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뉴스]왜 영어강의가 문제인가?

2011. 4. 20.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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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사회부 이희진 기자]

뉴스의 속사정이 궁금하다. 뉴스의 행간을 속시원히 짚어 준다. [편집자 주] 지난 15일 카이스트 이사회가 서남표 총장을 사실상 재신임하고, 카이스트 혁신비상위원회가 구성돼 본격 활동에 들어가면서 카이스트 사태는 수습 국면으로 접어드는 분위기다.

이번 카이스트 사태는 우리나라 대학교육과 관련해 중요한 화두 하나를 남겼다.

바로 영어강의다.

수업을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 진행하는 강의 방식 말이다.

'전면 영어강의'는 '징벌적 등록금제'와 더불어 카이스트 사태 와중에 뜨거운 쟁점이 됐다.

두 사안이 학생들의 잇따른 자살로 촉발된 카이스트 사태와 직접적 관련이 있느냐는 또 다른 논란거리지만, 어쨌든 이번 사태 배경으로 집중 거론됐다.

이 가운데 징벌적 등록금제는 카이스트에 고유한 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어강의는 우리나라 대학 일반에 관련된 문제다.

오늘 Why뉴스는 그래서 대학 영어강의를 둘러싼 논란을 살펴본다.

▶먼저 영어강의가 카이스트 사태 배경으로 부각된 이유를 정리해 보자.

= 일부 카이스트 학생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데는 영어강의가 이들 학생에게 과도한 부담과 스트레스로 작용한 탓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카이스트 영어강의는 '전면 영어강의', '100% 영어강의'로 불릴 만큼 우리나라 대학 가운데 그 비중과 강도가 가장 크다.

교양과목인 일본어를 영어로 강의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연출될 정도다.

전공과목은 물론 교양과목까지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거의 모든 학생이 겪었을 영어 스트레스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사태 와중에 카이스트 학내 커뮤니티사이트에 '가장 큰 문제는 영어라고 생각한다'는 한 학생의 글이 올라왔다.

'입학하는 순간부터 영어강의로 4년을 살았는데, 수업을 제대로 들었던 강의가 없었다. 많은 친구가 수업 때 '멍' 때리다가 혼자서 공부하고 힘들어한다'는 내용이었다.

카이스트 사태 시발점이었던 '로봇영재' 고 조 모 군 역시 영어강의로 어려움을 겪었다.

조 군은 친구들에게 '영어로 진행되는 미적분학 수업을 따라가기가 벅차다'고 자주 고민을 토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전공 관련 지식 습득 자체도 힘겨운데 강의마저 이해하기 어려운 영어로 진행될 때 학생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상당했을 것이다.

▶ 학생들도 학생들이지만 영어로 강의를 해야 하는 교수들도 고충이 클 것 같다.

= 카이스트의 한 교수로부터 직접 얘기를 들어봤다.

서남표 총장 부임 이후 훨씬 까다로워졌다는 테뉴어 즉, 종신교수직 심사를 통과했고, 뛰어난 연구업적으로 언론에도 이름이 올랐던 교수다.

현재 대학원에서 강의 하나를 맡고 있는데 수업은 물론 영어로 진행한다.

이 교수는 "본 텍스트를 전달하는 데도 시간이 빠듯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연하겠지만, '우리말로 강의를 할 때보다 교재 내용과 의미를 전달하는 효율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는데, 바로 강의의 무미건조함이다.

수업 도중 학생들의 집중도를 높이고, 친밀감도 키우기 위해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을 수도 있건만 영어강의에서는 이게 아주 곤란하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교수는 강의를 통해 전공 지식을 전달할 뿐 아니라 학생들의 정서와 철학, 세계관을 함양시키는데, 영어강의로는 이도 매우 어렵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이번 카이스트 사태 와중에 '영어강의 거부'를 선언한 카이스트 교수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

= 수리과학부 한상근 교수가 "앞으로 우리말로만 강의를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든 이유가 그것이다.

한상근 교수는 "영어강의는 그나마 매우 적은 교수와 학생의 인간적 접촉을 단절해 버린다"고 지적했다.

