작년말부터 휴업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천안함 사건에 대응하는 5.24조치 자체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국가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 아닙니까. 최소한의 조치만 해줬으면 이렇게 다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고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경기도 고양시의 한 고물상에서 막일을 하는 김 대표를 만나 억울한 얘기를 자세히 들어봤다.

"우리가 어겼으면 어겼지, 북한사람이 어긴 적 없다"

- 김 대표가 운영하는 (주)엔에프엔은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가.

"대북 의류 위탁가공업을 했다. 한국에서 원자재를 보내면 북한의 평양에서 이를 받아서 봉제해서 완제품을 다시 남쪽으로 보내는 것이다."

- 북한과의 사업은 정치적 리스크가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게 됐나.

"당초 중국측과 사업을 했는데, 중국의 물가가 급격히 오르는 바람에 생산단가를 맞추는 것이 어려워지자 대체생산지를 찾다가 북한 생산을 알게 됐다. 그래서 한국에서 생산된 원·부자재를 북한의 노동력과 결합시키면 좋은 비즈니스 모델이 되겠다고 판단해서 그해 가을부터 중국 생산을 포기하고 전량을 평양에서 위탁생산하는 것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북한 사람들은 만나보면 똑같은 사람이고 외려 솔직하고 거짓말도 안 했다. 내가 송금하겠다고 해놓고 어기면 어겼지, 그 사람들이 언제까지 물건 보내겠다고 해놓고 어긴 적은 없다. 정치적으로는 어찌 했는지 모르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굉장히 솔직했다."

- 위탁생산 절차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달라.

"우리 대표자가 한 달 혹은 40일에 한 번 정도 개성공단의 남북경협사무소를 방문해 북측 교역상대인 새별총회사 대표자를 만나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이 체결되면 우리는 인천항에서 소요자재를 배에 실어 북한의 남포로 보낸다. 그럼 새별총회사는 평양에 있는 '은하3무역' 공장에서 작업을 해서 제품을 생산한다. 완성된 제품은 남포에서 선적돼 인천항으로 온다. 우리는 제품을 인수한 후 10일에서 15일 사이에 새별총회사가 지정하는 구좌로 가공료를 송금한다."

- 기존의 중국 생산 방식과는 어떻게 다른가.

"한국의 원자재를 가지고 중국이 아닌 북의 노동력과 결합하니까, 중국에 달러 안 줘도 되고 남측의 다 죽었던 원자재 산업도 부흥할 수 있었다. 매일 만나지 않아도 일단 말이 통하니까 일하기도 좋았다."

- 이런 식의 위탁가공업은 언제부터 시작한 것인가.

"활성화된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이지만 실은 노태우 정권 때 처음 시작된 것이다. 이같은 식으로 일하는 업체가 30-40개 정도 있었는데 5.24조치로 철퇴를 맞고 지금은 중국, 베트남 등으로 흩어졌다. 나는 북한에 올인했기 때문에 피해가 그들보다 수십 배였다."

- 그동안 재미는 좀 봤나.

"5.24조치 전까지 단 1건의 클레임도 없었고 정부로부터도 특별한 제한이 없었다. 중국산에 비해 훌륭한 한국 원단을 사용하여 솜씨 좋은 북한의 봉제가 결합되니 품질에서 인정받는 생산전문회사로 컸다. 2008년 외환위기로 환차손을 입어 한번 휘청하긴 했지만 구조조정을 통해 작지만 알찬 회사로 키워 자체 브랜드와 더불어 타 브랜드 의류도 OEM생산을 해주는 프로모션 기능을 갖게 됐다. 그 결과 이마트, 이랜드 등 대기업 위주로 납품을 하게 됐다. "

김찬웅 (주)엔에프엔 대표는 5.24조치로 회사를 휴업하고 고양시의 한 고물상에서 막일을 하고 있다.

ⓒ 권우성

"물건 반입 못하고 회사는 휴업... 모든 것이 한순간 날아가"

- 천안함 사건 이후 5.24조치가 내려지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나.

