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우면 그냥 송장.. 사람인가 싶더라니께"

2011. 1. 31.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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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재완 기자]

"그 고생이야 말로 할 수가 없지. 우리는 그냥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고생만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만날 자살하는 것만 생각하면서 살았어. 한마디로 사는 게 죽는 것만 못했어.

참으로 참혹하고 이 암담한 역사, 다시는 우리 후손들에게는 물려줘서는 안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바로 잡아야해. 역사는 옳게 써야 해. 역사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돼. 내 나이 여든네살인데, 오직 눈물로 후손들에게 호소하는 것은 이 역사를 올바로 잡아달라는 것뿐이여."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당해 일본 나가사키 하시마 탄광에서 일했던 최장섭 옹.

ⓒ 오마이뉴스 장재완

열여섯의 나이로 '지옥의 섬'이라고 불리는 일본 나가사키 하시마(일명 군함도)에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최장섭(83) 옹은 눈물을 글썽이며 쉴 새 없이 고통의 기억을 토해냈다.

지난 30일 오후 6시 대전 풀뿌리시민센터에서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증언 듣기 모임'이 열렸다. 이날 모임에서는 1943년 2월 일본 나가사키 앞 바다 하시마 탄광에 끌려가 2년 6개월 동안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최장섭 옹이 증언자로 나서 생생한 기억을 털어놨다.

'지옥의 섬' 하시마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다고?

일본 나가사키 앞바다에 떠 있는 하시마, 일명 '군함도'.(2010년 6월 군함도 홍보관에서 자료 촬영)

ⓒ 오마이뉴스 장재완

최장섭 옹이 일했던 하시마는 일본 나가사키 반도 서쪽으로 약 4.5km 떨어져 있는 섬으로 총면적이 0.1㎢, 둘레 1.2km, 동서 160m, 남북 480m의 작은 섬이다. 무인도였던 이 작은 섬은 1800년대 초 석탄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섬 주변에는 10m의 옹벽이 쳐졌고, 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졌다. 메이지유신 이후 미쓰비시 석탄 광업주식회사가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하면서 인부가 필요했고, 조선인은 물론, 중국인과 미군 포로 등도 이곳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하시마'는 바다에 떠 있는 해군 전함과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라는 별칭을 갖게 됐다. 일본인들은 군함도라는 이름을 더 사랑하고 있으며, 군함도라는 이름으로 사진집과 동화책, 전시회, 관광 안내책자가 제작되어 왔다. 또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된 바 있다.

하지만 이 '하시마'는 군함도 말고 '감옥섬', '지옥의 섬'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일본 근대화의 번영을 뒷받침을 했던 탄광산업이 1955년에 절정기를 이룬 뒤 점차 석유시대로 기울면서 결국 1974년 이 하시마 탄광도 폐광하고 말았다. 자연히 사람들도 모두 떠나 다시 무인도가 되었다.

현재 일본 정부와 나가사키시는 이 하시마를 규슈와 야마구치 근대화 산업유산군의 하나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폐광으로 버려진 땅을 관광지로 만들 속셈이다. 문제는 이 지옥의 섬의 역사에서 조선인 강제징용의 역사를 모두 지워버렸다는 것.

이 같은 움직임에 그 동안 조선인 강제노동 사망자 원인규명에 힘써왔던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 등 일본단체들이 이에 반발하고 있다.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것. 최장섭 옹의 이날 증언도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추진됐으며, 오는 2월에는 나사사키에서 최장섭 옹이 직접 증언에 나설 예정이다.

열여섯 나이로 형 대신 끌려간 최장섭 옹

전북 익산시 낭산면이 고향인 최씨는 16살 때 강제징용을 당했다. 그의 아버지 또한 징용을 당해 함경북도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간 상황이었다(해방 후 그의 아버지는 한쪽 손의 손가락이 모두 절단된 채 돌아왔다고 한다). 징용을 피해 숨어살던 형을 대신해 '너라도 가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그는 어느 날 당시 익산군청으로 끌려갔다.

"하루는 윤OO이 우리집에 오더니 '니 형 대신 가야 한다'면서 억지로 낭산면 주재소로 끌고 갔어. 그 때 한국사람 친일파가 그 곳 순사부장이었는데, 그 사람에게 끌고 가서는 데려가야겠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예스' 한단 말야. 그래서 익산군청으로 끌려갔는데, 가서 보니 열 다섯 살에서 열 아홉 먹은 애들이 수십 명이 모였는데 한 오십 명이나 되려나 그랬어. 그 때 익산군수가 임OO이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보더니 왜 이렇게 나이 어린사람까지 보내야 하느냐고 하니까, 그 때 윤OO이 '일본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는 할 수 없다, 거기는 굴이 좁아서 이런 어린 사람이 드나들기 쉬우니까 보낸다' 그렇게 말하더라고, 그러니까 '보내라'고 하더만, 다 친일파니까 군수나 누구나 다... 그냥 못이기는 척 하고 보내더라고..."

