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중산층 다 어디로 갔나.. '서민'에 밀려난 '중산층' 담론

2010. 8. 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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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나도 서민을 떠드는 통에 슬그머니 밀려난 말이 있다. 중산층. '중산층 시대' '중산층 사회' '중산층 강국' 같은 말이 유행하고, '4000만 중산층 사회 건설' '중산층 비율 70% 확대' 등이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내걸리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중산층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해낸 우리 사회의 중추 세력이었다. 서민이라고 하면 사회의 주력이라기보다 보살펴 줘야 할 약자, 혹은 소수자로 취급된 게 사실이다.

여야를 떠나 주류 정당들의 언어는 명백하게 중산층을 겨냥해 왔다. 서민은 소수 정당들이 거론하는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2010년 한국 정치의 중심은 서민이다. 여든 야든, 진보든 보수든, 서민을 향해 호소하는 중이다. 서민은 어느새 우리 사회 담론의 중심 개념으로 전진 배치됐다.

정치학자이자 출판사 후마니타스 대표인 박상훈 박사는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에 있어서 중산층은 헤게모니 담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며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든, 선진국에 대한 정의든, 그 핵심에는 중산층이 있었다. 예를 들면, 중산층 중심의 경제, 중산층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등이 한국 정치의 중심 테마였다"고 말했다. 그는 "서민이라는 말은 시혜적 관점에서 사용됐고, 정치권에서 적극적으로 호명되지 않았다"며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진보 보수 가리지 않고 서민을 정책적 담론의 중심으로 등장시킨 게 굉장히 흥미롭다"고 덧붙였다.

서민과 중산층, 두 단어의 자리바꿈은 왜 일어났을까?

가속화하는 중산층 붕괴

먼저 살펴볼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가속화하는 '중산층 붕괴' 현황이다. 2009년 4월 현대경제연구원은 가구소득을 기준으로 중산층 가구 비중이 2005년 57.5%에서 2008년 49.9%로, 3년간 7.6% 포인트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지난달 보고서에 따르면,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중산층 가구 비중은 1996년 68.5%에서 2006년 58.5%로, 2009년에 다시 56.7%로, 13년 사이에 11.8% 포인트 감소했다.

두 연구는 가장 중간에 있는 중위소득을 100%로 놓고, 50∼150%에 포함되는 가구를 중산층으로 보는 일반적 기준을 적용한 것이다. 중산층에서 떨어져나간 사람들은 3분의 2 정도가 빈곤층으로 추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3분의 1은 상류층으로 올라섰다. 상류층 비중은 1996년 20.3%에서 2009년 24.1%로 바뀌었다.

최근 한 신문은 올해 경차 판매가 16만대에 육박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것이라고 보도하면서 경차가 잘 팔리는 이유 중 하나로 중산층 붕괴를 들기도 했다. 민주당 전병헌 정책위위장은 "중산층이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는 2005년 이후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고, 지난 대선에서 '경제대통령'을 뽑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했다"고 분석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운영위원장인 이상이 제주대 의대 교수는 "중산층이 하강 분해돼 국민의 70∼80%가 서민이 됐다"고 주장한다. "과거에는 중산층이 70%까지 됐고, 서민이라면 아주 가난한 사람들을 얘기했다. 그런데 지금은 양극화가 심해져 중위소득 가구라고 해도 소득 자체가 낮을 뿐만 아니라 노후, 교육, 주거, 일자리 불안으로 삶의 불안정성이 커져 중산층과 서민을 별도로 구분하기 어려워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중산층 의식' 붕괴는 더 급속

어떤 자료를 보더라도 중산층 붕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건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통된 문제이기도 하다. 주목되는 것은 중산층 붕괴보다 더 급속하게 중산층 의식의 붕괴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산층이라는 자부심 대신 서민이라는 위기감에 지배당하는 국민이 빠르게 늘고 있다. 주변에서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전병헌 정책위의장은 "과거에는 중산층 의식을 갖고 있는 분들이 60% 가까이 됐다면 지금은 본인이 서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70%는 된다"며 "외환위기를 겪고 2005년 이후 '양극화' '8대2 사회' 등이 유행하면서 국민 사이에서도 자신이 서민에 속한다는 생각이 확산됐다"고 분석했다.

2007년 11월 발표된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19세 이상 성인의 중산층 귀속의식은 외환위기 이전에 60∼70%였으나 2006년에는 28%까지 추락했다. 이 수치는 '심리적 중산층'이 얼마나 붕괴됐는지 보여준다. 이상이 교수는 "국민은 온통 양극화에 대한 불만과 걱정에 휩싸여 있는데, 거기에 대고 중산층 얘기를 한다면 감정만 건드리게 되는 셈"이라며 "정치권이 중산층 대신 서민이란 말을 쓰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박상훈 박사는 중산층 의식의 붕괴와 관련해 흥미로운 진단을 내놓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시대와 만나면서 경제적 불평등이 커진 게 사실이고, 반대세력이 두 정부를 비판하는 논리의 핵심에 "중산층이 무너진다" "서민 삶이 어려워진다"는 얘기를 세움으로써 서민 의식이 확산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보수세력이라면 통상 서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게 마련인데,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공격하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보수 쪽에서도 이 단어를 채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복지가 최대 이슈로

지난 5월 발표된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 보고서는 일본에서 중산층 붕괴가 가속화하는 두 가지 주요 원인으로 수입 감소와 함께 수입이 없는 고령자 증가를 꼽았다. KDI 유경준 선임연구원은 "가구소득을 기준으로 중산층을 분류하는데, 고령화나 1인가구 증가 같은 가족구조 변화도 빈곤층을 늘리는 원인이 되고 있다"며 "세계화와 기술 진보, 고령화 등으로 중산층 해체 속도는 더 빨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중산층 비율이 줄어들면 성장지향형 사회보다 분배지향형 사회로 간다"며 "앞으로 복지문제가 사회적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상이 교수도 "과거는 서민들만 삶이 힘들고 불안했지만 요즘은 중산층도 비슷하다"며 "국가 전체적으로 복지가 필요해진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중산층이라고 하면, 국가가 크게 도와주지 않아도 시장만 제대로 만들어 주면 알아서 자기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중산층은 국가에 복지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국가도 그들에게 복지를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중산층도 복지가 필요하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복지에 대한 광범위한 요구는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이슈가 영향력을 발휘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박상훈 대표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지난해부터 복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10월 전당대회를 계기로 복지를 당의 제1 강령으로 삼겠다는 태세다.

중산층을 중심에 둔 기존 담론은 경제성장을 강조해 온 시대의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 등장한 서민 담론은 사회보장과 복지, 세금, 분배 등의 문제를 포괄하며 복지국가 담론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중산층과 서민, 두 단어의 자리바꿈은 그 단어가 각각 대표하던 성장과 복지라는 담론의 자리바꿈일 수도 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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