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반무마니경'에서 춘추전국시대로 바뀐 치킨 월드컵

고재열 기자 2010. 7. 14.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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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을 계기로 치킨 소비가 급증했다. 프라이드 치킨과 양념 치킨 외에도 다양한 메뉴가 정착되었다. '국민 안주'로 떠오른 치킨 소비문화를 짚어보았다.

지난 6월2일 자정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트위터 이용자 100여 명이 모였다. 한 손에는 포장 치킨이, 다른 한 손에는 맥주가 들려 있었다. 지방선거로 MB 정부를 견제하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즉석 ‘트위터 번개(트위텁)’였다. 치킨과 맥주로 ‘치맥 번개’를 한 것이었는데, 트위터 이용자들이 들고 온 ‘각닭각색’의 50여 마리 치킨이 서울광장 무대에 진열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치킨과 맥주는 흥겨운 잔치 음식이 되었다. 

ⓒ시사IN 윤무영 <시사IN> 회의실에서 트위터 이용자들과 함께 ‘치킨 품평회’를 해보았다.
‘치킨 대세론’은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극명하게 확인되었다. 동네 치킨집에서 닭날개에 다시 털이 돋은 듯 치킨이 무시로 팔려나갔다. 한국팀 경기가 시작할 때 주문하면 경기가 끝날 무렵이나 도착할 정도였다.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한 치킨 가게 주인은 “너무 바빠서 닭들이 그냥 주소 들고 직접 찾아가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대표적 치킨 브랜드인 BBQ치킨의 경우 평소 하루 12만 수(마리)의 닭을 팔았지만 한국팀 경기가 있는 날에는 40만 수 이상이 팔렸다. 6월 한 달간 평소보다 40% 이상의 닭이 수입되었다.

전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과 치킨은 어느 면에서 통하는 부분이 있다. 종교적 이유로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금지하는 지역은 있지만 닭을 금하는 곳은 거의 없다. 또한 공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찰 수 있는 축구처럼 닭도 고급 요리는 아니어서 누구든 먹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기내식으로 애용된다.

소비자들은 월드컵 기간에 새로운 치킨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프라이드 치킨과 양념치킨이 치킨계를 양분해 소비자들에게 ‘반반무마니경(프라이드 반, 양념 반, 무 많이)’을 외치던 시대에서 춘추전국시대로 바뀌었다. 좋아하는 치킨 브랜드와 메뉴가 좋아하는 대표팀, 축구선수만큼이나 다양했다. 사람들은 새로 경험한 치킨 맛을 트위터에 올리기 시작했다.

치킨 선호도, 교촌〉굽네〉네네〉BBQ 순

기자는 트위터에 본격적으로 치킨 이야기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치킨에 대해 2000여 개 이상의 멘션(댓글)이 왔다. 다들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심지어 치킨 속에서 인생을 읽기도 했다. “10대 친구들이 좋아하는 치킨, 20대 애인이 좋아하는 치킨, 30대 상사가 좋아하는 치킨, 40대 자식들이 좋아하는 치킨, 50대 이상 몸에 좋고 씹기 편한 치킨….”

치킨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모델로 나선 아이돌 스타 이야기로 이어졌다. 굽네치킨 모델인 소녀시대를 비롯해 원더걸스(BBQ치킨) 티아라(네네치킨) 카라(구어좋은닭) 포미닛(다사랑치킨) 등 아이돌 그룹이 치킨 브랜드 모델로 활동한다. 지난해 연말 굽네치킨에서 치킨을 주문하면 소녀시대 화보 달력을 사은품으로 주었는데 팬들은 “소녀시대 달력을 샀더니 치킨을 덤으로 주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치킨 브랜드들도 유행에 맞게 메뉴를 설명할 때 ‘매달구(매콤 달콤하게 구운·BBQ치킨)’라고 하는 등 젊은 세대의 기호를 반영한다. 치킨이 유행과 결부되면서 새로운 스타일의 치킨들이 쉽게 시장에 안착할 수 있었다. 유행에 민감한 젊은 세대가 새로운 치킨을 바로바로 받아들였다. 마케팅 비용이 증가하면서 치킨 가격이 오르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요즘은 배달 치킨 한 마리 값이 보통 1만5000원 내외다.

내친김에 트위터 설문조사 서비스를 이용해 ‘치킨 베스트 일레븐’을 선발해보았다. 선호하는 치킨 브랜드와 메뉴를 물었는데 많은 트위터 이용자가 설문에 적극 응했다. 설문 문항에 없는 치킨 맛집을 추천해주는 이용자들도 많았다. 특정 브랜드와 메뉴가 독주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취향이 공존하고 있었다. 