그렇게 기차에 몸을 실은 최씨는 함열에 도착했다. 함열은 낭산과 가까운 기차역이다. 그 곳에 어머니와 여동생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아들을 보내는 어머니는 연신 기차에 대고 합장을 하며 절을 했다고 했다.

"엄니가 나를 보더니 눈물을 흘리고, 기차에 대고 절을 하는데 참 기가 막히더만, 아이고.. 참 나도 눈물이 나고..."

8명 정도의 자신들을 감시하는 사람들 때문에 도망갈 수도 없었던 최씨 일행은 기차를 타고 대전을 거쳐 부산에 도착해서야 이들을 데리러 나온 일본인에 의해 자신들이 일본 나가사키로 간다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나가사키 하시마에서 이들을 데리러온 대장(편제대장, 최씨는 이 사람을 '원장'이라고 부른다)은 이들을 연락선에 싣고, 후쿠오카로, 다시 가고시마로, 다시 나가사키로, 그리고 드디어 하시마로 데리고 갔다.

"사방이 바다인 하시마, 이웃섬인 다카시마가 있고 일본의 최남단이여 거기가, 그래서 거기에 도착해 보니까 어떻게 집을 졌는지, 집이 9층 아파트인데 나는 거기를 보면서 혹시 여기가 중국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 그래서 거기를 들어가 보니까 제일 밑 지하층을 우리 보고 쓰라고 몰아넣더라고... 1중대, 2중대, 3중대 하면서 우리를 배치했어."

하시마의 최전성기인 1945년에는 이곳 인구가 약 53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탄광노무자가 1943년 기준으로 일본인 2252명, 조선인 500명, 중국인 240명이었다. 이 작은 섬 안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관청과 신사, 영화관, 수영장, 병원, 미용실, 파친코, 상점, 아파트 등 없는 게 없었다. 9층짜리 아파트의 햇볕이 잘 드는 고층부에는 탄광 직원들이 살았고, 저층부에는 광원들이 살았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 지하층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살았다. 그 곳은 태풍이 불고 풍랑이 일면 물에 잠기는 곳이었다.

"가는 날부터 대뜸 콩깻묵 밥하고 시래기 국을 주는디, 도저히 먹을 수가 없고, 견딜 수가 없더만. 그냥 가는 날부터 어떻게 하면 이 바다를 건너 도망칠까 그런 생각만 했지 뭐."

탈출하다 잡혀 온 노동자, 병신이 되도록 매질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당해 일본 나가사키 하시마 탄광에서 일했던 최장섭 옹.

ⓒ 오마이뉴스 장재완

그러던 중 한 번은 탈출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목포에서 온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목포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으로 매우 똑똑한 데다 수영을 잘했다고 한다. 그가 갱목을 이용해서 뗏목을 만들어 육지로 도망하자는 계획을 세웠고, 실제 7명이 옮겼으나 도망가던 중 수영을 못하는 사람 3명은 바다에서 허우적대다가 잡혀오고, 나머지 4명은 육지에 도착했으나 조사단에 의해 모두 잡혀왔다고 한다.

"잡아온 사람들을 주욱 세워놓고 매질을 하는디, 고무로 만든 와이어를 기계에서 벗겨서 매를 만들어서 후려치니까 그냥 피가 묻어나고 살점이 떨어지고 세상에... 그냥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어... 우리들에게 그것을 다 보여주면서 다시는 하지 말라고... 아이고, 다들 병신이 됐어, 그 때 맞아서 그렇게 병신이 다 돼서도 탄을 캐고, 아이고야..."

하시마 탄광은 해저 400~900m를 내려가는 곳에 있었다. 3km 가량 떨어져 있는 다카시마와 해저로 갱도가 이어져 있었고, 첫날 이들을 데리고 해저로 내려가 갱도와 채굴과정, 다카시마를 견학 아닌 견학을 시킨 후 바로 다음날부터 채탄작업을 시켰다고 한다.

"갑자기 후욱하고 떨어지면(해저로 내려가는 수직 엘리베이터) 그냥 금세 죽는 것만 같았어, 그 아래까지 가는 데 1분도 안 걸렸으니까, 아마 비행기보다 빠를 거여... 내려가 보니까 거기는 중국포로, 미군포로도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탄차를 밀고 있는 것을 보니까 그냥 누우면 그냥 송장이여, 일을 허는데 저게 사람인가 싶더라니께."

최씨가 본 미군은 연합군 포로들로 추정된다. 일본군은 이 포로들을 실제 강제노역에 투입하기도 했지만, 미군의 공습을 막기 위한 방패막이로 삼았다고 한다. 미군포로들을 곳곳에 분산 배치함으로써 미군이 함부로 공격을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막장에 가보니 조개탄을 캐고 있었는데 팬티 하나만 입고 땀이 비 오듯 하는데 그런 디서 일을 하더라고, 이것 참 완전히 우린 죽었구나. 이렇게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살 바에야 차라리 자살하는 게 낫지, 그런 생각만 들었지. 우리 나이 다 열 다섯, 열 여섯, 열 일곱 그랬는디, 최고가 열 아홉이었느니까... 그냥 누우면 아이고 소리가 항상 절로 났었지.