"이미 많이 삭막한 학생들 정서를 더 삭막하게 만들 뿐"이라고도 했다.

교수는 익숙지 않은 남의 나라 말로 지식을 전달하느라, 학생들은 반드시 습득해야 하는 지식을 실어 오는 남의 나라 말을 알아듣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런 강의실에서 스승과 제자가 애틋한 정과 인간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카이스트 학생과 교수들은 전면 영어강의에 대해 사실상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 학교 교수협의회가 최근 교수와 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현행 전면 영어강의 제도 유지'에 찬성한 교수는 전체 응답자의 10%, 학생은 13%에 불과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카이스트뿐 아니라 전국 유수 대학들은 언론사 등의 대학평가를 의식해 경쟁적으로 영어강의를 늘리고 있다.

▶하지만, 영어강의를 적극 옹호하는 주장도 나오지 않았나?

= 한상근 교수의 영어강의 거부 선언이 보도되자 포스텍 서의호 국제화위원장이 한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 이메일에서 서의호 위원장은 "포스텍에서는 영어구사력이 뛰어난 교수들의 강의에 학생들이 몰리고 아무런 불평이 없다"라고 밝혔다.

서 위원장은 "영어가 국제 공용어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학생들은 국제 공용어로 세계와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며 전면적 영어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서 위원장은 "동의하진 않지만, 영어 때문에 정서가 부족해진다면 교수가 더욱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교수들의 영어 구사력이지 학생들의 이해력이나 철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 아닌가?

= 영어강의를 옹호하는 관점은 철저하게 실용적이다.

포스텍 서의호 위원장은 앞서 언급한 이메일에서 "영어는 외국어도 아닌 국제 공용어이며, 학생들이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적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미국에서 공부하거나, 글로벌 기업에 들어가서 한국어로 말해달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며 밝힌 견해다.

'실용을 위해 우리나라 대학에서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 학문을 하자'는 주장이다.

최근 소설가 신경숙 씨의 '엄마를 부탁해'가 영어로 번역돼 미국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며 한국 문학 세계화 가능성을 열었다는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성공 요인의 으뜸으로 꼽히는 게 잘 된 번역이다.

해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 때가 되면 우리 언론과 국민은 한껏 기대를 부풀렸다가 낙심하기를 반복하며 '번역의 아쉬움'을 지적한다.

'우리 문학 세계화와 노벨 문학상 수상을 위해 신춘문예 공모를 영어 등 외국어로 하고, 아예 문학을 외국어로 하자'고 한다면 영어강의 옹호론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 그렇다고 영어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나?

= 물론, 영어는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그 필요성과 중요성은 실용의 도구로써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다.

유창한 영어 습득은 효과적인 영어 교육을 통해 이루면 될 일이고, 우리 문학의 세계화는 훌륭한 번역가를 양성하면 될 일이다.

실용의 도구에 불과한 영어를 익히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우리말로 학문을 하지 않고, 우리말로 문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말과 우리글은 누구나 다 동의하듯 우리의 얼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강점기를 돌아보며 가장 아픈 기억으로 떠올리는 것 중 하나가 일제가 우리말과 우리글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학교에서는 일본어 수업이 강제됐다.

과거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한 국가가 일본이 아니고 미국이어서, 학교에서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영어만 쓰게 했다면, 크게 환영할 일이었을까?

연세대 영문과 이성일 명예교수가 2009년 2월 정년퇴임을 하면서 한 강연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서 오늘 Why뉴스를 끝내고자 한다.

"모름지기 모든 학문은 자국어로 이루어질 때에만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외국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도구일 뿐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자국어에 대한 긍지와 사랑이 없이 학문과 예술이 꽃핀 예를 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이탈리아의 시에나대학에서는 이탈리아 말로, 독일의 하이델베크르대학에서는 독일어로, 프랑스의 소르본대학에서는 프랑스어로 심도 있는 연구와 사변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우리만큼은 영어라는 한 외국어에 의존하여야만 학문의 국제화며 세계화가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 천박하고 부박한 생각은 단연코 척결돼야 합니다"heejjy@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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