치킨 선호도 순서는 이랬다. 교촌치킨 간장순살치킨(71표) 굽네치킨 순살치킨(67표) 네네치킨 파닭(66표) BBQ 올리브치킨(52표) 보드람치킨 프라이드(50표) KFC 프라이드(34표) 또래오래 갈릭플러스(26표) 페리카나치킨 양념통닭(25표) 오븐에빠진닭(24표) 영양센터 전기구이닭(23표) 고대 삼성통닭(23표) 순이었다. 순위권에 들어온 치킨 브랜드와 메뉴 속에는 최근 치킨 트렌드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월드컵 기간에 치킨 소비량은 평소보다 4~5배 많았다.
선호도 조사를 통해 치킨의 유행 변천 과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시장 닭집에서 바로 잡아 튀겨주는 닭을 먹다가 브랜드 치킨을 먹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 말(림스치킨)이다. 30여 년 동안 버무려 먹는다(양념통닭)-튀겨 먹는다(프라이드 치킨)-간장으로 양념한다(안동찜닭)-맵게 먹는다(불닭)-구워 먹는다(오븐구이)-얹거나 뿌려 먹는다(파닭/마늘닭) 순서로 유행이 변해왔다.

선호도 순위를 보면 배달 치킨의 전성기를 일궜던 양념 치킨이 주력 메뉴인 페리카나치킨이나 맥시카나치킨 등은 이제 이전만큼 인기가 있지 않다. 웰빙 바람이 불면서 재료의 신선도가 파악되지 않은 양념 치킨은 요새 선호하지 않는다. 멕시카나, 페리카나, 처갓집, 이서방, 스머프 등 초기 브랜드 중에서 페리카나와 맥시카나만이 세를 유지하고 있다. 어렸을 적에 양념 치킨을 주로 먹었던 동포들이 선호해 해외에서는 인기가 좋다. 

한국형 치킨이 다국적 브랜드 압도

프라이드 치킨 중에는 올리브유를 넣어서 웰빙 개념을 더한 BBQ치킨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치킨 베스트 일레븐’에 유일하게 꼽힌 용병선수인 KFC가 프라이드 치킨의 표준을 정립했다면 BBQ치킨은 이를 계승 발전시켜 한국형 프라이드 치킨의 전범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에 매장 1000개 이상을 두고 있는 BBQ치킨은 해외에서도 평가가 좋아 ‘해외파 치킨’으로 꼽힌다. KFC를 동네형 치킨으로 탈바꿈한 부어치킨도 요즘 각광받는다. 다국적 브랜드가 맥을 못 추고 국내 브랜드가 해외에도 수출될 만큼 한국이 치킨 강국이 된 데는 우수한 식문화의 전통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맛의 토착화가 잘 되어 있어 외국 브랜드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BBQ치킨과 더불어 양대 강자로 꼽히는 교촌치킨 역시 한국형 치킨 모형을 만들어낸 사례로 평가받는다. 간장으로 닭고기에 양념을 하는 것은 안동찜닭의 유행을 통해서 그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교촌치킨은 이 간장양념이 잘 밴 치킨으로 입맛을 사로잡았다. 비슷한 시기 홍초불닭 등 매운맛을 낸 치킨이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결국 자극적인 맛보다는 감칠맛이 오래 살아남았다. 

오븐에 구운 통닭 브랜드들 역시 웰빙의 정점에서 나타났다. 토종 전기구이 닭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양센터도 있지만 요즘은 굽네치킨이나 오븐에빠진닭 오꾸닭(오븐으로 구운 닭) 등 오븐으로 구워낸 닭이 인기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저소득층이 주로 프라이드 치킨을 먹고 중산층이 구워낸 닭을 먹는 현상과 비슷한 양상이다. 

전국 곳곳의 ‘시골닭’ 서울로 상경 중

치킨의 트렌드와 관련해 가장 최근에 나타나는 양상은 파를 얹어 먹거나 마늘을 뿌려 먹는 등 느끼한 맛을 잡아주는 치킨 메뉴가 인기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네네치킨 파닭으로 프라이드 치킨에 채썬 파를 올린 뒤 겨자 소스를 뿌려서 담백하게 먹을 수 있다. 마늘닭은 삼통치킨의 주력 메뉴인데 역시 비슷한 이유로 요즘 사랑받는다.