지하로 (엘리베이터를 타고)내려가면 현장에 가는 탄차를 타고 한 30분을 가는데, 거기에 가면 옷을 전부 벗어. 아무리 겨울이라도 더워서 못 사니까. 팬티 하나만 걸치고 막장에서 채굴을 하는디, 한 번은 느닷없이 무너져서 내가 여기 가슴까지 탄이 가득 차올라 죽는 줄 알았지, 근데 일본 사람이 막 끄집어내서 살았어.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살아나서 그 때 병원에 한 2주 정도 입원했었지. 그 때 다친 허리 때문에 지금도 아퍼 죽겄어.

내 앞에서 사람 죽는 것도 봤지. 전라남도에서 온 한 사람은 탄이 흘러나가는 구멍에 끌려들어가서 죽어 버렸어. 거기가 쇠로 만들어져 있는데 미끄럽거든. 그러니까 원장(편대 대장)이 와서는 '사람을 죽여 놓고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고 큰 소리를 치니까, '지가 미끄러져서 죽은 거라'고 변명을 하더만..."

1986년 경 시민단체에 의해 발굴되어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1925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 까지 하시마에서 사망한 사람이 모두 1295명이며, 이 중 조선인이 무려 122명(남 110명, 여 12명)이었다고 한다. 사망원인은 주로 압사, 질식사, 폭상사, 변사였다.

밥은 콩깻묵 주먹밥 한 덩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었지"

"얼마나 배가 고픈지. 현장에 가면 그냥 콩깻묵 주먹밥 한 덩이 먹고 살았어. 밖에 나오면 그 주먹밥에 시래기국 주고... 정말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었지 거기는."

최씨는 하루 24시간 3교대로 일을 했다. 야간조가 되기도 하고 주간조가 되기도 했다.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쉬는 시간이면 하시마에 있는 극장에 모아놓고 '죽창이 총보다 빠르다', '바다에서 올라오면 바로 찌르면 된다'고 하면서 죽창으로 미군 모형을 찌르는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1943년 2월 끌려갔던 최씨는 해방이 되던 1945년 8월까지 약 2년 6개월 동안 지옥의 섬 하시마에서 그렇게 살아야 했다. 그리고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갱도가 무너지기도 하고, 일대가 불바다가 되어 더 이상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나가사키가 초토화가 된 어느 날 시내 청소를 하라며 그를 데리고 갔다. 그렇게 조선인 소년은 강제노동에 이어 원폭의 위험지대로 동원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3개월 가량을 하시마에서 아무 할 일 없이 지내다가 11월이 되어서야 일본인이 빌려 준 작은 통통배 다섯척에 동료들과 나누어 타고 마산항에 도착,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같은 지옥에서의 대가인 임금은 주겠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고, 받은 적도 없었다. 그냥 하루에 담배 열 개비 주는 게 전부였다.

"우리는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른 사람들이여, 참으로 참혹하고 암담한 세월이었는데, 다시는 우리 후대자손에게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역사는 옳게 써야 하는 것이여. 역사는 거짓말이 없는 거거든. 그런데 하시마를 군함도라고 이름을 바꾸어서 관광지로 만든다고 하니, 우리가 고생했던 그 역사는 쏙 빼고 말여.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가 겪은 고생은 참말로 너무도 억울하지. 내 나이 여든 네 살인데 오직 눈물로써 우리 후손들에게 바라는 것은 이런 역사를 올바로 잡아달라는 게 내 마지막 소원이여."

"한일 우호증진은 올바른 역사 위에 세워져야"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 다카자네 대표(나사사키 오카 마사하루 평화자료관 이사장).

ⓒ 오마이뉴스 장재완

최장섭 옹은 그렇게 마지막 소원을 토해내면서 증언을 마쳤다. 이날 모임에는 일본인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 다카자네 대표(나사사키 오카 마사하루 평화자료관 이사장)도 참석해 "우선, 일본이 지었던 죄에 대해서 깊이 사죄하는 마음이다"며 "우리는 일본의 전쟁책임을 젊은 세대에게 교육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본에서는 정부 뿐 아니라 학교교육에서도 역사가 무시되고 왜곡되는 경향이 있다, 최 선생이 나가사키에 와서 증언을 하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들려주는 것에 있어서 매우 의미가 있다"면서 "일본과 한국의 우호증진은 역사의 올바른 인식 토대위에서 세워져야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그런 면에서 하시마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면서 조선인과 중국인 강제연행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일본침략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섬을 관광명소를 만드는 것을 우리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굴절된 일본의 역사를 정확히 담아내는 세계문화유산 등록이라야 나가사키 시민들에게도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올바로 담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일100년평화시민네트워크와 조선인강제노동조사회는 오는 2월 10일 오후 6시 나사사키 카톨릭센터에서 '나가사키 군함도 강제동원 피해자 증언집회'를 열어, 최장섭 옹의 증언을 들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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