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복지다"

박형숙 기자 phs@sisain.co.kr 2010. 3. 15. 08: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규모 낙선한 지금이 기회다." 우상호 민주당 대변인의 말이다. 그는 지난해 말 강기정·임종석·김영춘·김민석·안희정 등 386 전·현직 의원들과 공부 모임을 조직했다. 공부 내용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분야가 복지다. 과거 경제나 통일에 우선순위를 두었던 것과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패러다임이 이동하고 있다. 지금은 결국 분배 문제다. 지난 10년 민주정부 집권기에 사회복지가 제도화되고 확충되었지만 앞으로는 단지 절대빈곤층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 개념을 넘어 전체 국민의 삶의 질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공부에는 '경계'가 없었다. 이른바 DY(정동영)계, GT(김근태)계로 나뉘었던 의원들도 지금은 머리를 맞대고 있다. 민병두·김현미·우원식·이인영 등 전직 의원 10여 명은 경제 공부에 뒤이어 다음 주제로 복지를 잡았다. "다음(대선·총선)은 복지다"라는 판단 아래 공부 기간을 더 길게 잡고 있다. '선수'를 치고 나오는 정치인도 있다. 진보신당의 간판스타인 노회찬·심상정 전 의원은 6·2 지방선거에 복지 출사표를 내걸었다.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노회찬 후보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새로운 복지서울'이라는 제목으로, 복지가 일부 계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시민이면 누구나가 누릴 보편 권리임을 주장했다. 경기도지사에 나서는 심상정 후보의 복지 철학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대선에 앞서 권영길 후보와 겨뤘던 당내 경선에서는 '세 박자 경제'를 내세웠지만 이번에는 '세 박자 복지'다.

경기도 내에 사교육 없는 '핀란드형' 공교육 혁신을 이루겠다거나, 전 도민 주치의 제도 등이 대표 정책이다. 진보신당은 특히 이명박 정부뿐만 아니라 민주당까지 싸잡아,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시혜성 복지'라는 점에서 철학이 같다고 차별화 전략을 취했다. 4대 보험의 완성이나 복지 예산의 증액 등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성과는 있었지만, '분배냐 성장이냐' 이분법이 지배해온 복지 담론에서 여전히 노동 능력이 없는 극히 빈곤한 계층을 자산 조사로 선별해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선별적 복지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한계였다.

정동영 의원의 고민은 여기서 출발했다. 지난 대선 후보로 나섰다가 낙마한 그는 '민주정부 10년'에 대한 국민의 평가가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실감했다. 그러면서 잡은 대안이 복지다. 과거 '중도' 경쟁을 벌였던 것과 달리, 그는 진보 진영의 복지 의제를 적극 수용하고 있다. 의료 서비스 분야 시장개방을 놓고 참여정부와 '최전선에서 싸운' 이상이 교수(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가 주도하는 '복지국가와 진보대통합' 논의에 적극 결합하고 있다. 이 교수는 "신자유주의 양극화 문제를 우리 사회 대립적 의제로 삼지 않고서는 더 이상 보수 진영과 차별성 있는 대립구도를 형성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정치권의 이명박 학습효과?

민주당의 이 같은 '좌클릭' 움직임에는 '박근혜 효과'도 한몫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의 '복지한국'을 향한 보폭이 심상치 않다는 게 정가의 평가다. 시작은 지난해 5월 이른바 '스탠퍼드 대학 연설'이었다. 당시 미국을 방문한 박 의원은 "개인의 이익과 사회 공동선이 합치될 때 그것이 진정한 성장이다"라며 소외계층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함께 가는 '공동체 행복'을 강조했다. 얼마 뒤 박정희 전 대통령 30주기 추도식에 참석해서는 "아버지의 궁극적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었다"라며 자신의 뜻을 간접 피력했다. 국회 상임위(보건복지가족위원회) 활동에서도 그의 '복지 사랑'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심지어 "저는 복지란 궁극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이 자아실현을 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문화 정책 역시 시혜적 측면으로만 보지 말고 인식의 전환을 해야 한다"(2009년 10월6일 보건복지가족부 국정감사)라고 한 발언은 보편적 복지 개념으로 해석이 가능했다.

'박근혜표 복지' 구상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아직은 베일에 싸여 있다. 사회복지제도의 근간이 되는 사회보장기본법을 전면 개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후문도 들린다. 사실 박 의원의 대선 공약이 감세·규제완화로 대표되는 '작은 정부'였던 점에 비춰보면 그녀가 최근 던지는 복지 레토릭은 무리한 부분이 있다. 당시 분배보다 성장이 우선이라는 그의 시각("성장이 곧 복지다")은 두드러졌고, 특히 감세를 주장하면서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건 난센스로 받아들여졌다. "감세와 규제완화로 투자가 이뤄지면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일자리는 최고의 복지다"라는 그의 논지가, 경제성장의 일자리 창출 효과가 예전같지 않다는 게 주지의 사실인 지금도 반복될지 지켜볼 일이다. 한 측근은 "큰 방향은 그대로다. 다만 뉘앙스와 무게중심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당대표나 후보 시절에는 오로지 개인으로 자신의 철학과 색깔을 드러내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부담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복지국가 담론을 띄우려는 시도는 사실 참여정부 때도 있었다. 경제지출 비용을 10%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복지지출 비용을 40% 수준으로 높이는 장기국가재정계획인 '비전 2030'이 그것. 하지만 추진동력을 상실한 정권 말기, 의제화되기 전에 수장되는 신세였다. 이를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자신의 저서 < 대한민국개조론 > 에서 살려내기도 했지만, 그 역시 당내 경선에서 탈락해 참여정부의 복지국가 비전은 빛을 보지 못했다. '비전 2030'의 핵심은 사회투자 전략이다.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을 지낸 김용익 교수는 "참여정부가 한 일은 잔여적 복지 수준에 머물렀지만 지향한 것은 사회투자 국가였다.

신자유주의의 작은 정부와 전통적 복지국가의 한계를 극복하는 제3의 대안이라 볼 수 있다. 복지가 성장을 가로막는 비용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투자가 되도록 재구성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가령 실업자에게 실업수당을 주는 '소극적' 방식에 재취업 교육을 제공하는 적극적 노동정책을 병행하는 식이다. '친노' 인사들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사회투자국가론은 최근 출판된 김용익 교수와 민주당 '복지위 3인방'(백원우·최영희·박은수 의원)의 공저 < 복지도시를 만드는 6가지 방법 > 에 잘 드러나 있다.

바야흐로 복지가 당위인 시절이 왔다. 이런 싸움이라면 진보와 보수가 좀더 치열하게 경쟁해도 좋을 것 같다. 단, 늘 그랬듯이 말로 하는 '복지 마술'은 쓰지 않았으면.

박형숙 기자 / phs@sisain.co.kr- 정직한 사람들이 만드는 정통 시사 주간지 < 시사IN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시사IN 구독 ]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