이런 파닭의 원조로 꼽히는 곳은 충남 조치원시의 왕천파닭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지역에서 인기가 좋은 ‘시골 닭’들이 중앙무대에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동찜닭·춘천닭갈비(홍천)·교촌치킨(구미)처럼 다양한 지역 브랜드가 상경 중이다. 무봤나촌닭(부산) 등 새로운 ‘시골 닭’도 제2, 제3의 교촌신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 중이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음식과 달리 경상도 지역 치킨이 선전하고 상대적으로 전라도 지역 치킨은 부진하다는 점이다.

앞으로 전국구로 진출할 수 있는 치킨으로 꼽히는 것은 인천의 ‘신포닭강정’이다. 워낙 기다리는 줄이 길어서 5분 거리에 사무실이 있는 한 직장인은 “사무실 옮겨온 지 석 달이 지나고서야 겨우 맛을 볼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수원의 ‘진미치킨’, 전국에 배달하는 ‘만석닭강정’, 대구 평화시장의 ‘닭똥집튀김’도 곧 전국구로 떠오를 메뉴로 꼽힌다.  

마늘양념 닭 트렌드를 일으킨 삼통치킨은 고려대 앞 ‘삼성통닭’을 모태로 한 브랜드다. 치킨 신규 브랜드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생기기도 하는데 삼통치킨이 대표적이다. 고려대 앞은 닭의 다양한 부위를 골고루 먹는 곳으로 꼽히는데 ‘고대 닭발’ ‘고대 닭곱창(닭내장)’ 등도 치킨 마니아에게 인기 있는 메뉴다. 서울대 근처 신림동 고시원에서는 간편한 컵치킨이 유행이고 홍대 앞에서는 카레 양념을 더한 ‘레게치킨’이 인기다.

치킨 마니아들은 이외에도 곳곳에 숨은 ‘명닭’을 찾아다닌다. 부암동의 ‘치어스’, 신사동의 ‘한잔의 추억’, 양재동 ‘양재닭집’ 등이 반드시 가보아야 할 곳으로 꼽힌다. 시장 닭이 브랜드화하고, 외국 브랜드가 들어오고, 다시 국내 브랜드가 뒤쫓고, 그리고 탈브랜드화하는 양상이 전반적인 한국 치킨의 성장 모형이라 할 수 있다.

7월1일, 〈시사IN〉 회의실에서 기자가 ‘치킨 감별사’로 초빙한 트위터 이용자 10명과 함께 트위터 이용자들이 선호하는 치킨 8가지 종류(네네치킨·교촌치킨·굽네치킨·보드람치킨·BBQ치킨·또래오래치킨·페리카나치킨·멕시카나치킨)의 시식회를 가졌다. 각 치킨 브랜드의 대표 메뉴를 시켰는데 이날 참석한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은 여덟 곳의 치킨 맛이 모두 다르고 개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입맛이 섬세해지고 취향이 다양해지면서 치킨 맛도 다양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리 방법이든 소스든 튀김옷이든 하물며 포장이든, 뭔가 한두 가지는 차별화되어 있었다.

브랜드 치킨, 대리점마다 맛의 편차 커

시식회에서 가장 평이 안 좋았던 치킨은 굽네치킨이었다. 한 참가자는 “닭을 구워온 것이 아니라 살짝 삶아온 것 같다”라고 평했다. 그러나 이것이 굽네치킨 전체 맛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국내 치킨 브랜드 대리점들은 품질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편차가 심하기 때문이다. 굽네치킨과 함께 교촌치킨도 대리점마다 맛의 편차가 심한 곳으로 꼽힌다. 

깨끗한 기름을 쓰는지, 수입 냉동 닭이 아니라 국산 냉장 닭을 쓰는지에 따라 치킨 맛의 편차가 심하다. 한 참가자는 “월드컵도 유럽에서 하면 유럽팀이 우승하고 유럽 외에서 하면 남미팀이 우승한다. 치킨 가게도 어디서 시키느냐에 따라 편차가 심하니 다른 곳에서도 테스트해봐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군대에서 먹었던 닭고기미역국에서부터 이날 치맥 번개는 고대 앞 닭곱창집과 삼통치킨으로 이어졌다. 결론은 한국의 닭요리 문화가 우수하다는 것이었다. 닭고기 말고도 닭내장·닭똥집 등 다양한 부위를 먹고, 튀겨 먹고 삶아 먹고 물에 풍덩 빠뜨려 먹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요리한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치킨 강국 한국이 다음 월드컵 때는 축구뿐만 아니라 치킨 요리로도 세계를 제패할 수 있을까?

고재열 기자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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