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전체에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

2010. 5. 2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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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이슈추적]박지연씨 죽음 뒤 '삼성 산재' 제보 쏟아져…유방암 걸린 신아무개씨, 백혈병 김아무개씨, 급성골수성백혈병 정아무개씨…

지난 5월8일, 토요일인데도 이종란 노무사는 새벽같이 길을 나섰다. 그가 탄 고속버스는 전북 전주를 향했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했던 신아무개(31)씨가 유방암에 걸렸다는 제보를 받고 달려가는 길이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 활동가인 이종란 노무사는 "지난 3월31일 삼성 노동자 박지연씨가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숨진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사한 피해 사례 제보가 쏟아져 휴일도 없이 전국을 돌고 있다"고 말했다.

"가난한 지방 아이들만 오래 일하다…"

전주에서 만난 신씨는 뒤척임도 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은 전부 빠졌다. 입안부터 위장, 대장 등 음식이 지나가는 신체기관은 모두 헐었다. 이 노무사가 인사를 건네자 신씨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2000년 4월 21살에 기흥공장 생산직 사원으로 입사해 6년6개월 동안 근무했다. 근무한 지 2~3년이 될 즈음부터 자꾸 구토를 했고 가슴 부위가 쥐어틀리게 아팠다. 한 달에 두 번씩 생리를 했다. 입사 동기들은 1~2년 새 모두 그만두었다. 몸 상태가 극도로 안 좋아진 2005년 9월에야 신씨도 사표를 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유방암 2기 진단을 받았다. 종양이 너무 커서 바로 절제수술을 해야 했다.

반올림에 제보를 한 사람은 신씨의 언니였다. 박지연씨 사망 보도를 우연히 접하고서야 언니는 동생의 병이 '업무상 질병'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동생이 몸이 아프다고,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는데도 내가 시집갈 때까지 계속 다니라고 했으니 내가 죄인"이라며 동생 옆에서 눈물을 흘렸다. "결국 돈을 벌어야 하는 가난한 지방 아이들만 오래도록 일을 하다 병에 걸린 것 같아 화가 난다"고도 했다.

신씨는 "공장 전체에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고 했고 "출퇴근하며 하늘을 보면 공장 위만 뿌옇더라"는 말도 했다. 이종란 노무사는 "노동자들의 공통적인 증언"이라고 설명했다. 신씨는 주로 8라인에서 약품 속에 담긴 웨이퍼(집적회로 제작에 쓰이는 얇고 둥근 실리콘판)에 긁힘이 있는지를 육안이나 현미경으로 검사하는 일을 했다. 웨이퍼를 육안으로 검사할 때면 지린 화학약품 냄새에 어지러웠다. 검사 중 웨이퍼를 손상하면 시말서를 써야 하기에 신씨는 맨손으로 작업을 하기도 했다. 작업대를 세척할 때 쓰는 유기용제에서는 더 불쾌한 냄새가 났다. 2003년 여름에는 화학가스 누출사고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런 경보가 없어 신씨는 한참을 앉아서 일했다. 뒤늦게 동료 한 명이 달려와 "누출사고 났다니까 빨리 나가자"고 해 뛰어나왔다. 회사에서는 어떤 가스가 누출됐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신씨는 산재 신청을 하기로 결심하고 이 노무사가 준비해간 서류에 사인을 했다. 사인을 마친 신씨는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했다. 이 노무사는 신씨의 손을 잡고 "함께 싸워서 함께 이기자"고 했다. 신씨는 또 눈물을 훔쳐냈다.

신씨의 집을 나와 전북 익산으로 갔다. 젊은 부부를 만났다. 삼성LCD 천안공장에서 6년간 근무한 김아무개(26)씨와 그의 남편이었다. 두 사람은 사내커플이었다. 부인은 생산직 노동자, 남편은 설비 엔지니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사한 김씨는 오존을 사용하는 자외선(UV) 공정, 감광제를 사용해 색을 입히는 'RGB 공정', 황산 등 화학약품을 사용해 감광제를 벗겨내는 '에처스트립 공정' 등에서 일했다. 김씨가 사용한 감광제에서는 지난해 서울대 산학협력단 조사에서 발암물질인 벤젠이 검출됐다. 2008년 2월, 김씨는 계속 몸이 좋지 않아 회사를 그만뒀다. 지난 3년간 아이를 가지려고 했지만 임신이 되지 않았다. 지난 2월, 김씨는 만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남편의 증언이 덧붙여졌다. 그는 "엔지니어들은 자외선 설비가 유해한 걸 아니까 이를 점검할 때는 뚜껑을 열어두고 30분 정도 밖에 나갔다 오는데 여사원들은 전부 그 옆에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화학약품이 바닥에 쏟아지면 여사원들이 세척제로 청소를 하는데 이 과정에서 2~3개 화학약품이 뒤섞여 냄새가 지독했다"고 증언했다.

암·희귀질환 발생자 총 47명

익산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던 밤 11시30분께, 이 노무사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저희 누나가 백혈병에 걸렸습니다"라는 문자메시지였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생산직 노동자인 정아무개(24)씨가 급성골수성백혈병에 걸렸다는 제보였다. 이 노무사는 다음날인 일요일 오후에 제보자를 만났다. 재직 중인 노동자의 발병 사실이 확인된 것은 박지연씨 이후 두 번째였다.

5월13일 현재 반올림이 파악한 삼성전자 반도체·LCD, 삼성전기의 암·희귀질환 발생자는 총 47명이다. 박지연씨 사망 이후에만 20여 건의 제보가 쏟아졌다.

추가 제보자 중 5명이 5월13일 '집단 산재 신청'에 나섰다.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한 유명화(28·중증재생불량성빈혈)씨,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한 신아무개(31·유방암)·김기영(41·베게너육아종)·주교철(50·급성골수성백혈병)·고 김경미(급성골수성백혈병)씨다. 이날 산재 신청에 나선 유명화씨의 아버지 유영종(53)씨는 근로복지공단 직원들에게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줄 겁니까"라고 따지다가 끝내 울먹였다. 지난 4월 "믿을 수 있는 '제3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역학조사를 하겠다"고 밝혔던 삼성 쪽은 아직까지 아무런 계획도 내놓지 않고 있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23살의 나이에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의 유가족이 외로운 투쟁을 시작한 지 3년, 이제 '삼성 산재 투쟁'은 삼성반도체를 넘어 LCD 공장·삼성전기 출신까지 포함한 47명의 싸움으로 확대되고 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허재현 기자 한겨레 보도영상팀 catalunia@hani.co.kr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 한겨레 > [ 한겨레21 구독| 한겨레신문 구독]ⓒ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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