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활 599일 남은 건 이 사진 한 장.. 침몰 98금양호 인도네시아 두 선원의 '흔적'

2010. 4. 22. 17:5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선원 람방 누르카효(36)는 지난 9일 가루다인도네시아항공 GA871편 '화물칸'에 실려 고국으로 돌아갔다. 2년 만의 귀향인데 빈손이었다. 두 살, 네 살 두 아들과 아내, 노부모. 고향 트망궁(자바섬 중부 도시)의 가족에게 줄 선물은 준비하지 못했다. 일주일 전 입었던 어부용 녹색 고무 작업복, T셔츠 세 벌, 트레이닝복, 속옷, 남색 면장갑, 스포츠 양말, 그리고 늘 몸에 지녔던 여권, 외국인등록증, 선원수첩. 귀향길에 동행한 건 그게 전부였다.

그나마 누르카효는 운이 좋았다. 쌍끌이저인망어선 98금양호(99.48t)에 동승했던 인도네시아 선원 유수프 하에파(35)는 여전히 고무복 차림으로 서해 속에 있다. 98금양호는 지난 2일 두 동강 난 해군 천안함 실종자 수색을 돕고 돌아가다 인천 옹진군 대청도 남서쪽 55㎞ 해상에서 캄보디아 국적 화물선(1472t)과 충돌한 뒤 침몰했다. 선원 9명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이튿날 누르카효를 포함해 시신 두 구가 인양됐고, 선원 7명은 22일 현재 실종 상태다. 하에파는 실종자 명단에 올랐다.

올 4월 대한민국은 천안함 참사로 내내 슬펐다. 그 추모와 애도, 오열 속에 98금양호 선원의 비극이 끼어들 틈은 없는 듯했다. 지난 19일 이명박 대통령의 눈물어린 연설 어디에도 금양호 선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98금양호 실종자가족대책위원회'는 진상조사와 선체 인양, 의사자(義死者) 인정 등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지만 진전이 없다. 저인망어선을 타면 1년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보낸다. 이들이 육지에 확보한 자리는, 살아있을 때 그랬듯 죽어서도 변방이었다. 그 변방의 가장 변방에 누르카효와 하에파가 있었다.

대한민국은 두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과 친분이 있던 한국인과 쓰던 물건은 대부분 금양호와 함께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배가 인양되지 않는 한 그들의 마지막 기록 역시 영원히 묻힐 것이다. 인도네시아 선원 2명이 한국에서 보낸 2년. 이 땅에선 아무도 통곡하지 않는 그 2년의 흔적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사진 한 장과 셔츠 두 장

지난 13일 오후 7시30분 인천 항동 L아파트. 금양호 소속 선박회사인 금양수산의 박갑서(57) 사장 자택 거실에는 인도네시아 선원 누르헨디(25)가 앉아 있었다. 사고 선박 98금양호와 짝을 이뤄 작업해온 97금양호에 탔던 그는 한국에 온 뒤 누르카효, 하에파와 함께 혼자 사는 박 사장 집에 기거해 왔다.

박 사장이 작은 방 2개를 보여줬다. 현관 오른쪽 방에 누르카효와 누르헨디가, 왼쪽 방에 하에파가 머물렀다고 한다. 한 평 남짓한 방에는 싱글 침대와 옷장, 책장이 하나씩 놓여 있다. 남은 물건은 누르카효의 쑥색 T셔츠와 하에파의 흰색 반팔 T셔츠 한 벌씩. 그게 끝이다.

누르헨디는 "다 배에 있다"고 했다. 박 사장도 "뱃사람들은 배 탈 때 가진 거 다 챙겨 갖고 간다. 물건이 죄다 배랑 바다에 가라앉았으니 방에는 남은 게 없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나마 누르헨디 휴대전화에는 누르카효의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었다. 지난해 소풍갔을 때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출입국서류를 빼면 희생자가 한국에 남긴 유일한 사진이다.

자바섬 중부 도시 마잘렌카 출신의 누르헨디는 인근 트망궁 출신 누르카효와 특히 친했다. 조업이 끝나고 배가 땅에 닿아도 친구 없고 한국말 서툰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이들은 연안부두와 동인천역 인근을 맴돌았다. 닭 먹고 옷 사고 노래방 다니며 함께 놀았다. 한국 선원 가운데는 98금양호 막내 허석희(33)씨와 가장 가까웠는데 그 역시 실종됐다.

사고 소식을 듣고 누르헨디는 사흘간 굶다시피 하며 울기만 했다. "람방 없어. 석희형 없어. 이제 아무도 없어." 누르카효의 사진이 든 휴대전화를 만지작대던 누르헨디는 고개를 떨궜다.

박 사장은 인도네시아 출신 세 선원을 "보석 같은 애들"이라고 했다. "착실하게 일도 잘하고. 한국 사람보다 일을 더 잘했어. 아까운 거지. 사고 소식 들었을 땐 배만 망가진 줄 알았어. 배야 어떻게 되든 빚은 내가 지면 되는 건데. 사람이 죽었잖아. 어이구, 미치는 거지."