"개성공단을 제외하고 북한을 상대로 한 반입·반출이 전면 금지됐다. 천안함 사건 이전에 이미 계약에 따라 원자재를 북한에 보내고 5-6월에 걸쳐 모두 181만 달러 상당의 제품을 받을 예정이었다. 5.24조치 때문에 초청장까지 받고도 경협사무소를 방문하지 못했고 납품받기로 한 제품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북에 만들어져 있는 물건을 반입하지 못하니까 매장에서 철수당하고, 브랜드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회사 건물은 경매처리되고 집을 정리해 원자재 업체들 결제처리했다. 작년말부터 회사는 휴업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한순간이다."

- 지금은 무슨 일을 하나.

"집을 정리했으니 처와 아이는 처가에 보내고 나는 지금 정신 차리려고 여기 고물상에서 일하는 거다. 낮에는 여기서 막일하고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는 가락동 수산시장에서 생선회사 경매차 운전도 하고 경매사 보조도 한다."

- 정부는 어떤 조치를 해줬나.

"당시는 겨울옷을 진행할 때였는데 이것을 한시적으로 허용해줬고,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서를 끊어오면 2% 저리로 긴급 자금대출을 했줬다. 그러나, 이미 은행 연체가 시작된 상태에서 보증서 끊어 가져가는 것은 의미가 없더라. 대출 받지 못했다."

- 대출 받더라도 사업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기간 버틸 수는 없지 않나.

"1년씩 연장해주는 조건이지만, 금리 2%라는 것 외에는 의미가 없다. 어차피 보증서를 1년씩 끊어와야 하기 때문에."

- 정부에 바라는 것은 무언가.

"이제 바라는 게 없다. 지난 3월 21일 정부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으니까."

- 손해배상액은 얼마나?

"납품받지 못한 제품의 단가에서 북측에 지불해야 할 임가공료를 뺀 21억 7천만 원이다."

"꽥소리라도 내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나"

- 승소 가능성은 있나.

"승패는 큰 기대 하지 않지만, 꽥소리라도 내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나. 지금 정부는 평범한 사람을 투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 PD수첩 > 도 방송하지 못하게 하는 것 봤지 않나."

- 억울하겠지만, 정부로서는 천안함 사건이 났는데 아무 보복 조치를 하지 않을 수 없잖나.

"5.24조치 자체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해한다. 그러나 국가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최소한의 조치만 해줬으면 이렇게 다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 최소한의 조치는 어떤 게 있을까.

"최소한 진행하는 제품은 반입할 수 있게 해주든지 해야 한다. 우리가 정부 허가받고 한 거지 우리 맘대로 한 거냐."

- 사업기반 다 무너졌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거냐.

"이렇게 살고 있지 않나. 지금 당장 재기는 불가능하고, 이런 데서 일하며 정신 차리려고 하고 있다."

- 그래도 노하우 있는데, 남북관계가 회복되면 다시 할 생각인가.

"대북관계가 풀리고 자금 여건이 되면 한다."

담당 PD "끝까지 싸워서 방송했어야 하는데..."

- PD수첩과 어렵게 찍은 방송이 나가지 못하게 됐는데.

"지금이 유신시절인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진짜 너무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D수첩과는 얼마나 촬영했나.

"하루는 촬영계획을 구상하고 또 하루는 종일 촬영했다. 하루 잡아 협력업체도 촬영하려 했는데 이번 일로 무산된 것이다."

-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PD수첩에서) 전화가 왔다. 소송에서 이기든 지든 별개로 하고. PD수첩이 '올곧은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었기에 취재에 응했다."

- 사태 이후 담당 이우환 PD는 뭐라고 하던가.

"내가 휴대폰 문자로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고 보냈더니 '제 문제는 괜찮습니다. 끝까지 싸워서 방송 했어야 하는데…'라고 답장이 왔다. 그래서 다시 '제가 할 수 있는 한 저도 한번 힘이 돼보겠습니다'고 보냈더니 '김 사장님을 제가 지켜드려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파이팅입니다. 나중에 술 한잔 하시죠'라고 왔다."

한편 이우환 PD는 < 오마이뉴스 > 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남북경협중단 조치 그 후' 아이템을 윤길용 국장이 '자신의 정체성과 위배된다', '시청률이 안 나온다'는 이유를 들어 취재중단을 지시했고, 이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 대북 위탁가공업체 대표의 삶 등을 조명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메스를 가하려던 PD수첩의 시도와 '시청률'을 올리는 것. 시사프로그램의 존재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마이뉴스 아이폰 앱 출시! 지금 다운받으세요.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