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연중기획]지금 대학생은 대학과 싸운다

2010. 4. 15.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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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ㆍ4·19혁명 50년 오늘의 캠퍼스 풍경… 자본에 물든 기업논리에 홍역 앓아

1960년 4월. 합동통신사 외신부 5년차 기자 리영희는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3월 15일 이후 남쪽으로부터 불어온 뜨거운 혁명의 바람이 그를 들뜨게 만들었다. 청년 시절을 회고하며 쓴 책(〈역정: 나의 청년시대〉, 창작과비평)에서 그는 "4월 19일의 격동은 편집국의 의자에 앉아서 견디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시간마다 앞을 지나가는 역사의 파동은 나의 젊은 가슴에 피를 끓게 했다"고 회고했다.

그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파동 한복판에 있었던 것은 혈기왕성한 20대 대학생들이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다. 시대가 바뀌면서 싸움의 대상이 달라졌다. 4월혁명 때 대학생들이 정권과 싸웠다면 요즘 일부 대학생들은 대학이라는 체제 자체와 싸운다. 이들에게 대학은 대기업 자본이 주도하는 구조조정의 대상이거나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거부해야 하는 대상이다.

'기업식 구조조정 반대' 고공시위

중앙대 중앙도서관 뒤편에는 '의혈탑'이라는 게 있다. 4월혁명 당시 고병래(상학과), 김태년(약학과), 서현무(법학과), 송규석(정외과), 지영헌(신문학과), 전무영(신문학과) 등 6명의 중앙대 학생들이 희생됐다. 의혈탑은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1960년 9월 '중앙대 총장 및 교직원 일동'이 세운 것이다. 탑의 표지석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꽃은 피어 지나 뿌리가 깊고 씨를 맺어 긴 겨울 지나 새싹 틔워 꽃무리 이루니 여기 꽃다운 젊음을 조국과 민주의 제단에 바쳐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젊은 혼들이 있으니 민족의 대지에 피와 살을 묻어 통일을 잉태하나니 우리는 이를 의혈이라 부른다."

50년 전 의혈탑의 주인공들은 거리 시위를 했다. 2010년 '의혈 중앙' 재학생 세 명은 고공시위를 벌인다. 4월 8일 중앙대는 오전 10시30분쯤 시작된 이사회에서 단과대 통폐합과 모집단위 광역화를 뼈대로 한 '학문단위재조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철학과 김창인씨(21)와 김표석씨(21)는 이사회가 열리기 전인 오전 8시쯤 서울 한강대교 아치에 올라갔다. '대학은 기업이 아니다. 기업식 구조조정 반대'라는 펼침막을 내걸었다. 두 사람은 오전 9시30분쯤 내려와 경찰에 연행됐다. 독문과 3학년 노영수씨는 이사회가 열리기 전에 학교 안 R&D센터 공사 현장 타워크레인에 올라갔다. 그는 기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구조조정 최종안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학내 민주주의가 총체적 난국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의 입과 귀가 되는 학내 언론은 대학 당국의 철저한 감시 속에 탄압받고 있고, 우리의 자유로운 활동과 목소리가 보장돼야 할 대학에선 학생자치 탄압이 버젓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노씨는 낮 12시쯤 크레인에서 내려와 경찰에서 업무방해 혐의로 조사를 받은 다음 오후 3시쯤 귀가했다.

대학과 학생들의 입장은 접점 없는 평행선이다. 노씨는 전화통화에서 "독문, 일문, 불문과 학생들은 무력감을 느낄 정도다. 인문대 기초학문 단위가 폐지될 위험에 처했다"면서 "대학을 비판하는 게시물을 걸면 곧바로 철거당한다.

더 이상 통상적인 방법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올라갔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 학교 관계자는 "기초학문 단위를 말살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과 이름은 사라지지만 커리큘럼은 그대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세 학생에 대한 징계를 검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표현의 자유가 허용하는 정도를 넘어섰다고 본다"면서 "학생들은 아무리 얘기해도 학교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학문단위재조정안은 지난해 12월 29일 1차안 이후 학내 의견을 모두 수렴해서 만든 것이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게 아니다"라고 밝혔다. 노씨는 "학교가 강경하게 나온다면 우리도 대학생답게 참신한 아이디어로 싸우겠다"고 말했다.

중앙대 학생들이 고공시위를 하던 날 오후 5시 고려대 안암캠퍼스. 학생회관 앞 민주광장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모였다. 이 대학 동아리연합회가 주최한 '김예슬 선언으로 바라본 대학의 기업화와 20대의 현실' 토론회다.

"내 삶이 시들기 전에 대학을 거부한다"

민감한 현실 인식을 지닌 대학생은 이제 부패한 정권을 거부하기 이전에 먼저 대학을 거부한다. 지난 3월 10일 이 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는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로 시작하는 대자보를 교정에 붙였다. 그는 "국가는 의무교육의 이름으로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고,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에 '인간제품'을 조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하청업체가 되었다"면서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라고 썼다.

토론회 사회를 맡은 한국사회연구회 김소리씨는 "학교는 (김예슬씨 선언에 대해) 어떤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자보를 철거해 갔다. 학교 당국만 아니라 우리 사이에서도 자퇴 여부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이도 많다. 그러나 '김예슬 선언'이 던진 메시지는 사회적 문제임과 동시에 바로 우리 문제"라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여한 학생들은 대학의 기업화를 성토하고, 스펙 쌓기 경쟁 속에서 시들어가는 20대의 삶을 괴로워했으며, 대학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토로했다. 그러나 토론회에 참여한 학생은 20명도 되지 않았다.

고려대에는 4.19 기념비가 없다. 대신 4.18 기념비가 있다. 4월혁명 당시 고려대 학생들은 4월 18일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날 고려대 학생들이 반공청년단과 정치깡패들로부터 폭행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4월 19일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기념비는 학교 본관에서 민주광장으로 꺾여 내려가는 오른쪽 길 모퉁이에 서 있다. 1961년 4월 18일에 세워진 기념비 표지석에는 당시의 뜨거운 열정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 사악과 불의에 항거하여 압제의 사슬을 끊고 분노의 불길을 터뜨린, 아! 1960년 4월18일! 천지를 뒤흔든 정의의 함성을 새겨 그날의 분화구 여기에 돌을 세운다."

1960년 4월, 대학은 한국 사회 민주화를 요구하는 혁명의 열기로 들썩였다. 2010년 4월, 대학은 자본의 질서가 만든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소수 학생들이 대학과 부딪치며 심한 홍역을 앓고 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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