한국 생활 599일

2008년 8월 12일 누르카효와 하에파는 자카르타발 대한항공 KE628편으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는 누르헨디와 다른 인도네시아 선원 5명도 함께 타고 있었다. 그때부터 사고 발생일까지 약 1년8개월. 그 기간 중 두 선원이 육지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3개월 안팎이다.

97·98금양호는 꽃게잡이가 시작되는 8∼9월부터 주꾸미철이 끝나는 이듬해 5월 말까지 조업했다. 97호가 작업하면 98호가 그물 쳐놓고 잠자고, 98호가 일할 땐 97호가 쉬는 식으로 24시간 배 위에서 먹고 자고 일했다. 간혹 풍랑과 선박 수선을 이유로 인근 섬에 피항(避港)하면 그게 휴가였다. 그렇게 한국 체류 1년8개월 중 1년5개월을 바다에서 보낸 둘을 뭍에서 아는 이가 드문 건 당연했다.

두 인도네시아 선원의 삶을 증언해줄 사람은 함께 희생된 98호 선원 7명과 97호 선원 9명. 97금양호 김종영 선장은 2008년 9월 말∼2009년 5월 말 누르카효와 함께 배를 탔다.

"람방(누르카효)은 키가 170㎝ 좀 넘었나. 마른 편에 잘 생겼지. 성격은 활달하고 적극적이었고. 유수프(하에파)는 내성적이어서 잘 어울리지는 않았지. 일도 성격 따라 간다고 람방은 빠릿빠릿하고, 유수프는 조용하게 일을 금방 배웠어요. 그래도 자세한 (개인사정 등) 내막은 모르지. 한국 선원 중에는 석희가 장난도 많이 치고 친했는데 걔도 사고를 당했으니…."(김 선장)

나머지 97금양호 선원은 이미 뿔뿔이 흩어졌다. 김 선장은 "육지 오면 흩어지고, 돈 떨어지면 모이는 게 선원들"이라고 했다. 그나마 운반선 선장에겐 몇 가지 기억이 남아 있었다. 운반선은 생필품과 기름, 잡은 생선 등을 날라주는 일종의 연락선. 최길섭 선장은 "멀리 돈 벌러 와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 과자 몇 번 사다줬다. '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이런 말을 곧잘 했다"고 말했다.

지난 9일 시신 송환 전까지 인천 학익동 송도사랑병원 영안실에 마련됐던 누르카효의 빈소에는 조문객이 거의 없었다. 경북 구미 장갑공장에서 일한다는 누르카효의 처남 비딕 와사마(33)가 시신 확인을 위해 다녀갔을 뿐이다. 인도네시아 가족은 "못 온다"고 연락해 왔다. 10일에는 경기도 용인의 인도네시아 노동자 10여명이 "만난 적은 없지만 애도의 뜻을 표하고 싶다"며 찾아왔다. 자체 커뮤니티를 형성한 제조업체의 외국인 노동자와 달리 고립된 선원에겐 친구도 드물었다.

비교적 자세한 가족사는 처남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매형이 인도네시아에서 트럭기사로 일하다 둘째 낳자마자 떠나서 애 얼굴도 몰라요. 생활비 대고 집 살 돈 모은다고 돈 벌러 왔는데 죽었어요. 소식 듣고 누나는 계속 울기만 한대요."

누르카효는 월급 90여만원 중 70만원을 본국 가족에게 부쳤다고 한다. 120만원 안팎인 국내 제조업체 월급에 비해서는 낮지만 인도네시아 현지 화폐로 600만 루피아(대졸 화이트칼라 월 180만∼270만 루피아)에 가까운 거액이다. 가장이 세상을 뜨면서 남은 가족의 생계도 막막해졌다.

"넘 좋은 일 하다가…"

며칠간 해양안전심판원에서 사고 조사에 시달린 김종영 선장은 13일 오후 금양수산 관계자 4∼5명과 함께 텅 빈 영안실을 지키고 있었다. 천안함 실종자 수색을 돕기로 결정한 건 주선(主船) 97금양호 김 선장이었다. 종선(從船) 98금양호는 김 선장 지시를 따라야 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동료 9명을 잃었고, 그는 97금양호 선원 8명과 함께 실업자가 됐다. 쌍끌이어선은 한 척이 망가지면 나머지 한 척도 무용지물이 된다.

구조 작업에 왜 참여했느냐고 묻자 김 선장이 버럭 고함을 쳤다. "아, 이 사람아 뭘 무슨 생각으로 나가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간 거지."

그리고는 덧붙였다. "그런 건 있지. 넘 도와주러 갔다가 나 죽은 꼴이잖아. 막말로 거기 안 갔으면 사고도 안 났을 텐데. 다 내 새끼들인데 거기 안 갔으면… 그랬으면 그렇게 죽지는 않았겠지. 누가 알아준다고."

인천=글·사진 이영미 임세정 기자 ymlee@kmib.co.kr

<goodnewspaper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